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허용된 예술, 관리되는 자유
미술평론가·철학박사
트레이시 에민, 나의 침대, 1998, 부분, ⓒTracey Emin, 비평 및 교육 목적의 인용.
예술은 자유로운가? 짧게 답하자면, 그랬던 적은 거의 없다. 그 대신 예술은 늘 허용되어 왔다. 그리고 허용은 언제나 조건을 동반한다. 칸트 또는 근대 이후 미술은 스스로를 자율적 영역으로 규정해 왔다. 진리 인식과 도덕으로부터, 나아가 정치·종교로부터 독립한 공간. 이 자율성은 예술을 보호하는 방패였지만, 동시에 예술을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만드는 장치이기도 했다. 미술관은 그 장치의 가장 정교한 제도적 형태다. 전시장 안에 들어오는 순간, 작품은 위험한 발화자에서 ‘해석 가능한 대상’으로 바뀐다. 예술은 비판할 수 있지만, 체제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
1990년대 영국에서 등장한 YBAs(영 브리티시 아티스트, Young British Artists)는 이 균형을 노골적으로 흔들었다. 형식의 새로움보다 삶의 노출을 선택했고, 은유 대신 직접성을 택했다. 동물의 사체, 훼손된 신체, 피, 개인의 상처 등 혐오스러운 재료로 이루어진 작품을 직접 전시했다. 이들은 제도 안으로 들어가 미술관뿐 아니라, 시장과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트레이시 에민은 그 결정적 사례 중 하나이다. 우울증, 성 경험, 중독, 자해의 기억을 가공하지 않은 채 드러내는 그녀의 작품은 윤리적 불편함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노출은 고백처럼 보이나, 위로나 치유의 서사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나의 침대’는 이 불편함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녀의 침대가 전시장에 놓이는 순간, 그것은 개인을 넘어 보통의 인간이 겪은 삶의 잔해로 확대된다. 담배, 재떨이, 술, 피임약, 콘돔, 강아지 인형 등 일상용품이 어지럽게 널린 흔적은 개인의 상징이 아니라 어느 정도 고통에 찌든 삶의 증거에 가깝다. 이 장면은 테리 스미스가 말하듯(〈Contemporary Art. World Currents〉), “개별 예술가들의 타인 및 세대, 나아가 세계를 통한 공감 및 교감”, 더 쉽게 말해 “사적인 개인의 삶을 드러냄으로써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21세기 동시대 미술의 한 흐름을 정확히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부터 예술의 자유는 관리되기 시작한다. 제도는 예술을 직접 금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예술이 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지거나,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면 다시 통제의 대상이 된다. 이때 통제는 노골적인 금지가 아니라, 오히려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을 덧붙이며, 교육 프로그램이나 시장의 언어로 감싸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위험해 보이는 작품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 사례’로 설명되고, 급진적인 태도는 ‘한 시대의 스타일’로 정리된다. 예술이 완전히 금지되면 침묵이 된다. 반대로 모든 것이 허용되면 예술은 장식으로 전락한다. 말하자면, 제도는 예술을 허용한다. 그러나 예술은 그 허용의 울타리를 넘어서고자 할 때에만 살아 움직이는 것이며, 전복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