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저 강물 아래 충절의 선혈, 봄꽃보다 붉었더라 [경북 영주시 순흥마을 슬픈 역사 엿보기]
단종 복위 도모한 금성대군 죽임 당한 곳
늠름한 노송 옆 소박한 신단 모셔져 있어
수령 1100년 ‘충신수’ 은행나무도 볼 만
순절 주민들 피 흘려 보낸 죽계천에 숙연
소수박물관서 올곧은 선비 정신 떠올려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 거사를 도모하다 죽임을 당할 당시 순흥마을 사람들도 수양대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면서 마을 자체가 없어졌다. 당시 죽어간 순흥마을 사람들의 시신과 피가 죽계천을 가득 메웠고, 그 피가 수 십리 밖으로 까지 흘렀다. 순흥마을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죽계천.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000만 명을 지나 1300만 관객을 넘어섰다. 2000만 명에 다다를 기세다. 장항준 감독의 ‘왕사남’은 강원도 영월의 유배지로 떠난 단종 이홍위(박지훈 분)가 고을 촌장 엄흥도(유해진) 등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며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는 이야기를 그렸다. 영화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적셨고, 영화계는 모처럼 1000만 영화 탄생에 반색했다. 영화의 여운을 잊지 못한 관객들이 실제 촬영지인 청령포를 대거 방문하면서 단종의 유배지는 관광 명소가 됐다.
‘왕사남’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단종의 숙부로서 단종 복위를 도모한 금성대군. 금성대군의 역할을 맡은 이준혁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많은 영화 팬들을 설레게 했다.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죽어간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그의 신단을 찾았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위치한 금성대군 신단.
■단종 복귀 운동의 성지, 금성대군 신단
금성대군은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이다. 단종의 숙부로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의 넷째 동생이다.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세조)은 평소 단종과 가까운 금성대군에게 누명을 씌워 순흥으로 유배를 보냈다. 금성대군은 당시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에 나섰고, 거사가 발각돼 이곳에서 죽임을 당한다.
사적 제491호로 지정된 금성대군 신단은 영주시 풍기읍을 지나 부석사 방면으로 소백로를 타고 가다 보면 순흥면 내죽리의 한 도로변에 자리잡고 있다. 금성대군 신단 입구는 ‘왕사남’의 인기를 말해 주듯 ‘단종 복위를 꿈꾸던 금성대군의 이야기. 영주 순흥에서 만나다’라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금성대군 신단은 2개의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사주문을 들어서면 제청과 주사가 마주하고 있고, 일각문으로 들어가면 토석담장 안에 신단이 조성돼 있다.
사주문을 통과하면 신단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일각문 양쪽에 늘어선 노송이 마치 호위무사 같다. 죽어서도 단종을 모시려는 금성대군의 기백이 엿보인다. 노송의 ‘호위’를 받으며 신단에 들어서자자 넋을 잃었다. 이렇게 절제되고 소박할 수 있을까. 누렇게 변한 잔디 하나 하나에도 단아함과 정결함이 묻어 있다.
신단의 모형이 특이했다. 중앙 뒤쪽에 금성대군 신단이 자리하고, 양쪽으로 순흥부사 이보흠의 단과 순절한 선비들을 추모하는 단이 마주 보고 있다. 돌로 만든 3개의 단은 마치 품(品)자 형태를 띄며 굳건한 충절을 나타내고 있다. 금성대군 신단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영조 18년(1742) 경상감사 심성희의 소청에 의한 것으로 금성대군이 순절(1457년)한 지 285년 만이다.
이곳에 금성대군 신단이 세워진 데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순흥읍지〉 등에 따르면 홍천현감 이대근이 선영을 다녀오던 중 순흥 청달리를 지날 때 그가 탄 말이 길을 피해 비껴가는 곳이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이대근은 이곳이 금성대군이 피흘린 곳이라 생각했다. 그날 밤 이대근의 꿈에 금성대군이 나타나 그곳은 자신이 죽임을 당한 곳임을 알렸고, 이대근은 이곳을 봉축하고 단을 쌓아 ‘금성단’이라 했다. 이후 숙종 9년(1683) 역적의 마을로 폐허가 됐던 순흥부가 복원되고, 영조 때 지금의 신단이 마련된 것이다. 금성대군은 단종과는 달리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신단만 남아 있다.
신단과 함께 마을을 지키는 1100년 된 은행나무.
