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시베리아 작은 마을의 향토사박물관
이재혁 (사)유라시아교육원 이사장 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
인구 6000명 부랴티야 바르구진
모녀 운영 학교 부설 시설 방문
선사 유적·광물 등 콘텐츠 다채
시골 마을 역사 타임캡슐 보는 듯
데카브리스트 이곳에 야학 열기도
무덤 보며 ‘높은 생각’ 의미 되새겨
지난달 하순 몽골과 동시베리아 바이칼 지방을 열흘간 여행하고 돌아왔다. 투르카 항에서 샤머니즘의 알혼섬까지 왕복 7시간을 멀미에 시달리며 바이칼 호수의 혼이라는 샤먼 바위와 13개의 세르게(성스러운 솟대)를 찾아간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제일 큰 충격은 부랴티야 자치공화국 바르구진 마을의 작은 향토사박물관이었다. 전제정치와 농노제를 깨고 입헌군주제와 공화제로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한 최초의 ‘운동권’ 지식인들인 데카브리스트. 쇠고랑을 차고 1826년에 시베리아로 111명이나 유배를 왔다. 이 마을에서 활동한 데카브리스트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을까 싶어 간 것이었는데, 감동은 다른 데서 왔다. 꽉 찬 전시물, 작은 박물관의 종합적 역할, 운영자의 열정이 두루 놀라웠다.
바르구진은 한때는 광산으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6000명의 주민이 사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수학과 정보학을 가르쳤다는 할머니 교사가 관장이고, 역사 선생이라는 딸이 운영실장을 맡아서 일하고 있다. 박물관은 동네 유일의 슈콜라(11학년 제 초중고) 부설로 마을 입구에 허름하게 서 있었다. 삐걱거리는 전시홀은 크게 3개인데, 안은 콘텐츠로 넘치고 있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마을에서 발견된 매머드의 이빨과 턱뼈, 마을 사냥꾼들이 남긴 총, 아이들이 만든 옛 코사크 성채와 마을교회 미니어처, 마을의 각종 생활 도구, 학교 깃발, 군(郡)과 마을의 문장(紋章), 데카브리스트 큐헬베케르 형제가 이 마을에서 야학을 연 증거, 그들이 조사한 광물 표본, 마을 유대인의 역사, 1848년 이 마을에 유배 온 헝가리 대시인 샨도르 페테피의 흔적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1904~1905년 러일전쟁 때 만주 심양 근처의 전투에서 이곳 출신의 참전 군인이 전리품으로 획득한 일본도 한 자루도 한쪽에 있고, 볼셰비키 혁명에 가담했던 이 마을 청년들의 유품과 사진, 1941~1945년 독소 전에 참전했던 이 학교 출신 청년들의 학교 졸업 앨범도 가지런하다. 학교 뒤의 목공소에선 사라진 옛집과 옛 목조 교회 등을 학생들이 작은 건축물로 복원하고, 마을 주민들도 마을의 역사와 주민 생활상을 보여주는 물건이라면 뭐든지 여기에 아낌없이 기증해왔다고 한다. 작고 낡았으나 내실로 충만한 이 작은 박물관은 외지인에겐 1648년부터 시작된 400년 가까운 마을의 역사를 타임캡슐처럼 한눈에 보여주는 귀한 문화시설이다. 학생들에겐 살아있는 역사교육, 생활교육, 체험교육의 현장이다. 주민들에게는 보존하고 싶은 모든 기억의 보물 창고다.
겉으론 평온한 것 같아도 여기에도 우크라이나 전쟁의 상흔이 깊게 패 있었다. 할머니 관장이 느닷없이 젊은이들 사진 한 장을 가리키며 이 마을 출신으로 우크라이나전에서 전사한 청년들이라고 했다. 그 가운데에는 자기 손자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저만치 저기 어두운 구석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는 운영실장의 아들이 이 사진 속의 청년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할머니와 딸은 스스로 자신들에게 부과한 과업으로 개인적 불행을 억지로 덮으며 매일매일을 버티는 듯 보였다. 나는 울음을 참으며 조용히 한쪽 팔로 할머니를 안아드리고, 방명록에 몇 줄을 남긴 뒤에 박물관 문을 나섰다. 문화력은 요란한 소음 속에만, 큰 규모로 지은 국립박물관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진정한 문화의 힘은 조용한 조직력, 포기하지 않는 진정성, 대를 잇는 열정, 실력을 갖춘 작은 동네 박물관에 있을지 모른다. 거대한 서사와 지배계급에 초점을 맞춘 역사가 아닌 나와 우리의 작은 생활사, 미시사의 중요성을 마을을 산책하며 다시 느낀다. 아울러 내가 사는 부산 기장군 정관에도 지역사회의 향토사와 얽힌 이런 학교 박물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밖에는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르구진 마을에서 27년간이나 살면서 사면이 되어도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지 않은 데카브리스트 미하일 큐헬베케르(1798~1859)의 무덤은 마을 공동묘지 뒤편에 있었다. 귀족으로서의 화려했던 삶을 버리고 그는 이 벽촌에서 읽기, 쓰기, 산수를 사람들에게 무료로 가르치고 가난한 이를 위해 새로운 농작물 실험을 했다. 약국과 병원을 자기 집에 열었고, 인근 지역의 광물자원과 지리를 연구했다. 그의 무덤 앞에서 작은 박물관의 전시물 하나하나를 머릿속으로 다시 만지며, 데카브리스트들에 바친 러시아 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의 시 ‘깊은 시베리아의 막장에서’를 중얼거려본다. ‘깊은 시베리아의 저 깊은 막장에/ 콧대 높은 인내를 보관하게나/당신들의 비통한 노동은/ 달음질치는 저 높은 생각과 함께 /절대로 사라지지 않으리…!’ 비가 조심조심 걷히기 시작하더니, 멀리 하늘 한쪽에서 시베리아를 데울 해님이 고개를 내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