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해저과학기지에서 수중 데이터센터까지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한택희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책임연구원 한국방재학회 부회장

해저 공간 미래 인프라의 플랫폼
세계 각국 극한 공학 경쟁 실험장

R&D 투자와 규제샌드박스 중요
바다 30m 밑 어떻게 활용하느냐
부울경이 표준 선점하면 미래 주도

미국의 해저 연구기지 ‘아쿠아리우스’에서는 연구자들이 통상 10여 일 정도 거주하면서 바다를 오가며 탐사와 실험 과제를 수행한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 제공 미국의 해저 연구기지 ‘아쿠아리우스’에서는 연구자들이 통상 10여 일 정도 거주하면서 바다를 오가며 탐사와 실험 과제를 수행한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 제공

인공지능(AI)이 산업의 언어가 된 지금, 경쟁력은 소프트웨어 알고리즘뿐만이 아니라 ‘컴퓨팅을 놓을 공간’ 또한 중요하다. 육상 데이터센터는 전력과 물, 부지 확보라는 여러 벽에 부딪힌다. 그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이 바다, 더 정확히는 해저 공간이다. 해저 공간은 단순한 “특이한 건축”이 아니라, 압력·부식·격리·응급 대응을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극한 공학의 집합체이자, 해양관측·안보·에너지·디지털을 한곳에 결합하는 인프라 플랫폼이다.

해외는 이미 바다 밑을 실험장으로 삼았다. 미국의 유인 해저기지 ‘아쿠아리우스’는 고립 환경에서의 장기 체류 연구 모델로서 잠수 기술과 우주 환경 연구에 활용되었으며, 일본 시미즈의 ‘오션 스파이럴’은 해저도시 구상을 통해 해저 공간에 대한 기술 축적을 이루어 왔다. 마이크로소프트 ‘프로젝트 나틱’은 스코틀랜드 해역에서 수중 데이터센터를 실증하며 수중 환경의 높은 서버 신뢰성을 확인하였고, 싱가포르 케펠은 해수 냉각을 활용한 플로팅 데이터센터 개념으로 토지·물·에너지 제약을 줄이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의 공통점은 바다를 ‘냉각원’이자 ‘입지’로 활용해 디지털 인프라의 한계를 넘으려는 것이다.

우리도 밑그림이 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은 해양수산부의 연구개발사업인 ‘해저공간 창출 및 활용기술 개발’을 통해 수심 해저에서 장기 체류가 가능한 해저 공간 플랫폼의 설계·시공·운영·유지관리 핵심기술을 개발하고, 테스트베드를 설치하는 실증연구를 수행 중이다. 울산광역시가 1·2단계에 참여해 테스트베드 제공과 사업비 매칭을 맡는 점은 실증-산업화의 연결고리를 강화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수중 데이터센터 단지 기술은 해수를 냉각원으로 활용해 냉각 전력 소비를 줄이고 운영비 구조를 개선한다. 단지화는 모듈의 반복 생산과 확장을 전제로 하므로 투자비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구조물·전력·통신·운영장비 등 연관 산업을 패키지로 묶어 부울경의 조선해양·제조 공급망에 새로운 수요를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사람이 머무는 해저 공간’과 ‘서버가 머무는 해저 공간’을 같은 산업 생태계에서 키우는 전략이다.

부울경이 이 전략의 전진기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다양하다. 울산은 조선해양플랜트 중심 도시로 산업 벨트가 형성돼 테스트베드 구축 시 연관 산업과의 상호 협력이 가능하며, 부산은 항만·물류와 해저케이블, 디지털 인력·대학·연구기관이 밀집해 있으며, 경남은 기자재·기계·부품 산업의 저변이 두텁다. 해저 공간은 해양플랜트·건설·수중로봇·전력·통신·안전·의료·환경을 아우르는 ‘산업의 종합 세트’이기에, 권역 단위의 공급망과 실증 체계가 갖춰질 때 연구는 산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계획의 실현을 위해서는 연구개발을 통해 환경영향 검토, 안전 기준과 인허가, 비상 대응 체계, 장기 내구성 검증이 선행돼야 한다. 테스트베드에서 표준을 만들고, 장기 체류·운영으로 신뢰성을 쌓은 뒤, 수중 데이터센터 단지로 ‘스케일-업/스케일-아웃’하는 로드맵이 필요하다. 이는 기술개발과 규제·표준을 동시에 진전시키는 현실적 경로다.

여기에 정책의 속도가 뒷받침될 필요가 있다. 해저 공간을 위한 안전·환경 기준을 선제적으로 정립하고, 해양 특화 규제샌드박스와 보험·책임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전력망 연계와 해저케이블, 항만 배후 부지의 물류·정비 거점을 함께 설계하면, 연구시설과 산업단지가 분리되지 않는다. 표준을 먼저 쥔 지역이 기자재 시장과 운영 서비스, 수출까지 주도한다.

바다는 이제 관광의 배경이 아니라 미래성장동력과 지역 산업전환을 담는 ‘새로운 국토’가 될 수 있다. 부울경이 먼저 해저 공간 플랫폼의 표준 모델을 만들고 이를 수중 데이터센터·해양에너지·해양관측과 결합한다면, 지역은 제조 중심에서 ‘극한 인프라와 디지털 해양산업’의 중심으로 도약할 것이다. 해수 냉각은 용수 사용과 냉각 전력을 함께 줄여 탄소중립·RE100 요구에도 부합한다. 해상풍력과 연계하면 ‘에너지-데이터’ 해양 클러스터가 열린다. 다음 10년, 바다 아래 30m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부울경의 다음 먹거리를 좌우한다. 부울경이 표준을 선점하면 세계가 따른다, 지금이 기회다. 지금은 초기 투자의 시작이다. “실증-표준-산업화”를 부울경에서 시작하자.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