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쓰러지는 일… ‘불안’이 오히려 살아가는 힘을 주는 것 같아요”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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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점환 개인전, 14일까지 아리안갤러리
“당신은 누구십니까”로 존재에 대한 질문
인간 사회 위선 드러내면서 깊은 연민도

심점환 작가. 김은영 기자 key66@ 심점환 작가. 김은영 기자 key66@
심점환, 당신은 누구십니까, 2025. 아리안갤러리 제공 심점환, 당신은 누구십니까, 2025. 아리안갤러리 제공

“산다는 것은 쓰러지는 일이기도 해요. 불안은 우리에게, 자신의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게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을 기대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거든요.”

지난달 28일부터 부산 해운대구 아리안갤러리(달맞이길 117번가길 175, 304호)에서 열리고 있는 부산의 중견작가 심점환(64) 개인전 ‘당신은 누구십니까’에 걸린 메인 작품을 보면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오래된 영화 제목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가 떠올랐다. 파스빈더 영화는, 나이와 국경을 초월한 사랑과 전후 독일 사회에 내재한 파시즘의 잔재를 비판하지만, 심점환의 불안은 그것과는 또 다르다.

“작가로서 내 인생은 과연 성공적인가, 이렇게 살면 되는 건가 하는 의심이나 회의가 계속 들어요. 머리 대신에 그린 꽃은 나의 허위의식이나 욕망 같기도 하고, 두 눈을 감은 머리는 일단 의식을 내려놓자 싶어서 그린 겁니다. 사실 의식은 내려놓으면 안 되는 거죠. 창밖 풍경은 항상 내 마음속에 있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작가의 작업실인 듯한 의자에 앉아 있는 한 남자는 목 잘린 머리를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원래 머리가 있어야 하는 자리는 꽃다발이 차지했다. 꽃은 아름답지만,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보니 왠지 불안하다. 작업실 창밖으로 보이는 들판은 작가의 이상향처럼 비치기도 하는데, 무수한 별처럼 퍼져 있는 작은 들꽃 너머 언덕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소나무가 보인다.

작가는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그림 앞에 선 우리에게 돌아오는 질문이기도 하다. 아리안갤러리 최정경 대표는 “세상과 나 사이의 경계 위에서 우리는 결국 서로의 그림자를 마주하게 된다”며 “그곳에서 시작되는 침묵의 대화가 바로 심점환 회화가 지닌 힘이며 이번 전시의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최 대표는 또 “이번 전시는 작가의 과거 작업 흐름을 잇는 동시에 더 응축되고, 서정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시각으로 재해석된다”고 덧붙였다. 즉, 심점환에게 회화란, 고정된 진실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보는 존재’의 불안정한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이다.

심점환, 소풍-몽유관수(夢遊灌水), 2023. 아리안갤러리 제공 심점환, 소풍-몽유관수(夢遊灌水), 2023. 아리안갤러리 제공
심점환, 격류-소풍, 2025. 아리안갤러리 제공 심점환, 격류-소풍, 2025. 아리안갤러리 제공

다른 작품 ‘소풍-격류’는 전통적 회화 구도인 관폭도(觀瀑圖·폭포수를 완상하는 장면을 그린 산수인물화) 혹은 관수도(觀水圖) 구조를 빌리지만, 자연의 숭고함 대신 냉소와 아이러니를 담는다. 풍경 속에 등장하는 ‘소풍 나온 돼지 가족’은 인간 사회의 위선과 무기력함을 품고 있다.

그의 시선은 풍자와 조소에만 머물지 않는다. 처가 식구를 향한 애틋함과 고단하고 가난한 삶 속에서 죽음과 맞서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도 보인다. 처가 식구들과 함께한 호주 여행 그림 뒤로 펼쳐지는 사막 풍경은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세상 혹은 역경일 수 있다. “사이가 안 좋을 때는 남보다 못한 게 가족이지만, 외롭고 힘들 때 세상 누구보다 의지할 수 있는 상대가 가족”이라는 말로 가족의 소중함을 고백했다.

심점환, 생의 감각2, 2025. 아리안갤러리 제공 심점환, 생의 감각2, 2025. 아리안갤러리 제공
심점환 ‘잠든 자와 깨어 있는 자’(2021, 왼쪽)와 ‘밀물’(2025). 김은영 기자 key66@ 심점환 ‘잠든 자와 깨어 있는 자’(2021, 왼쪽)와 ‘밀물’(2025). 김은영 기자 key66@

남천 나무의 새빨간 열매 속 수많은 얼굴은 춥고 가난할 때의 경험을 떠올려 그린 그림이다. “추위에 떨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순간에 정신이 얼마나 맑아지는지 알 수 있다”고 귀띔했다. 병원 풍경은 ‘살아 있음’의 고통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는 습관처럼 사진을 찍을 때가 많고, 그것을 그대로 혹은 변형해 캔버스로 옮긴다. 이러한 시선은 단순한 사회적 관찰이 아니라,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존재론적 질문에 맥락이 닿아 있다.

심점환, 바람부는 벌판, 2025. 벽지 뒷면에 구아슈로 그린 작품이다. 아리안갤러리 제공 심점환, 바람부는 벌판, 2025. 벽지 뒷면에 구아슈로 그린 작품이다. 아리안갤러리 제공

이번 전시에선 특이하게 캔버스 대신 롤 벽지 뒷면을 이용해 그린 그림도 있다. 의외로 밀도가 좋아 보여서 벽지를 사용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물었더니 “올 초 집안 실내 공사 후에 남은 것인데, 질기고 좋더라고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첫 느낌이 좋아서 앞으로 더 도전해 볼 생각이란다. 벽지 그림은 처음 도전한 구아슈(gouache)로 작업했다. “이게 또 색다른 느낌이었어요. 수채물감과 유화물감 중간 성격이 아크릴이고, 아크릴하고 수채물감 중간이 구아슈거든요. 아크릴을 종이에 바르면 그림이 거칠게 나와요. 물감도 빨리 마르고요. 결국 아크릴은 젯소 칠한 바탕 위에 캔버스를 사용하는 게 편하고, 구아슈는 종이가 낫더라고요.”

심점환, 겨울 숲에 대하여, 2025. 아리안갤러리 제공 심점환, 겨울 숲에 대하여, 2025. 아리안갤러리 제공

대부분 신작이지만, 이번 작품과 함께 걸면 좋겠다 싶은 이전 작품까지 2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피에로’ 작업과 ‘메모리 박스’ 등이다. 부산 형상미술의 세례를 받은 심점환은 부산을 기반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부산, 서울 등 12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2003 ‘오늘의 작가상’ 본상을 수상(부산미술협회 주관)했다. 부산문화재단의 다년, 집중 지원 사업인 2025년도 ‘올해의 포커스온’ 시각예술 작가 3인에도 포함됐다. 전시는 11월 14일까지 열린다. 관람 시간 낮 12시~오후 7시(일·월요일과 공휴일 휴관).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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