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그런 일이 있었다
김대현 연세대학교 글로벌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2024년 12·3비상계엄 직후, 부산을 포함한 전국에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비상행동이 주최한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가 이듬해 4월까지 매주 개최되었다. 사람들은 특히 12월 말과 1월 초 서울 남태령과 한강진의 밤샘 집회를 오래 기억했다. 자신의 여러 취약한 정체성을 스스로 밝히는 인사가 ‘남태령식 자기 소개’로 회자되었고, 그 중 하나의 정체성을 사람들이 비하하거나 혐오할 때 반드시 주변의 만류와 조직 차원의 사과와 재발 방지가 이행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낯선 서로를 식별하고 배우겠다고 약속하고, 서로를 모르던 사이로 돌아가지 말 것을 다짐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그 때의 기억을 그곳 바깥의 지역으로 퍼다 날랐다.
전봉준투쟁단이 서울까지 끌고 온 트랙터는 평소 농민들이 금지옥엽처럼 아끼는 억 단위의 농기구였다. 응원봉을 든 여성과 성소수자는 제 손에 든 것이 소중한 만큼 저걸 여기까지 끌고 온 트랙터가 농민에게 소중한 것을 알아보았다. 응원봉을 든 팬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에 누가 될까 바깥에서 함부로 처신하지 않았고, 트랙터를 모는 농민들은 새 손님 앞에서 막걸리를 먹고 욕을 하지 않았다. 그곳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젠더노소’로 바꾸어 불렀고, 비장애인과 성다수자로 자신을 소개했고, 성소수자로서 그간 내 의제에만 집중했음을 부끄러워했다.
지난날 경찰에게 ‘노동자도 아닌데 왜 때리느냐’고 강변하던 광장과 달리, 그 해의 광장은 ‘민주노총이 길을 열겠다’는 말이 연호되었다. 젊은 층으로부터 이런 환대를 받는 것이 처음이라던 노조원들에게, 그곳의 여성들은 그동안 어떤 싸움을 해오셨던 거냐고 화답했다. 그곳에는 계엄 이전에도 일상이 계엄과 같던 이들이 모였다. 계엄이 성공했다면 자신이 죽었을 수도 있음을 희미하게 예감한 이들은, 포고령에 의거 처단될 뻔한 의료인을 위로하고, 전역 직전 계엄군에 편제돼 사람을 죽일 뻔한 20대 남성의 말을 듣고, 탄핵 촉구 집회 기간 중 자살한 성소수자 동료를 애도하고, 지난 수십 년 간 헌법이 자기 앞에 멈춘 것 같았다는 이주노동자의 말을 경청하고, 공학 전환에 맞서 싸우는 동덕여대생과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을 그동안 차마 말하지 못한 여성을 응원했다.
그들 중 몇몇은 자신이 선 자리가 역사에 남을 것을 예감했고, 다른 몇몇은 자신이 결국 잊힐 것을 예감했다. 그곳에서 하나하나 불린 소수자 정체성은, 그 하나하나의 자리가 곧이 사회의 마지막 자리로 내몰릴 수 있음을 알면서도, 혹은 그를 알기에 힘주어 낱낱이 짚어 부르는 이름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저마다 소중한 것을 폄하당하지 않은 채 함께 웃었고, 하여 그들은 세상이 얼른 좋아지진 않아도 그 때만큼은 서로 외롭지 않다고 느꼈다. 그 때에 그런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