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기억의 가장자리-도미야마 다에코의 미학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 8월 15일 해방. 일본에는 ‘피해의 기억’이, 한국에는 ‘해방의 기념’이 겹치는 이 열흘 남짓의 시간은 아시아 현대사의 어긋난 기억 구조가 드러난다. 잊히고 침묵을 강요당한 이들이 그 사이에 있다. 강제징용 노동자, 일본군 위안부,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기억하는 것을 예술의 책임으로 여긴 작가, 도미야마 다에코(1921~2021)가 있다.
그는 일본 전후 미술사에서 드물게 윤리적 시선을 지닌 작가였다. 일본 사회가 ‘피해자’로만 자신을 기억하는 방식, 그 속에서 제국주의 가해의 역사마저 덮어버리는 망각의 정치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그의 작업은 그런 구조에 균열을 내는 예술적 증언이자 저항의 행위였다.
도미야마는 1980년대 중반 ‘바다의 기억’ 연작을 발표했다. 이 연작은 아시아 여성이 겪은 전쟁과 폭력의 기억을 민속 신화, 샤머니즘 이미지, 자연의 형상과 결합해 시각화한 작업이다. 그중 하나인 ‘남태평양 해저에서’는 남태평양 오지 섬에 끌려와 성노예로 수난을 겪다 숨진 뒤 바닷속에 버려져 수중고혼으로 해양생물과 하나 된 위안부의 백골을 상상하며 그린 작품이다. 도미야마는 이 연작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과 아시아 여성들의 삶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그리고 그 고통이 어떻게 국가의 침묵 속에 방치됐는가를 조형적으로 풀어냈다.
한편 일본 사회에서 ‘히바쿠샤(被爆者)의 미학’은 오랫동안 ‘원폭 피해자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서사로 재생산됐다. 그것은 중요하고 잊혀서는 안 될 기억이다. 하지만 도미야마는 그것이 국가 폭력의 구조적 비판 없이, 오히려 일본을 도덕적 피해자 위치에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면, 그 역시 또 다른 침묵의 공모라고 보았다. 그는 원폭의 ‘연기 너머’를 보려 했다. 피폭으로 사라진 조선인 강제노동자의 그림자, 일본 제국의 확장에서 짓밟힌 여성들의 목소리, 그리고 그것을 감춰온 전후 일본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이 바로 그것이다.
도미야마는 가장자리를 떠도는 형상들, 잊힌 존재들의 침묵, 민속적 기호를 통해 말해지지 않은 것의 무게를 드러낸다. 그것은 ‘미’의 실현이 아니라, 윤리의 환기, 기억의 소환이다. 그는 국가가 말하지 않는 것을 기억해 내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그는 ‘예술가’ 이전에, 역사에 책임지는 ‘인간’이었다.
매해 8월이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또 잊는가? 일본이 피해자의 언어로 원폭을 말할 때, 우리는 지워진 존재를 함께 말할 수 있는가? 도미야마는 이 질문을 끝까지 붙들었던 작가였다. 그의 작품 앞에서, 예술은 단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일이 아니라, 망각에 저항하는 실천이 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미술평론가·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