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도시 부산에 새로운 맛이 온다
서울에는 ‘난로회’가 있다. F&B(음식료) 업계 인사들이 2022년 한식 문화의 고유성에서 글로벌 한식의 미래를 찾겠다고 결성한 단체다. 조선시대 ‘난로회(煖爐會)’에서 이름을 따왔다. 난로회는 올해 부산시 미식 관광 분야 정책고문이 된 최정윤 의장을 주축으로 외식·식품·유통·마케팅 등 각계 전문가 600명이 뭉친 전국구 모임으로 성장 중이다.
난로회가 스스로 밝힌 결성 이유가 주목할 만하다. 세계가 주목하는 한식은 전통 요리의 특성과 현대의 재해석이 섞여 있는 상태다. 그래서 고유한 재료·조리 방법·역사적·문화적 요소까지 체계적 연구와 과학적 접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난로회는 “세계 무대에서 한식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콜라보레이션이 중요하다. 셰프뿐 아니라 재료 생산자, 디자이너, 인문학자 등 각계 전문가의 참여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한다.
연구·강연·커뮤니티 활동을 활발히 진행 중인 난로회는 지난 5월 부산 장안요의 신경균 작가를 찾았다. 회원들은 신 작가와 함께 언양장과 장안요 텃밭에서 채취한 봄나물을 이용한 요리를 장안요 도자기에 담아 맛보며, 부산의 로컬 식재료가 가진 가능성과 잠재력을 다시 확인했다. 이날 한국 소믈리에 대회 최초 2연속 우승자인 부산 끌리마 이승훈 대표는 와인을 도자기에 담아내며, 와인 페어링의 신세계를 열기도 했다.
참가자 가운데 본앤브래드 김상아 셰프는 “단순하지만 깊은 울림이 남는 하루였고, 부산의 매력을 새롭게 느끼는 시간이었다”라고 말했다. 또 레스토랑 주은의 박주은 셰프는 “좋은 식재료를 서울에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는 여정이었다”라고 밝혔다. 한편 난로회는 헬리녹스와 협력해 캠핑 쿡웨어 ‘전립투&스토브 원’을 최근 공동 개발해 관심을 끌고 있다. 2023년 말 난로회 최정윤 의장이 헬리녹스 측에 조선 후기 화가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여주며 “이 풍경을 21세기 감성으로 재해석해 보자”라고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됐다.
부산에서도 새로운 물결이 일고 있다. 부산의 F&B 업계는 지금까지 각자도생이었다. 콜라보레이션이나 네트워크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그러다 2024년 부산에 미쉐린 레스토랑들이 처음 등장하며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부산이 ‘글로벌 미식 도시’로 자리 잡으려면 혼자만 잘한다고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지불식간에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난로회에서 활동하는 회원이 부산에도 있지만, 아무래도 서울 중심으로 운영되는 모임이어서 지역에서 느끼는 한계가 분명히 있었다. 부산에도 독자적인 모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커질 무렵, 해운대의 미쉐린 레스토랑 소공간 박기섭 오너셰프가 물꼬를 텄다. 박 셰프는 지난 6월 16일 소공간 개업 3주년을 맞아 ‘파도’라는 이름으로 평소 고마운 분들에게 식사 초청장을 보냈다.
막상 한자리에 모이고 보니 면면이 심상치 않았다. 미쉐린 레스토랑만 해도 램지 윤준형 셰프, 레썽스 전지성 오너셰프, 일식당 모리 김완규 대표와 부인 모리 미즈키 씨, 율링 김성주 헤드셰프, 아웃트로바이비토 김상진 오너 셰프, 코르 파스타 바 서정주 오너셰프, 야키토리 해공 김승현 대표 등이 참석했다.
이밖에도 라라관 김윤혜 오너셰프, 쿠르미 과자점 김성진 대표, 야소주반 박준우·김은하 대표, 끌리마 이승훈 대표, 대동대 외식창업디저트과 정지용 교수, 푸드트립앤컴퍼니 최지은 대표, 맛칼럼니스트 박상현 씨, 맛집인플루언서 양준호 씨, <다시부산> 박나리 대표의 얼굴이 보였다. 부산을 대표하는 F&B(음식료)업계 대표주자들이 자발적으로는 처음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다이닝계의 형님’으로 불리는 소공간 박 셰프의 넓은 품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박 셰프는 서양 요리를 하다가 한식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래서 한식을 기본으로 한 독창적이고 섬세한 요리를 선보이며, 미려한 플레이팅으로 시각적인 만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파도의 첫 모임은 박 셰프에 대한 소문을 눈과 입으로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자리였다. 식탁에 오른 보라성게 단호박무스는 명품 목걸이 같아, 손 대기가 망설여졌다. 단호박·성게알·단새우를 품은 가시를 헤쳐 ‘요리는 예술’이라는 명제를 실감했다. 평범한 구포국수의 귀족 같은 변신이 놀라웠고, 48시간 동안 끓인 곰탕과 솥밥의 마무리로 오늘날의 세련된 한식을 느꼈다.
