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황남빵 외교
외교 무대에서 음식은 때로 언어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곤 한다. 말은 얼마든지 계산될 수 있지만, 음식은 마음을 움직인다. 그중에서도 빵은 보편성과 따뜻함을 지닌 매개로서 국가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효과가 크다.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빵은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해왔다. 함께 빵을 나눈다는 행위는 종종 신뢰를 나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빵은 경계를 부드럽게 녹이고, 갈등의 자리에서도 손을 내밀게 만드는 묘한 힘을 지닌다.
그래서일까. 세계 곳곳에서는 빵으로 마음을 풀고 관계를 다진 외교 장면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나라가 프랑스다. 빵의 나라답게 프랑스는 정상회의 만찬에 자국산 빵을 곁들이며 자국의 미식 문화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2015년 한·프랑스 정상 만찬에서는 프랑스식 브리오슈 안에 한국식 팥소와 크림을 채운 ‘코팡’이 후식으로 올라 화제를 모았다.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외국의 귀빈을 맞이할 때 종종 ‘빵과 소금’을 내놓는 전통이 있다. 이는 화해와 믿음, 신뢰를 상징하는 가장 따뜻한 환영의 제스처로 여겨진다. 이처럼 빵을 매개로 한 외교는 부드럽지만 강력한 문화의 언어로, 음식의 보편성과 따뜻함을 통해 한 나라의 이미지를 오래도록 각인시킨다.
최근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는 이른바 ‘황남빵 외교’가 화제를 모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선물한 경주의 명물인 황남빵이 그 주인공이다. 따뜻한 빵을 한식 보자기에 곱게 싸서 “경주의 맛을 즐기시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했고, 다음 날에는 중국 대표단을 비롯해 APEC 회원국 전원에게도 이 빵이 전달됐다. 경주의 소박한 단팥빵이 세계 정상들의 손에 들린 셈이다. 황남빵은 경주의 전통과 한국의 정을 품은 작은 문화사절로서 세계 정상들에게 따뜻한 한국의 이미지를 남겼다.
외교는 결국 사람의 일이다. 메시지의 온도와 제스처의 섬세함이 관계의 방향을 결정한다. 한 나라의 힘은 단순히 무기나 경제력으로만 평가되지 않는다. 세계가 기억하는 것은 ‘그 나라가 어떤 온도로 다가왔는가’이다. 그런 점에서 외교는 빵을 굽는 일과도 닮았다. 불이 너무 세면 겉만 타고 너무 약하면 속이 익지 않는다. 정성과 온도를 적절히 맞춰야 비로소 고소한 향이 퍼진다. 경주에서 막 구워진 황남빵처럼 한국의 따뜻하고 진심 어린 외교가 세계 각국 정상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기를 바란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