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개와 늑대의 시간, 한국 외교의 성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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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화 동서대 캠퍼스아시아학과 교수

중국 전승절 등 통해 북중러 연대 과시
미국 주도 국제질서에 도전장 던져
미중 경쟁 속 한국 외교 시험대 맞아

관세와 안보, 여전히 풀리지 않은 과제
미 일방주의·북 핵전략 관리가 핵심
불확실성 속 실용·원칙 조율 성패 갈라

지난주 중국은 국제사회에 ‘대국굴기’를 과시하는 두 장면을 연출했다. 그 첫 번째가 9월 1일 톈진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였다. 2001년 출범한 이 협력체는 유라시아 최대 규모의 정치·경제·안보 플랫폼으로 이번 회의에는 20여 개국 정상과 10개 국제기구 수장이 참석해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시진핑 주석은 이 자리에서 “냉전적 사고방식과 패권주의, 보호무역주의의 그림자가 여전히 남아 있다”며 “보다 정의롭고 합리적인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를 구축하자”고 강조했다. 회의는 유엔과 국제기구 중심의 다자주의를 지지하는 공동선언을 채택했고, 중국 주도의 제도적·경제적 협력 기반을 한층 강화했다. 특히 미국의 고율 관세(50%)로 갈등을 겪다 7년 만에 회의에 복귀한 인도의 모디 총리를 향해 시 주석은 “용과 코끼리가 함께 춤춘다”는 표현으로 협력을 당부했다. 미국이 지난 20여 년간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축으로 삼아온 인도가 이번에는 중국 쪽에 발맞추는 듯한 행보를 보인 것이다.

이어 9월 3일에는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시진핑 주석은 “인류는 다시 한번 평화냐 전쟁이냐, 상생이냐 제로섬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며 반패권주의 메시지를 발신했다. 열병식에서는 중국이 처음으로 육·해·공 전력을 통해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전략적 핵 3축 체계’를 공개했다. 그러나 세계의 시선을 가장 끈 장면은 시 주석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함께 망루에 선 모습이었다. 1959년 이후 66년 만에 재현된 이 장면은 북중러가 이해관계를 넘어 전략적 연대를 공식화했음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김정은의 북한이 강대국 외교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름의 생존 방식을 확보했음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렇듯 중국은 SCO 정상회의와 전승절 기념식을 통해 경제적·군사적 연대와 위상을 과시하며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새로운 규칙을 세우겠다고 정면 도전했다. 그러나 국제사회, 특히 유럽과 동아시아의 선진국들은 미국의 리더십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여전히 중국을 그 대안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이 공들였던 푸틴과 김정은이 중국 쪽에 손을 맞잡는 모습에 적잖은 실망을 느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그로 인한 서방 내부의 균열이 시진핑의 ‘대국굴기’를 오히려 가속화하며 국제사회를 더 큰 불확실성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지난 8월 말 이재명 대통령은 일본과 미국을 잇달아 방문했다. 역대 대통령들이 외교·안보의 중심축인 미국을 먼저 찾던 관례를 깨고 일본을 먼저 찾은 것은 일본과의 관계를 공고히 해 이를 미국과의 협력 강화에 지렛대로 삼으려는 실용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어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친밀도를 높이고 신뢰를 구축했다. 동시에 3500억 달러(약 487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고 관세를 15%로 낮추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일본 사례에서 보듯 이 막대한 투자금은 사실상 미국 제조업 부흥에 일방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며, 투자 지연 시 관세가 다시 인상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관세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더욱이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한미안보협력의 핵심인 북한 비핵화, 미국의 한반도 안보 공약, 확장억제 보장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핵보유국 지위를 주장해 온 북한은 중국·러시아와의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전승절 행사에서 드러났듯, 북한은 강성 대국을 내걸고 미중 사이를 오가며, 러시아에는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며 입지를 확대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 대해서는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세우면서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결국 이재명 정부 외교의 핵심은 미중 전략 경쟁과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대립 구도 속에서 미국의 일방주의와 북한의 핵전략이라는 두 개의 과제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안보에서는 한미일 공조를 강화하되, 경제와 비안보 분야에서는 중국과의 협력도 필요하다.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도발에는 단호히 대응하면서도 ‘통일 경쟁’을 내려놓고 핵 리스크 완화와 군사 충돌 방지에 집중해야 한다. 나아가 민주주의와 규범에 기반한 국제질서 강화를 원하는 국가들과 연대해 미국의 일탈로 약화한 국제 공공재를 보완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지금 한국 외교는 황혼 녘, 멀리 있는 형체가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이른바 ‘개와 늑대의 시간’에 서 있다. 기회와 위협이 교차하는 이 불확실성의 시기에 실용과 원칙을 국력에 걸맞게 어떻게 조율하느냐가 한국 외교의 성패를 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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