■금성대군 신단 은행나무, 압각수
금성대군 신단을 나와 담장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가면 엄청난 크기의 은행나무를 쉽게 볼 수 있다. 금성대군 신단의 은행나무다. 잎이 오리발과 닮아 오리발나무라는 뜻의 ‘압각수’라는 이름이 붙었다. 수령은 1100년 정도로 추정되는데 높이만 무려 30m에 이른다. 이 은행나무는 순흥지역의 흥망성쇠와 함께 해 ‘충신수’로도 불린다.
언제부터인가 순흥마을 사람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노래가 있다. “순흥이 죽으면 이 나무도 죽고, 이 나무가 살아나면 순흥도 살아나네”라는 노랫말이 그것이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거사가 발각되면서 순흥마을 사람들은 관군의 습격을 받아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마을은 온통 불더미에 휩싸였고, 마을 인근의 죽계천은 피바다를 이뤘다. 순흥마을 전체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순흥부가 폐지될 당시 이 은행나무가 함께 말라죽었다고 전해진다. 세월이 흘러 죽었던 은행나무에서 새 가지가 나고 잎이 돋아나면서 숙종 9년 노랫말처럼 순흥부가 복원됐다. 금성대군과 순흥부가 복원될 것이란 순흥 사람들의 믿음이 실현된 것은 아닐까.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가족이 충신수에 술을 올리며 기도를 하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과 죽계천
금성대군 신단에서 동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우리나라 최초의 사학기관인 소수서원을 만날 수 있다.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이 마을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으로 불리게 됐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으로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됐다. 소수서원은 2019년 7월 전국 8곳의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소수서원으로 가는 수백 년 된 소나무 숲이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학자수림’이라 불리는 이곳은 500년 전 과거로 안내하는 시간의 숲처럼 느껴진다. 숲을 지나 소수서원으로 들어가면 정갈함을 먼저 느낄 수 있다. 강당인 명륜당을 비롯해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있다. 서원의 배치는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동·서재를 두고 있는 게 일반적인데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 구분한다. 유생들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소수서원 인근에 하천이 있다. 죽계천이다. 안동의 병산서원에서도 그렇듯 우리나라 대부분의 서원 앞에는 계곡이 흐른다. 공부로 지친 유생들의 몸과 마음을 쉬어가려는 것인지, 흘러가는 계곡물을 보며 자연의 이치를 깨달으려는 것인지 조상들의 지혜가 새삼 놀랍다.
잔잔히 흐르는 물이 평화롭지만 죽계천은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단종 복위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순흥마을 사람들은 무참히 죽어갔고, 그 피가 죽계천을 따라 수십 리를 흘러 갔다. 피가 멈춘 순흥면 동촌1리를 지금도 ‘피끝마을’로 불리고 있다.
소수서원의 경렴정에서 죽계천을 내려다보면 ‘경(敬)과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씨 새겨진 바위가 있다. 일명 경자바위다. ‘敬’은 주세붕, ‘白雲洞’은 이황의 글씨다. 주세붕은 수장된 마을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敬’자에 빨간 칠을 한 후 제를 올렸다고 한다.
유교전문박물관인 소수박물관 모습.
■순흥 정신의 요체 선비촌과 소수박물관
영주 선비촌은 한국 유교 문화 발상지인 영주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곳 중 하나다. 선현들의 학문 탐구와 전통 생활공간을 재현·체험할 수 있는 교육장이다. 고택 숙박체험에서부터 떡매치기, 전통혼례시연, 천연염색, 매듭, 칠보공예와 다도·캔들체험 등 다양한 전통문화를 즐길 수 있다. 매년 5월에는 이곳에서 한국선비문화축제도 열린다. 현재 보수공사 중이라 일부 관람과 체험행사가 제한적이다. 이곳을 방문할 경우 미리 연락(054-630-9700)을 해보는 것이 좋다.
선비촌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인근의 소수박물관을 찾았다. 이곳은 성리학을 주제로 선비문화를 조명한 국내 유일의 유교 전문박물관이다. 유교박물관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현대적인 건물 외부에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유교 전통의 갖가지 자료들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소수박물관은 총 4개의 전시실로 이뤄져 있는데,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 선생의 생애와 주세붕과 이황으로 이어지는 소수서원 탄생 여정까지의 전 과정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 전통의 유교적 자료들을 현대적 느낌으로 배열하고 전시한 점이 인상적이다. 도슨트 도움을 받으면 보다 풍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글·사진=김진성 기자 paperk@busan.com
김진성 기자 paper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