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불타는 대지의 숭고-안젤름 키퍼와 기후위기 시대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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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름 키퍼, '믿음, 소망, 사랑', 1984~1986. 뉴사우스웨일즈 미술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CC0 1.0 유니버설 퍼블릭 도메인 헌정. 안젤름 키퍼, '믿음, 소망, 사랑', 1984~1986. 뉴사우스웨일즈 미술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CC0 1.0 유니버설 퍼블릭 도메인 헌정.

9월 중순, 폭염의 끝자락에서 올해 대한민국을 집어삼킨 산불 산태를 떠올린다. 전 세계적으로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대규모 산불과 홍수, 녹아내리는 빙하와 사라지는 섬들의 뉴스는 기후위기가 우리 삶 한가운데 들어와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기후위기는 인류가 통제할 수 없는 압도적인 자연의 힘을 드러낸다. 이는 고전적 ‘숭고’에서 언급되던 ‘자연의 위력’이 인류세(Anthropocene)에서 다시 현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포착할 수 있는 ‘숭고’는 단순한 자연의 힘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초래한 파국이라는 점에서 비극적이고 자기모순적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이러한 시대적 위기 앞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에 대한 하나의 응답으로 ‘숭고’라는 미학적 개념과 현대 미술가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를 함께 떠올려볼 수 있다. 키퍼는 주로 전쟁과 역사, 신화를 주제로 삼고, 환경과 생태의 메시지를 직접 표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작업이 보여주는 파국과 압도, 폐허와 재생의 이미지는 오늘날 기후위기와 공명한다.

키퍼는 1945년 전후 독일에서 태어나, 전쟁의 폐허와 나치의 역사적 트라우마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대형 캔버스에서 납, 흙, 재, 짚 등 ‘불에 그을리고 파괴된 재료들’을 사용해, 낡은 건축 잔해, 황폐한 대지와 불타는 숲과 같은 풍경을 그려 왔다. ‘마르가레테’와 ‘슐라미트’ 같은 작품에서 그는 나치 시대의 기억을 불타버린 역사적 폐허로 재현했으며, 이후에도 ‘폐허의 미학’을 끊임없이 탐구했다. 키퍼는 독일 역사와 집단적 죄의식을 탐구하면서, 문명이 초래한 파국을 시각화한다. 그의 그림에서 우리는 불길이 휩쓸고 간 잿더미 같은 풍경 속에서 인간 문명의 어두운 얼굴을 목격한다. 그런데 이러한 맥락은 인류가 초래한 기후위기의 풍경과 겹쳐진다. 캘리포니아와 그리스, 캐나다, 한국 등에서 산불로 불타버린 숲, 해수면 상승으로 잠겨가는 해안 도시, 쓰나미가 집어삼킨 마을의 잔해 등은 모두 키퍼의 화면과 기묘하게 닮아 있다. 기후위기의 ‘숭고’는 더 이상 인간을 초월한 자연의 힘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키퍼의 캔버스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파괴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동시에, 윤리적·실천적 응답을 촉구하는 ‘숭고’로 읽을 수 있다.

9월의 하늘 아래, 우리는 키퍼의 그림을 통해 ‘불타는 대지의 숭고’를 본다. 그것은 단순한 경외나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가 미래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각성하게 만드는 강렬한 감정이다. 기후위기 앞에서 ‘숭고’는 더 이상 관조의 미학이 아니라, 실천의 미학이 된다. 키퍼의 그림은 묻고 있다. “이 폐허 위에서 우리는 어떤 미래를 세울 것인가?”

미술평론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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