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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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1930~1993)

내 머리칼에 젖은 비

어깨에서 허리께로 줄달음치는 비

맥없이 늘어진 손바닥에도

억수로 비가 내리지 않느냐,

비여,

나를 사랑해다오

저녁이라 하긴 어둠 이슥한

심야라 하긴 무슨 빛 감도는

이 한밤의 골목어귀를

온몸에 비를 맞으며 내가 가지 않느냐,

비여,

나를 용서해다오

시집 〈천상병 전집〉 (2007) 중에서

생이 아름다운 소풍이었다던 고 천상병 시인이 서른한 살이던 1961년에 발표한 시입니다.

피할 수 없게 내리는 비, 온몸을 젖게 한 비, 평생을 가난하게 살게 한 비에게 시인은 사랑과 용서를 청합니다.

1967년 동백림사건, 다가오고 있는 시련 앞에서 미리 써둔 수난 고백 같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죄인이 된 시인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요. 용서를 하는 것과 용서를 받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울까요.

순수한 인간의 내면 속으로 걷고 있는 고독, 세상사의 온갖 번거로움을 군더더기 없이 걸러낸 서정이 애절하기만 합니다.

예보를 무색하게 만들며 쏟아지는 빗속을 걷다 보면 맥없이 늘어진, 그러나 사랑과 용서를 남기고 떠나는 시인의 뒷모습을 만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정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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