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인사이트] 의료 대란, 지역에서 던지는 질문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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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의료 대란으로 지역 종합병원 활성화
빅5 몰리던 경증 환자 지역으로 몰려
의료 전달체계 정상화, 의료복지 핵심

500~1000명 청년 고용하는 지역 기업
약국·유통·의료기기 등 유발 효과 높아
15분 거리 ‘2차 병원’ 가치 중요시해야

지난해 10월 정부가 의과대학 정원을 늘리겠다고 발표한 뒤 벌써 1년이 흘렀다. 이후 전공의 대부분이 병원을 떠나면서 8개월째 의료 대란이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 3차 진료 의료기관인 서울 ‘빅5’(서울대·서울아산·삼성서울·세브란스·서울성모) 대학병원은 파행 운영 중이다. ‘응급실 뺑뺑이’는 늘어나고, 배후 진료도 붕괴하고 있다. 그 사이에 전국 39개 의과대학의 2025학년도 수시모집은 마감됐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난 사이에, 의대생 증원 입시 열차도 플랫폼을 떠났다.

뜻하지 않은 긍정적인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일시적일 수도 있지만, 지역 2차 의료기관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형국이다. 경증 환자들이 2차 종합병원으로 몰리면서, 빅5 위주의 3차 의료기관으로 집중됐던 의료 전달체계가 정상화하는 조짐이다. 3차 대형병원이 전공의 부족으로 중증 환자만 가려 받으면서, 경증 환자들이 2차 종합병원으로 분산된 덕분이다. 대형병원 응급실을 찾는 경증 환자는 30% 이상 줄었다고 한다. 실제로 부산의 성모병원, 대동병원, 봉생병원, 온종합병원, 부민병원, 순병원 등 2차 의료기관 실적이 호전되는 양상이다.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이다.

의료 대란 이전에는 감기만 걸려도, 혈압이 140만 넘어가도 대학병원을 찾았다. 상급종합병원·권역의료센터 응급실 환자 중 중증 환자는 10.6%에 그쳤을 정도다. 빅5 병원이 서울 SRT수서역에서 셔틀버스를 운행하며 경증 환자까지 박리다매로 영업하면서 하루 환자 1만 명에 연 2조 원 매출을 올리는 공룡병원까지 탄생했다. 병원 주변에는 월세 ‘환자촌’이 생길 정도다. 하지만, 그런 파행적 현상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빅5 병원은 40% 가까이 차지하던 전공의가 떠나면서 병원 기능이 마비됐지만, 전문의가 81% 이상을 차지하는 지역 2차 종합병원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형병원급의 의료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는 곳도 많아 의료 대란의 공백을 메우고 있다. 실제로 중소병원 의사 수는 2만 2401명으로, 3차 대형병원의 2만 3346명과 맞먹는 상황이다.

이런 변화는 앞으로 지역 대학병원을 빅5 병원 정도로 업그레이드하고, 쉬운 전원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서 지역으로서 굉장히 바람직한 추세다. 첫 번째가 의료 접근성 때문이다. 상당수가 앓는 질병은 췌장암이나 심장이식 등 중병도 있지만, 폐렴 같은 호흡기질환이나 고혈압 등 만성질환, 맹장수술 등 2차 종합병원에서 처리가 가능한 경우가 많다. 전문가들은 경증의 경우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진료를 받는 게 효율적이라고 조언한다.

두 번째는 지역 의료 수준의 강화이다. 국가와 지역의 의료 서비스가 강해지려면 허리층인 지역 종합병원의 수준이 탄탄해져야 한다. 낮은 수가와 금융 부채, 잦은 의료 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 2차 종합병원이 수익을 올리고, 그 병원에 수준 높은 의사가 몰려야 지역민의 의료복지도 함께 높아진다. 이로 인해 지역 환자들이 서울 대형병원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건강한 의료 혜택을 집 근처에서 받을 수 있다. 그것이 의료 정상화이다. 경증 환자가 대학병원 응급실을 차지하면서 정작 치료가 필요한 중증·응급 환자는 치료받지 못하게 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지역 2차 종합병원의 기능 강화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세 번째는 산업적 측면이다. 비교적 시내에 위치한 지역 2차 종합병원은 연간 500억~1000억 원 상당의 매출을 올리는 서비스 기업이다. 500억 원대 병원은 500명, 1000억 원대 병원은 1000명 안팎의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행정직원 등을 고용한다. 지역에서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을 대거 채용할 수 있는 소중한 지역 기업이다. 지역 종합병원이 건재하면, 약국·제약유통·의료기기 등 연관 산업과 고용 시장도 동반성장한다. 지금처럼 빅5로 환자가 집중되면, 관련 산업도 함께 고꾸라진다. 올 상반기 지방 환자의 서울 상급종합병원·종합병원 진료비는 2조 3871억 원. 빅5 병원에만 1조 5603억 원이 들어갔다. 약값과 숙식비, 교통비는 별도다. 이 중 상당수는 지역에서 거둘 수 있는 매출이었다. 산업으로서 지역 2차 종합병원의 가치를 중요시해야 한다.

기자도 몇 년 전부터 매년 대학병원에서 하던 건강검진을 시내 종합병원으로 옮겼다. 전공의가 아닌, 수십 년 경력의 전문의가 내시경 시술과 뇌 MRI 진단을 직접 하면서, 훨씬 상세한 설명과 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 정부도 상급종합병원은 중증·응급 환자에 집중하고, 웬만한 질병은 2차 병원에서 해결하는 방안을 제도화한다고 한다. 이번 기회에 걸어서 15분 거리의 지역 종합병원이 보다 활성화되기를 소망한다. 의료 대란의 와중에 지역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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