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사람이 온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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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 수필가

새 식구 맞을 준비하느라 분주
사위, 사돈 내외 알게 된 기쁨
까칠하던 딸 바꾼 사랑의 힘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느낌

온다. 오는 것이 많은 계절이다. 이슬이 오고 바람이 오고 짧은 햇살이 긴 그림자를 데리고 온다. 색을 품은 잎사귀도 제 몫의 시간을 다해 땅으로 내려오고 지난 기억도 잠시 마음에 눌러앉는다. 조용히 혹은 격렬하게 밀려오는 운명과 맞닥뜨리기도 하지만, 예고 없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온다. 적막 같은 빈집에 백년손님이 오는 것이다. 어느 시구에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했는데 진짜 놀라운 일이다. 휘몰아치는 감정의 폭풍은 도대체 어디에서 불어오는 것일까. 가족이 한 명 더 생긴다는 것은 모래바람이나 바다 태풍보다도 더 거센 강풍을 동반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바람은 무너뜨리기보다는 무언가를 세우는 바람이다. 인연의 벽돌을 쌓고 신뢰의 기둥을 세우며 가족이라는 이름의 지붕을 덧얹는다.

새 식구가 온다. 연휴가 시작되자마자 새 식구 맞이 준비를 한다. 청탁 원고도 작품집 교정도 강의 준비도 모두 차순으로 밀려났다. 답바지 음식을 들고 첫 방문했을 때는 주문한 생선회로 잠시 대접을 하였지만, 이번에는 직접 음식 준비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시장 가는 걸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호숩다’라는 남도 지방 탯말을 빌려와 지금의 내 감정에 실어도 될까. 오랜만에 재래시장의 인파에 실려 다니는 일이 이렇게도 신명 날 줄이야. 예전 같으면 동네 마트를 한번 휘돌아 몇 가지 먹거리만 준비했지만, 이번에는 나도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진짜 주부가 되었다. 갈비도 사고 강정도 떡국도 더덕도 나물거리까지 넘쳐나도록 산다. 일전에 다쳤던 허리가 뜨끔뜨끔하고 의사 선생님이 무거운 것을 절대 들지 말라던 말이 떠오르는데도 그냥 실실 웃음이 난다.

차에 장거리를 옮겨놓고 다시 마트로 이동한다. 냉장고 속 오래된 반찬통을 바꿔야 하고 실내화도 폭신한 것으로 준비하며 욕실 슬리퍼도 새뜻한 것을 고른다. 거실용 향초를 사고 펌프식 손 비누를 구입하며 달걀도 난각번호를 살펴 가며 담고 생수 역시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 든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반찬 가지 수를 세어보고, 갈비찜과 떡국은 시뮬레이션하여 미리 맛을 가늠한다. 손님께서 보리차를 드신다는 사전 정보를 입수했으므로 햇보리를 덖은 물을 끓이면서 물 간을 맞추느라 몇 번이나 뜨거운 차를 홀깍거리며 마셔본다. 그러는 동안 지긋하던 허리통도 말쑥이 가라앉았다.

쪼꼬맣던 딸아이가 어른이 되고 아들 같은 듬직한 사위가 생겼다. 그 인연을 둘러싼 사돈 내외를 만나고 또 사돈의 가족들과도 연결되었다. 바깥사돈 고향이 무척산 근처라는 것과, 안사돈의 자매들이 유난히 의가 좋아 주말마다 백수 노모 댁에 모인다는 사실과, 바이올린을 켜는 ‘시우’라는 아홉 살 예쁜 꼬마 아가씨가 내 사위의 조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사위가 온다. 까칠하던 딸을 단박에 야들하게 만든 그 신비한 남자가 오는 것이다. 서른 몇 해 동안 설거지 한 번 하지 않았고 세탁기 근처에도 가지 않던 딸이었다. 그뿐인가. 요리 젬병 아가씨가 애호박전도 부치고 고등어도 굽고 소고기뭇국도 끓이며 ‘지옥에 빠진 계란’의 뜻을 가진 ‘에그인헬’이라는 중동 요리까지 만든다. 이 불가사의한 힘은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 인간의 가능성은 뜻밖에도 사랑이라는 자극 앞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이 온다는 건,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일이다. 그의 말과 그의 웃음과 그의 시간이 함께 오는 일이다. 그리하여 삶이란 오는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연습이라는 것을 배워간다. 그 연습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조금씩 더 다정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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