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한때 뜨거웠던 기억
김정화 수필가
푸른 트럭이 굽은 오르막을 달린다. 용달차 한쪽에 상호도 없이 휴대전화 번호만 큼직하게 적혀 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기우뚱거리는 삼륜차는 아니지만 시커먼 숯검정을 묻힌 낡은 트럭이 낯설지 않다.
아직도 연탄을 때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다. 산자락 철거민 동네에서 한파를 견디는 노인들과 비싼 기름값을 감당 못 해 다시 연탄보일러를 놓았다는 독거 어르신의 슬픈 소식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수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동네에 부산 유일의 연탄 공장이 가동되고 있었다. 그곳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어느 방송국의 극한 직업 세계에도 소개되었지만, 경영난에 결국 폐업 절차를 밟고 말았다. 이제 전국의 연탄 공장도 몇 개 남지 않았다고 하니 아마 다음 세대들에게 연탄 같은 것은 옛이야기와 박물관에서나 만날 수 있겠다.
연탄 싣고 오르막 달리는 트럭
연탄이 필수재였던 시절 떠올라
자신을 태워 온기 나누는 연탄
목숨 걸고 하면 실패 두렵지 않아
저 트럭은 어디서 연탄을 싣고 오는 것일까. 트럭에 적힌 번호로 연락을 해보니 뜻밖에도 인근 화훼단지 옆에 연탄 하치장이 있단다. 고물상 한 귀퉁이 땅에 비닐을 덮은 연탄 상자들이 즐빗이 늘어섰다. 배달용 연탄을 옮기는 남자의 손등에 숯검정이 범벅이다. 오전에 한바탕 출고 작업을 했다는 표시다. 번듯한 창고를 얻기에는 타산이 맞지 않으니 임대료가 싼 야적장에 부려놓을 수밖에.
연탄의 시절이 있었다. 들판 깡시골 부엌에도 검정 구멍탄 위로 검붉은 불길이 솟구쳤다. 아궁이 속으로 추수가 끝난 짚 더미나 말린 북데기와 삭정이 같은 것을 때서 밥을 짓는 것이 아니었다. 매운 불꽃 앞에서 불쏘시개를 계속 밀어 넣지 않아도 되는 연탄불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 알싸한 불향이 밴 하얀 쌀밥과 벌겋게 달궈진 석쇠에 노릇하게 구워진 갈치구이 맛을 잊지 못한다.
연탄값이야 들었겠지만, 창고나 부엌 귀퉁이나 재래식 화장실 한쪽에 컴컴한 검은 성을 쌓아 올린 어른들은 포만감에 든든했고, 산으로 들로 겨울 땔감을 구해와야 했던 아이들도 걱정을 덜게 되었다. 무쇠 연탄 덮개와 커다란 고무 물통을 호수로 연결하면 물이 따뜻해졌으니 쇠죽솥에 물을 데우는 번거로움도 줄게 되었다. 그러나 누구네 집 아무개가 연탄가스를 마셔 쓰러졌다는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오금이 저리도록 아찔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타버린 연탄재는 길 웅덩이나 얼음 언 마당에 던져 미끄럼을 막았는데, 개구진 사내아이들은 눈 뭉치를 던지듯 연탄재 싸움을 하며 놀이를 대신했다. 어느 시인은 ‘소신공양한 부처 몇 분이 골목 어귀에 나앉아 있다’라고 했으니 물상을 읽는 힘이 놀랍기만 하다. 온몸을 깡그리 태우는 일, 그렇게 소신공양한다면 불(佛)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한때 뜨거웠던, 심장에 피돌기를 일으키던 그 무엇을 기억한다. 뜨거워질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는가를 세월이 지나고서야 깨닫는다. 광부들의 목숨이 담겨 있는 연탄 한 장으로 냉골이 데워지고, 괄하게 불을 지핀 장작이 언 손을 녹이듯, 내가 뜨거워지지 않고서는 온기를 나눌 수가 없다. 하루해가 불덩이를 안고 스러져야 별들도 빛을 내고, 겨울나무가 혹한의 계절을 껴안아야 화르르 봄꽃을 피워올릴 것이며,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오체투지의 글쓰기가 걸작을 길어 올릴 수 있다. 자신을 데운다는 것, 그리고 뜨거워진다는 것, 마침내 태워버린다는 것은 희생과 열정이 있어야 가능한 일. 목숨 걸고 해보리라는 집념을 가지면 실패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어기적거리는 일이 있다면 매운 연기만 내지 말고 결단과 용기의 불꽃을 댕겨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