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의 비극'은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다
벨기에 정신의학과 교수 헤이링언 '자살의 신경과학'
신경과학 지식을 자살 위험 치료법으로 전환할 필요
벨기에 겐트대학교 정신의학과 교수인 저자 케이스 판 헤이링언은 대학병원 재활의학과로부터 한 환자를 만나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발레리는 밝고 영리한 소녀인데 자살을 시도해 두 다리를 잃었다.
소녀는 왜 이런 끔찍한 행동을 했을까? 발레리는 사건 당일 ‘몸이 좋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고, 가까운 친척의 분노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였다. 저자는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은 우울 에피소드(depressive episode)의 증상이라는 점과 그녀의 아버지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뇌 영상 연구를 통해 분노한 얼굴에 대한 반응이 어떻게 자살 행동에 대한 취약성을 구축하는지 설명한다. 또 유전학 연구를 통해 자살이 실제로 가족력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유전자가 어떻게 자살 행동에 취약하게 만들 수 있는지 알려준다.
또 우울증과 자살 행동이 젊은이들에게서 흔하게 나타난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안타까운 사실은 전 세계적으로 젊은이들의 자살 행동 비율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높고,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는 역학 자료가 계속해서 보고된다는 점이다.
게다가 안타까운 점은 발레리의 사례에서처럼 우울 에피소드나 가족력으로 인해 자살 행동의 고위험군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에서도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치료받을 기회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살과 관련해 예방이 불가능하다는 통념도 우리를 더욱 두렵게 만든다. 그러나 일반적 인식과 달리 자살은 예방할 수 있다. 자살은 때때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대한 이해 가능한 반응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단순히 참을 수 없는 스트레스만으로 자살을 설명할 수 없으며, 신경과학은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발생하는지,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자살에 관한 신경과학적 연구 결과를 소개하며, 집단유전학부터 뇌 영상 연구까지 다양한 접근법을 활용한다.
유전적 특성이나 초기의 트라우마 경험이 어떻게 특정한 소인을 형성하고 도화선을 만드는지 강력한 증거들을 내놓는다. 신경과학 연구는 자살 위험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궁극적으로 자살을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지 설명해준다.
신경과학 지식을 자살 위험의 효과적인 치료법으로 전환하는 작업은 자살에 대한 가장 끈질기고 위험한 통념, 즉 자살 위험은 치료할 수 없으며 자살은 예방할 수 없다는 통념을 없애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특히 우울증과 자살 가족력이 결합한 치명적 조합일 경우 정신과 전문의뿐 아니라 학교 교사, 부모, 친구들에게도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OECD 자살율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가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케이스 판 헤이링언 지음/정태연·장민희 옮김/에코리브르/424쪽/3만 2000원.
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