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호르무즈와 사르후
1618년 명나라가 만주의 후금을 치겠다며 조선에 파병을 요구했다.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낸 은혜를 갚으라는 ‘재조지은’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조선이 북방 수비와 군사 부족, 흉년 등을 이유로 파병을 차일피일 미루자, 명나라는 사신의 외교문서까지 가로채 읽으며 그 핑계를 일일이 반박했다.
광해군은 이 전쟁이 명의 패권 유지를 위한 원정일 뿐, 조선의 안보를 위한 싸움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거절의 대가가 두려웠다. 결국 마지못해 1만 3000명의 군사를 보내기로 했다. 광해군은 군사 지휘관으로 임명한 강홍립에게 ‘상황에 따라 행동하라’고 지시했다. 이를 두고 ‘싸움을 피하고 고의로 항복하라’는 적극적 의도가 담겼는지는 역사학자마다 견해가 엇갈린다. 다만 명의 파병 요청이 던진 딜레마에 깊이 고심했던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결과는 참혹했다. 만주 사르후 벌판에서 명군은 후금의 각개격파에 궤멸했고, 조선군도 약 9000명이 전사했다. 강홍립은 남은 병력과 항복했다. 조선은 실익 없이 군사를 잃었고, 파병 자체로 후금을 적으로 돌렸다. 이는 훗날 인조반정으로 친명 노선의 인조가 즉위한 이후, 후금이 조선을 두 차례 침공해 삼전도의 굴욕을 안기는 결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됐다.
사르후 전투의 패배로부터 400여 년이 지난 지금,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을 포함한 7개국에 호르무즈 해협으로 군함 파견을 요구하고 있다. 미·이란 전쟁으로 촉발된 해협 봉쇄로 유가 상승 압박이 커지자, 피해가 예상되는 국가들에 사실상 공동 부담을 요구한 셈이다. 트럼프는 ‘참여 여부를 기억하겠다’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누가 봐도 합리적이지 않지만 관세 보복과 방위비 인상, 통상 압박 등 미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보복 수단을 감안하면 거절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파병 요청에 직면한 노무현 정부는 2004년 재건과 평화유지를 내세워 비전투 병력인 자이툰부대를 파견했다. 2020년 문재인 정부는 트럼프 1기 당시 호르무즈 호위연합 참여 요구를 받자 청해부대의 작전 구역을 호르무즈까지 넓혀 한국 상선만을 독자 보호하는 절충안을 택했다. 두 결정 모두 동맹과 국익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치열한 외교적 계산의 결과였다. 지금의 호르무즈는 이란의 기뢰가 곳곳에 매설되고 폭탄 드론이 상공을 오가는 더욱 엄중한 상황이다. 우리 정부의 현명한 결정을 기대한다.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