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이 소멸해야 나라가 산다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이재명 정부의 첫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전재수 의원이 취임하고 공식적인 취임 절차를 마친 7월 말께. 전 장관의 취임사를 접한 부산의 한 시인이 전 장관에게 따끔한 충고를 한마디 하고 나섰다. 전 장관은 당시 취임사에 해수부가 부산으로 ‘내려간다’는 표현을 몇 번이나 반복한 바 있다. 언어가 곧 세계관을 반영한다고 생각한 시인은 앞으로는 절대로 부산으로 내려간다거나 서울로 올라간다는 식의 표현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일침을 가했다.
이 에피소드는 이후 전 장관이 시인에게 직접 연락해 앞으로는 ‘해수부가 부산으로 이전한다’는 표현으로 통일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하지만 해프닝 같아 보이는 이 에피소드에는 시인의 생각처럼 오랫동안 굳어 금강석처럼 단단해진 우리 사회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박혀 있다. 바로 철저한 중앙 중심적 사고다.
서울도 사실은 행정구역상 지방이다. 중앙과 지방이 엇갈리는 공간이 된 서울엔 중앙지방법원이라는 희한한 명칭의 법원이 있다.
■지방, 그 공고함
한국인들이 중국을 비판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지나친 중국 중심 사고다. 나라 이름부터 가운데 중(中)을 쓸 정도로 세상의 중심이 자신들이라 여김으로써 여타 국가들을 변방이라 치부한다는 것이다. 그런 한국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도 지나친 서울 중심 사고에 젖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서울을 중앙으로 인식하고 서울 이외의 지역은 모두 지방이라는 명칭으로 불러왔다. 최근 들어 서울과 경기도 권역을 묶어 수도권이라 부르며 수도권 밖 지역을 지방이라 여기는 정도의 변화만 있었을 뿐이다.
‘지방(地方)’이라는 용어는 한자어로서 ‘어떤 방향의 땅’ 정도로 풀이할 수 있으며 특정 공간 영역을 의미할 뿐이다. 이것이 서울 이외의 지역을 일컫기 시작한 것은 전국을 팔도의 행정구역으로 나누며 구분하던 고려시대부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서울 밖 방향의 땅을 일컫던 용어는 점차 중앙을 의미하는 서울에 비해 위계상 아래 혹은 주변적 의미를 지닌 용어로 변질돼 간다. 용어의 변질은 ‘서울 영전, 지방 좌천’ 등의 뜻으로 불리며 더 공고하게 가속화했다. 지방으로 가는 것을 주변으로 쫓겨나는 것쯤으로 여기는 인식이 공고해진 사회에서 지방의 인구유출이 일어나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2016년 2월 전국시도지사협의회는 서울 종로구 나인트리컨벤션에서 총회를 열고 행정기관 이름에서 '지방'을 없애자고 결의했다. 서울신문 제공
■지역이면 어떤가
이 같은 현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뜻 있는 ‘지방인’들은 일단 이 ‘지방’이라는 용어부터 뜯어고치자고 팔을 걷고 나섰다. 2016년엔 전국의 시장·도지사들이 모여 국회 총선 공약으로 현행 특별지방행정기관에 사용하는 ‘지방’ 명칭의 삭제를 포함시켜 달라고 목소리를 높인 바 있다. 부산지방경찰청은 부산경찰청이라 부르고 부산지방노동청도 부산노동청으로 부르자는 것이다. 이후 일부 반영이 되긴 했지만 아직도 지방이라는 명칭은 곳곳에서 부지기수로 발견된다. 지방의회, 지방자치단체, 지방공무원, 지방세, 지방공기업 등등….
지방은 사실 서울을 포함하는 명칭이다. 지방선거 실시 지역에 서울이 포함되는 사실만 미뤄 보더라도 서울은 분명히 행정구역상으로 지방의 한 단위다. 그럼에도 서울은 마치 지방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건 ‘지방’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오용돼 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지방이라는 표현 대신에 ‘지역’이라는 표현을 쓰자는 주장도 한다. 지방이라는 표현을 일거에 없애지 못한다면 대안으로 지역으로 바꿔도 무방할 듯하다.
김태호 전 경남도지사 시절 집무실에 걸려 있던 한반도 지도. 아래위가 전복된 이 지도를 보면 상경의 의미가 달리 보인다.
■세계관의 전복
사실 서울에 간다고 할 때 상경(上京)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방위상으로 서울이 대부분의 지역보다 북쪽에 있기에 그렇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방위상 북쪽을 위로 보는 개념이 왕조시대 세계관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동양 철학에서 북쪽은 천자나 왕의 자리가 있는 방향이다(북한 쪽에서 보면 임금이 살고 있는 곳이 더 높은 곳이기에 서울이 남쪽에 있음에도 곧 북쪽이라 여겼을 터이다). 좌청룡 우백호를 얘기할 때 좌가 동쪽, 우가 서쪽인 것도 왕의 자리인 북쪽에서 남쪽을 내려다 봤을 때라야 이해가 가능한 이유다. 이 때문에 아예 방위 자체를 뒤집는 사고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박근혜 정부 시절 해양수산부에 내걸었던 거꾸로 된 세계지도다. 최근에는 한국해양재단이 서울 도시철도 광화문역에 거꾸로 된 세계지도를 내걸어 놓기도 했다. 김태호 전 경남도지사도 도지사 근무 시절 집무실에 거꾸로 된 한반도 지도를 걸어놓고 ‘생각을 달리하면 미래가 보인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강조한 적도 있었다. 기존 메르카토르 도법 지도의 위아래를 바꾼 이 지도들을 보노라면 서울로 가는 것을 상경이라 하는 것이 왜 왕조시대 세계관인지를 금세 깨닫게 된다.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은 한국인의 DNA에 새겨져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공고하다. 헌법재판소가 2004년 신행정수도법 위헌 확인 결정에서 ‘관습헌법’이라는 해괴한 개념을 들이대며 한국의 수도는 헌법에 명시돼 있지 않아도 관습적으로 서울이었기에 변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을 정도이니 그 공고함은 비길 데가 없다. 하지만 수도권 과밀화와 비수도권 소멸화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는 지금, 그 세계관은 어떤 식으로든 극복해야만 한다. 그 시작은 가장 손쉽게 실현할 수 있는 ‘지방’이라는 용어의 소멸에서부터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