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안경
신호철 소설가
수술 덕분에 안경 벗고 세상 보니
한겹 거쳐 세상을 봤던 과거 대비
누구나 자신 안경 통해 세상 해석
세상 보는 초점 보정할 필요 있어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안경을 썼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더듬어 찾는 것이 안경이었고,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내려놓는 것도 안경이었다. 그래서인지 세상을 맨눈으로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늘 마주하는 컴퓨터 화면, 창밖의 나무, 길 건너의 풍경도 얇은 렌즈를 통과한 뒤에야 내게 닿았다. 불편한 안경이었지만, 한편으로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가장 익숙한 통로였다.
그런데 바로 작년에 내 눈에 급성백내장이 찾아왔다. 부랴부랴 수술을 받았다. 뜻밖에도 그 덕분에 맨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시계의 숫자가 보였고, 창밖 간판의 글씨도 읽혔다. 그런데 느낌이 묘했다. 햇살은 지나치게 눈부셨고, 눈앞의 현실은 어딘가 위태로웠다. 다시 안경을 착용했다. 유해한 빛을 차단해 시력을 보호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어쩌면 나는 여전히 뭔가를 한 겹 거쳐 세상을 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모두가 그렇게 보고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본다고 믿지만, 사실은 모두 자신의 안경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지 않은가. 경험과 기억이라는 안경, 욕망이라는 안경, 분노와 피해의식이라는 안경. 어떤 안경은 심하게 왜곡되어 전혀 다른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의심의 안경을 쓴 사람은 모든 일을 음모처럼 보고, 상처 난 안경을 쓴 사람에겐 모든 말이 공격처럼 들린다. 세상이 자신을 속이고 있고, 사람들이 자신을 밀어내고 있으며, 모든 결과가 누군가의 조작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곁에서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다. 그들의 눈에는 정말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안경을 쓴 본인은 잘 모른다는 데 있다. 남의 안경은 쉽게 보인다. 저 사람은 늘 색안경을 끼고 본다. 저 사람은 너무 단편적으로 본다, 저 사람은 세상을 비관적으로 본다. 이렇게 말하기는 쉽다. 이런 말을 하는 나 역시 어떤 안경을 쓰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나 또한 내 경험과 상처와 편견으로 세상을 재단한다. 내가 본 것이 전부라고 믿고, 내가 느낀 것이 곧 진실이라고 착각한다. 남의 안경을 탓하면서 정작 내 얼굴에 걸린 안경의 무게는 느끼지 못한다.
더구나 나는 안경을 벗는다고 해서 완전히 맨눈이 되는 사람도 아니다. 백내장 수술을 받으며 눈 깊숙한 곳에 인공수정체가 자리 잡았다. 안경은 벗을 수 있지만, 눈 안쪽에 들어온 렌즈는 어쩔 수 없다. 그것은 어쩌면 부단한 삶에 생겨난 상처 속에 심어진 기억 같은 렌즈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통해 세상을 보고, 그것이 나의 시야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그런데, 완전한 맨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나로서는 도저히 그 ‘맨눈’의 경지를 확신할 수가 없다. 오히려, 노안에는 돋보기를 맞추고 근시에는 오목렌즈를 쓰듯이, 자신의 안경 상태를 인정하고 그에 맞는 안경을 다시 맞추는 게 더 현명한 판단이 아닐까? 렌즈의 먼지를 닦고 도수를 바꾸어 보거나, 새로운 렌즈를 덧대어 보는 일 말이다.
가끔 안경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눈을 비비기도 한다. 물론, 내가 안경을 벗었다는 것은 여러 개의 안경 중의 하나일 뿐이다. 나는 나의 모든 안경을 벗겨낼 능력은 없다. 그러나 의심은 할 수 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걸까. 혹시 내 눈앞의 흐림은 안경의 얼룩 때문은 아닐까. 안경을 쓴 지 너무 오래되어 내가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가끔이라도 내가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보는 초점이 보정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 순간, 지금껏 손끝도 닿지 않아 허우적대던 세상이 얼마라도 더 따스하게 만져지지 않을까 싶다. 안경은 나를 세상과 갈라놓는 동시에, 세상으로 다시 이어주는 신기한 물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