[강윤경 칼럼] 반도체 돈벼락과 분배의 정의
논설주간
AI 호황에 따른 반도체 슈퍼사이클
삼성전자 기록적인 영업이익 대박
노조 N% 성과급 투쟁에 파국 위기
글로벌 초격차 기업 등극할 기회
돈 잔치 아닌 경쟁력 투자해야 가능
‘경제적 해자’ 확보 기회로 삼아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성 주위를 파서 만든 구덩이를 해자(垓字·moat)라고 한다. 효과적 방어를 위해 해자에 물을 채워 못으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었다. 경주 월성이나 중국 자금성, 중세 유럽의 성곽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건축 양식이다. 중국 신화통신이 최근 베이징에서 진행된 미중 정상회담에 앞서 “이번에는 해자를 더 깊이 팠다”라며 “미국이 일방적으로 중국의 양보를 요구했던 9년 전 트럼프의 방중과는 다를 것”이라고 시진핑의 철통방어를 예고하기도 했다.
해자를 경제적 은유로 소환한 건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이사회 의장이었다. 1980년대 발표한 버크셔해서웨이 연례보고서에서 기업의 장기적 성장 가치 척도로 ‘경제적 해자’를 제시한 것이다. 경쟁사로부터 기업을 보호해 주는 높은 진입 장벽과 확고한 구조적 경쟁 우위를 일컫는다. 해자가 넓고 깊을수록 시장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지속적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이 가치를 앞세운 그의 투자 철학이었다.
세계를 지배하는 글로벌 초격차 기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경제적 해자다. 단순히 성능 좋은 GPU를 만드는 것을 넘어서 CUDA라는 독점적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구축한 엔비디아, 프리미엄 하드웨어와 iOS 생태계로 고객들을 락인(Lock-in)시킨 애플, 닷컴 버블의 파도를 물류 제국으로 바꾼 아마존 같은 기업이 이에 해당한다.
글로벌 시장에서 ‘퍼스트 무버’가 되지 못해 ‘패스트 팔로어’ 전략으로 만년 2위에 머물렀던 우리 기업에도 기회가 왔다. 인공지능(AI) 호황에 따른 반도체 슈퍼 사이클 덕이다. 삼성전자의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이 57조 2000억 원에 이르렀다. 애플과 엔비디아에 이어 글로벌 톱 3다. 올해 영업이익이 300조 원에 이르고 내년에는 세계 1위에 등극할 것이라는 들뜬 전망도 나온다. 반도체 슈퍼 사이클을 공유하는 SK하이닉스의 1분기 영업이익도 37조 6000억 원을 기록했다. 한마디로 ‘돈벼락’이다.
반도체 돈벼락은 두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경제에도 다시 못 올 기회다. 중동전쟁에 따른 공급망 위기에도 국내 주식시장이 고공 행진을 이어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법인세를 포함해 각종 세금으로 나라의 곳간이 쌓이고 국민연금의 주식 평가이익까지 감안하면 ‘국가적 횡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재명 정부의 높은 국정 지지도도 따지고 보면 반도체 슈퍼 사이클에 기댄 측면이 적지 않다.
이제 우리에게 찾아온 이 국가적 횡재를 어떻게 구조적이고 지속 가능한 시스템으로 전환하느냐가 중요한데 돈벼락 분배를 놓고 싸움판부터 벌어졌다. 삼성전자 노조가 영업이익의 N% 성과급 제도화를 요구하며 파업 투쟁에 나선 것이다. 기업 이익에 따른 성과급 요구는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이고 절대적 액수를 따질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업의 지속 가능한 경쟁력과 사회적 책임이 전제다. N%의 성과급을 제도화하려면 손실이 발생했을 때의 임금 삭감이나 해고의 제도화도 감수해야 한다. 국민은 더 이상 삼성 노조의 파업을 노동 약자의 생존권 투쟁으로 보지 않는다.
삼성전자가 1분기 엄청난 영업이익을 거뒀다고 하나 그 자체로 글로벌 초격차 기업에 올라섰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기론이 비등했던 게 불과 1년 전이다. 냉정히 말하면 지금의 반전은 기술혁신의 결과물이라기보다 초호황에 따른 영향이 크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실적의 초격차를 구조적 초격차로 만들어 내는 일이다. 돈 잔치를 벌일 때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반도체 사업을 둘러싼 글로벌 경쟁이 더 살벌해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단순히 슈퍼 사이클의 수혜자가 아니라 업황과 무관하게 경쟁 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해자를 확보할 기회로 삼아야 마땅하다.
물론 반도체 기업 경쟁력의 핵심이 인재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적절한 성과 보상이 뒤따라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동안 잉여의 공정한 분배에 대한 사회적 숙의가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단순히 현금 보상만이 아니라 회사의 성장과 노동자가 함께 갈 수 있는 주식 보상 등 다양한 방식의 성과 공유 시스템의 제도화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다만 이게 판을 엎으면서까지 할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오늘날의 삼성전자가 노사의 힘만으로 글로벌 기업 반열에 올라섰다고 할 수 없다. 국가의 정책적 지원이 있었고 수많은 하청업체와 노동자의 노력이 함께했다.
모처럼 찾아온 반도체 슈퍼 사이클로 삼성전자의 글로벌 초격차 기업 등극과 국가 경제 선순환에 대한 국민적 기대도 큰 상황이다. 노사가 사회적 책임과 연대의식을 갖고 미래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경제적 해자 확대에 힘을 쏟아야 가능한 일이다.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