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플라스틱 유감
슈퍼마켓조차 찾기 힘들던 1970년대 초반, 아이들에게 고른 영양을 공급하겠다며 우유를 배달해 먹는 가정이 제법 있었다. 당시 우유는 대부분 유리병에 담겨 배달됐다. 마분지처럼 딱딱한 내부 종이 뚜껑을 따다가 손가락을 잘못 밀어넣는 통에 병에 든 우유가 치솟아 옷을 버리곤 하던 게 다반사였다. 우유 뿐만이 아니다. 집이나 학교, 직장에서 물을 마실 때는 주전자에 담긴 물을 유리나 금속 컵에 따라 마시는 게 당연했다. 음료수도 유리병에 담긴 것을 마시고 공병을 반납한 뒤 몇 원씩 받아가는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시장에 장을 보러갈 때에도 생선과 육류는 신문지 같은 종이에 싸 오는 게 당연했으며 천 보자기를 이용해 장을 보는 풍경도 익숙했다.
그렇게 유리와 금속, 종이, 천을 중심으로 생활을 이어오던 대한민국은 이제 1인당 플라스틱 사용량이 세계 최상위권 수준인 나라가 됐다. 2023년 기준으로 대한민국 전체 생활·상업 플라스틱 폐기물 배출량은 770만 톤을 넘어섰으며 이대로라면 2030년엔 1000만 톤을 넘을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1인당 한 해 거의 200kg 수준의 플라스틱 쓰레기를 버리는 셈이 된다. 먹고 입고 사용하는 모든 측면에서 플라스틱을 빼고는 생활이 안 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중동 전쟁 여파로 나프타 공급선이 타격을 받는 현실은 예사롭지가 않다. 나프타는 플라스틱을 만드는 기초 원료로서 ‘석유화학의 쌀’로 불린다.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이 보유하고 있는 나프타의 재고는 보수적으로는 보름치, 많이 잡아도 3주치를 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다. 국내 최대 석유화학 업체인 LG화학이 최근 전남 여수의 나프타분해시설 공장 가동을 중단하기로 한 것은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프타 공급 차질의 결과는 플라스틱 없는 생활로의 회귀다. 단순하게는 쓰레기봉투·일회용기에서부터 복잡하게는 자동차·스마트폰까지 플라스틱 없는 현대인의 생활은 상상하기가 힘들다. 2024년엔 국제 플라스틱 협약 정부간협상위원회가 부산에서 열렸으나 플라스틱을 줄이면 생활이 불가능하다며 한사코 반대한 나라들의 반발로 인해 상징적인 ‘부산 협약’ 체결이 무산됐을 정도다.
나프타 공급 차질은 어쩌면 기름값 인상보다 일상 생활에 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 위기라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그 위기는 우리가 얼마나 플라스틱에 의존하며 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