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학수의 문화풍경] 덧없음 속에서 피어나는 삶의 의미
동서철학 아카데미 숲길 대표
모래 축제·드론쇼 등 부산의 여름 예술
화려한 찰나 선보인 뒤 모두 사라져
일본의 미의식·하이데거 철학과 연결
유한함 자각 통해 충만한 삶 이어져야
해운대 해변 너머로 여름 해가 저물고, 황금빛 노을이 파도 위로 부서지는 순간, 부산의 여름 휴가객들은 묘한 기쁨에 휩싸입니다. 쌓아 올린 모래성이 파도에 쓸려가고, 밤하늘을 수놓던 불꽃이 이내 사라지듯, 이 찰나의 순간들은 일본의 미의식인 ‘모노 노 아와레’(物の哀れ)를 떠올리게 합니다. ‘덧없음 속의 애절한 아름다움’을 뜻하는 모노 노 아와레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유한성 철학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삶의 유한함이 오히려 삶의 의미를 형성한다는 하이데거의 사상은 부산의 여름 풍경과 어우러져 깊은 울림을 전달합니다.
모노 노 아와레는 18세기 일본 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에 의해 널리 알려진 개념입니다. 만개한 벚꽃이 이내 떨어지고, 화려한 축제가 며칠 만에 막을 내리듯,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 덧없음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한다는 깨달음이죠. 부산의 여름 역시 이러한 미의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해변의 모래성은 파도에 녹아내리고, 거리 공연은 인파 속으로 사라지며, 자갈치 시장의 싱싱한 해산물 만찬은 오직 기억 속에만 남습니다. 이 모든 덧없는 경험은 우리에게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영원하지 않은 것들 속에서도 진정한 여유를 찾으라는 모노 노 아와레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이데거의 유한성 철학은 서구 실존주의의 핵심입니다. 그는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이 유한한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며, 늘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우리는 삶의 끝을 인지하며 불안을 느끼지만, 동시에 이 유한함의 자각이 삶을 충만하게 살아가도록 이끄는 촉매제가 됩니다. 축제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바닷가에서 맛있는 음식을 음미할 때, 이 모든 순간이 언젠가 끝날 것임을 알기에 우리는 더욱 그 순간을 붙잡으려 노력합니다. ‘오늘을 붙잡아라’라는 라틴어 구절은 ‘카르페 디엠’입니다. 이는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작품 오데스의 한 구절, ‘오늘을 붙잡고, 미래는 되도록이면 믿지 마라’라는 구절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구절은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며 현재 순간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의미입니다. 모노 노 아와레가 덧없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가깝다면, 하이데거의 유한성은 덧없는 삶 속에서 우리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라는 절박한 부름인 셈입니다.
부산의 여름은 이러한 두 철학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장입니다. 5월 말부터 시작되는 해운대 모래 축제는 거대하고 정교한 모래 조각들이 며칠 만에 부서지기에 존재의 무상함을 은유합니다. 동시에 모래 작품들은 삶이 짧다는 것을 인지하고 진실하게 인생에 참여하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하이데거의 유한성을 반영하죠. 매주 다른 패턴으로 밤하늘을 수놓는 광안리 M 드론 라이트 쇼는 순간순간 사라지는 빛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기억 속에만 남는 덧없음을 보여줍니다. 6월 말, 부산 콘서트홀 개관 축제는 시민 공원을 클래식 음악으로 가득 채우고, 잠시 울리던 음표는 이내 침묵 속으로 사라집니다. 부산 푸드 필름 페스타(6월 13~15일) 또한 팝업 푸드 트럭과 야외 영화 상영으로 주말과 함께 사라지는 감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며 무상함을 포착합니다.
이러한 부산의 예술은 한국적 미의식인 한(恨)이나 불교의 무상(無常) 개념과도 깊이 공명합니다. 한은 덧없는 아름다움이 사라질 때 느끼는 슬픔과 아쉬움의 정서로 발현되며, 불교의 무상(無常)은 모든 존재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소멸하는 본질을 깨닫는 가르침입니다. 범어사의 고요한 여름 풍경 속에서도 우리는 덧없음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산의 예술가들은 덧없는 순간들을 기념하며, 사라지는 것에서 기쁨을 찾으며 유한한 삶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도록 이끌어줍니다.
2025년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열리는 여름 축제에 와 있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당신은 라이브 밴드의 연주가 펼쳐지는 가운데, 음악과 바닷바람에 온전히 푹 빠져 관중들과 함께 춤을 추며 그 순간을 만끽합니다. 곧 행사가 끝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죠. 이후 팝업 푸드 트럭에서 신선한 회 한 접시를 맛보며 광안대교의 불빛을 감상합니다. 축제가 끝나고 푸드 트럭이 떠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당신은 그 덧없는 순간에 더욱 깊이 몰입하게 됩니다. 이는 모노 노 아와레의 애절한 기쁨에 공감하며, 유한성이 우리에게 촉구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이번 여름, 부산에서 덧없는 삶이 선사하는 가장 아름다운 철학적 추억을 새겨보세요. 당신의 기억 속에 영원히 빛날 순간들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