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딥페이크 성범죄’라는 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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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희 전 (사)여성인권지원센터‘살림’ 상임대표

5년 전 ‘N번방’ 사태 보는 듯한 기시감
성폭력 집단 공유하는 남성문화 주범
AI가 우리 사회 성문화 학습한 결과물

9월 성매매방지법 시행 20주년 맞아
성범죄에 관대한 국가·사회 책임 크다
야만적 패턴 개선 없인 비극 계속된다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한 성범죄로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해 딥페이크 성 착취 영상물을 공유하는 국내 텔레그램 채널 가입자 규모는 22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 보안 서비스 업체는 ‘2023 딥페이크 현황 보고서’에서 한국 국적의 피해자가 가장 많은 것으로 드러나 한국이 딥페이크 성 착취물에 가장 취약한 국가라고 밝혔다. 정부와 여야가 한목소리로 심각한 범죄에 대한 대책 마련을 다짐했다. 그런데 어쩐지 똑같은 뉴스를 되풀이해서 보는 것만 같다. 불과 5년 전인 2019년, ‘N번방’으로 알려진 텔레그램 성 착취방 참가자 규모가 26만 명이었다.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은 그때에도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각종 대책이 쏟아져 나왔었다. 도대체 이 기시감은 무엇인가.

2021년 전국 최대 규모의 성매매 포털사이트 운영자가 필리핀에서 검거되었다. 사이트 회원 수는 약 70만 명, 후기 글은 98만 개에 달했다. 해당 사이트에서 광고했던 성매매 업소만 2613개로 전국의 고등학교 숫자보다 많다고 알려져 있었다. 업소별 게시판에서는 성 구매 후기가 올라왔고, 각종 성범죄와 불법 촬영을 통해 어떤 식으로 여성을 능욕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낼수록 환호를 받았다. 심지어 조건 만남의 대상이 된 성 착취 피해 아동·청소년과 여성을 다른 남성에게 거래하는 ‘분양’ 게시판도 있었다. 성범죄 후기를 쓰면 오히려 포인트를 적립 받고 업소에서 성 구매 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불법 합성 성 착취물을 만들어 공유하면 환호받고 오히려 크레딧이 적립되어 또 다른 성 착취물에 접근하는 데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지금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2016년이 되어서야 폐쇄된 소라넷도 마찬가지였다. 오프라인에서 벌어진 성범죄가 온라인에서는 남성들의 놀이 문화로 당연시되었다. 마치 평행 우주처럼 똑같은 일들이 매번 반복된다. 그 때문에 여성계와 교육계는 각종 성명서와 기자회견을 통해 여성과 아동을 성적 대상화하는 온라인 남성문화를 ‘딥페이크 성범죄’ 사태의 핵심으로 지적하고 있다. 여성을 모멸하고 지인을 능욕하는 폭력을 쾌락이라고 여기고, 이를 집단으로 공유하는 데서 더 큰 쾌락을 얻는 남성문화가 주범이라는 것이다.

남성들만의 커뮤니티에서, 대화방에서, 채널에서 여성과 아동의 신체를 성적 대상화하고 조롱하는 범죄가 놀이처럼 일어난다. 이러한 남성문화는 폭력과 착취를 상업적 행위로 둔갑시켜 돈벌이가 가능하도록 만든다. 수익을 얻는 업자들이 생겨난다. 엄청난 수익이 창출되고, 또다시 범죄를 조장하는 판이 만들어진다. 첨단 AI 기술을 재료 삼고 세계 최고 수준의 보안 플랫폼을 방패 삼은 폭력은 또다시 세계 최대 규모의 성범죄로 드러나고야 만다. 이러한 온라인 남성문화는 어느 날 달나라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온라인 성범죄는 오프라인을 기반으로 한 성범죄다. 폭력적 온라인 남성문화는 우리 사회에서 아주 오랫동안 뿌리내려 상업적 성 착취를 가능하게 했던 남성문화의 온라인 버전인 셈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박찬욱 감독은 한때 자신의 영화사 이름을 ‘NRS(NO 룸살롱)’라 지으려 했다고 한다. 룸살롱 문화는 영화계에만 있었던 관행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처음 성매매방지법이 만들어졌을 때, 성 구매 행위를 강력히 처벌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것이 법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당시 남성 정치인으로부터 “대한민국 남성을 전부 범죄자로 만들 셈이냐”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성 구매 범죄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남성문화, 여성을 유흥과 소비 거리로 취급하고, 모욕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남성문화, 그토록 관대한 성매매 문화는 대한민국 사회의 거대한 성 산업을 낳았고, 온라인 환경에서 폭력적 남성문화로 이어졌다.

9월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된 지 20주년을 맞았다. 은폐된 룸살롱 방 안, 성매매 업소 정보와 성 착취 영상을 공유하는 커뮤니티 게시판, SNS 대화방과 텔레그램 채널에서까지 누군가의 딸이나 여자 형제일 수도 있는 존재에 대한 성적 모욕과 폭력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그 행태는 바뀐 적이 없다. 성매매 문화에 관대한 사회, 유독 이러한 성범죄에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사법부, 성범죄 형량 감경으로 수임료를 올리는 법조인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 더없이 크다. 무엇보다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폭력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다는, 이 사회에 만연한 야만적 갑질 사고 패턴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비극은 계속될 것이다. AI가 기존 데이터를 학습하듯, 딥페이크 성범죄 역시 이 사회를 학습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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