소공간을 가득 채웠던 열기는 2차로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파도가 하룻밤의 물거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다시부산> 박나리 대표가 ‘파도’의 총괄기획을 담당하기로 했다. 그는 2016년부터 10년 가까이 지역에서 잡지를 내면서 로컬콘텐츠를 기반으로 문화 기획 일을 하고 있다. 박 대표는 “물결이 모이면 파도가 되듯이 우리가 더 큰 흐름을 만들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부산을 '맛있는 도시'로 만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이 열정을 나누고 함께 성장하는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라며 파도의 출발을 선언했다.
두 번째 파도는 한 달 뒤인 7월 25일 부산 수영구 민락동 아웃트로바이비토에서 소공간과 코듀로이 펠라즈 등 세 곳의 협업으로 열렸다. 이때부터 파도는 업계 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해 공개 행사로 치르기로 했다. 사실 그동안 코듀로이 펠라즈는 아는 사람만 아는 광안리의 믹솔로지(Mixology) 칵테일 바였다. 요즘 MZ세대들은 술과 음료, 과일, 시럽 등 다양한 재료를 섞어 칵테일과 같은 새로운 음료를 만들어 먹는 믹솔로지 문화를 즐긴다.
미쉐린 레스토랑 두 곳과 처음 보는 믹솔로지 칵테일 바의 만남은 한마디로 끝내줬다. 돼지 앞다리살로 직접 만든 잠봉(Jambon)과 다시마로 숙성한 광어 카르파쵸! 부전동에서 비토로 시작한 아웃트로바이비토가 시간이 흐르며 얼마나 숙성되었는지 알려주는 증거였다. 이날 선보인 칵테일, 내추럴와인, 럼, 히레사케 등 동서양을 넘나든 페어링은 한여름 밤의 꿈 같았다. 아웃트로바이비토 김상진 셰프는 “엄청 재미있었다. 부산에서 독립적으로 요리를 해온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를 덜어내고, 또 채운 날이었다. 요리의 기술적인 부분을 떠나서 공동의 목표를 함께 만들어 가는 일에 대해서 정말 많이 배웠다”라고 말했다. 맛있는 음식과 술, 그리고 친구는 사람을 달뜨게 했다.
파도 세 번째 이야기는 지난 18일 모모스커피 마린시티점에서 열렸다. 모모스커피, 코르 파스타 바, 소공간 세 곳이 협업해 ‘공존’이란 주제로 커피와 미식이 어우러지는 메뉴를 선보였다. 부산을 대표하는 커피 브랜드이지만 음식과는 별 상관이 없는 모모스커피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저녁 식사에는 75석의 좌석이 1분 만에 매진될 정도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코르 파스타 바는 말 그대로 다양한 파스타를 맛볼 수 있는 파스타 전문점이다. 이날, 이 자리에 가지 않았다면 모양이 닮았다고 해서 ‘비너스의 배꼽’으로 불리는 토르텔리니를 평생 모르고 살뻔 했다. 에콰도르산 흰다리새우로 속을 채운 토르텔리니와 함께 나온 모모스의 에콰도르 필터커피는 너무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커플이었다. 모모스커피 전주연 대표는 “힘을 합쳐 부산의 미식이 전체적으로 발전을 해야 가능성이 커진다. 이날 조리 시간이 각각 다른 음식을 처음으로 서빙한다고 힘들었지만 파인다이닝의 디테일한 부분을 많이 배운 의미 있는 자리였다”라고 말했다.
맛집인플루언서이자 <맛있는 부산>을 쓴 음식작가로 지금까지 세 차례 열린 파도에 모두 참가한 양준호 씨의 평가도 흥미로웠다. 양 씨는 “갈수록 콜라보를 하고 싶다고 손을 드는 음식점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요즘은 가게 홍보가 가장 힘든데, 파도는 사람들한테 가게를 친숙하게 만들어 대중화하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음식만큼 지역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분야도 드물다. 세 번의 파도는 지역에서 다양한 분야의 협업으로 ‘함께하면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
파도 총괄기획 박나리 대표는 “앞으로는 단순한 하루 팝업행사를 넘어 지속가능한 협업의 방법을 연구하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파도처럼 계속 움직여 나갈 계획이다. 맛있는 도시, 부산을 위한 새로운 시도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거나 응원하고 싶은 분이라면 누구든 함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다음번에는 어디서, 어떤 새로운 파도를 만나게 될지 기대된다. ‘미식 도시’ 부산에 파도가 더욱 세차게 몰아치길 희망한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