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빛과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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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 소설가

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막막함과 불확실성을 견디며
열린 마음으로 세계를 감각한다는 것

새해의 분위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나는 요즘 ‘어둠’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빛이 사라진 시간에 대해서, 혹은 의도적으로 빛을 제거한 상황에 대해서. 그 생각은 여행 중에 경험했던 체험형 전시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빛을 낼 수 있는 모든 물건들을 입구 사물함에 맡겨둔 채 지팡이 하나에만 의존해 완전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두운 공간 어디라도 미량의 빛은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시간이 지나면 공간의 형태나 사물의 모습이 대략 분간되기 마련인데, 그곳은 내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완벽한 암흑 속이었다. 길을 안내해주는 가이드가 있었지만 그의 설명만 듣고 앞으로 나아가기에는 너무도 막막해서 발걸음이 자꾸 멈칫거렸다. 시각적 정보가 차단되니 시간도 공간도 모두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나에게 익숙했던 빛의 세계가 해체되고 모든 것이 모호해졌다. 그런데 그 상황에 조금씩 적응이 되자 두려움과 막막함이 점차 사라지고 다른 감각이 열리기 시작했다.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가며,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고 손가락 끝으로 만져지는 것들을 기억하고 낯선 사물의 냄새를 맡고 맛을 음미했다. 눈으로 보지 않고도 미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고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도 여행지의 풍경을 충분히 누리고 기억할 수 있음을, 오히려 더 집중하고 깊이 느낄 수 있음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경험했다. 100분 동안의 전시 체험이 끝날 무렵 가이드는 자신이 시각장애인임을 밝혔다. 그러나 그의 장애는 그곳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각 정보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던 내가 오히려 문제였다. 그곳은 빛이 없는 세계였고, 그 세계에서 그는 더 이상 약자가 아니었다. 다양한 감각들을 자유롭게 활용하여 세계를 지각할 줄 아는 유능한 사람이었고, 내가 보지 못하는 것까지 모두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최근에 김숨 작가의 〈무지개 눈〉이라는 연작소설집을 읽다보니, 어둠 속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리고 모든 감각과 온 마음을 다해 대상에 다가갈 때 제대로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좀 더 생각하게 되었다. 〈무지개 눈〉은 시각장애인 다섯 명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소설인데, 선천성 전맹, 후천적 시력 상실, 저시력 장애 등 다양한 상황에 처해 있는 시각장애인들이 세계를 체험하는 방식을 다양한 문학적 형식으로 보여준다. 파도를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만져서 인식하는 사람,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손끝의 감각으로 타인과 관계 맺는 사람, 저시력 장애로 인해 한 번에 한 글자밖에 읽지 못하고 읽는 속도가 무척 더디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문장을 읽을 때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는 사람. 소설을 읽으며, 그들의 삶을 결핍이라 규정한다면 그건 너무나도 편협한 사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부르는 것들과 보편적이라고 믿어온 인식의 체계는 그저 편파적인 하나의 방식이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시각적 이미지와 단편적 정보들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이미지와 정보들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쉽게 판단하고 모든 것을 너무도 빠르게 확신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것처럼 ‘윤리는 확실성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전시장의 암흑 속에서 나는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 모호함과 막막함과 불확실성을 견디며 열린 마음으로 세계를 감각하려는 태도야말로 인간을 윤리적이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에는 어둠 속에서 내가 느꼈던 것들을 자주 생각하며, 내 앞에 펼쳐진 세계를 구석구석 만져보고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여야겠다. 그 무엇도 섣불리 확신하지 않고, 느리게 걷고 천천히 감각하며, 오래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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