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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부산 문화 전성시대
한국전쟁 중 부산에서 제작됐다가 유실된 영화 ‘낙동강’(1952)이 발굴, 복원된 덕분에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70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건 문화사적 사건이었다. 전란 중에 어떻게 부산에서 영화 제작이 가능했던 것일까. 1000일의 임시수도 부산이 문화 수도였기 때문이다. 피란길에 오른 문학과 미술, 음악 등 문화계 인사들이 부산에 모여들었고 이들은 광복동 다방 거리 등에서 예술의 혼을 이어갔다.
영화 ‘낙동강’은 1950년 8~9월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를 소재로 한 점뿐만 아니라 당시 부산에서 학교 음악교사로 있던 윤이상이 제작에 참여한 점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프랑스, 독일 유학 이후 세계적인 거장으로 우뚝 선 작곡가의 초기 작품이 묻힐 뻔했다가 재조명된 것이다. 주제곡 ‘낙동강’은 노산 이은상의 동명 시에 곡을 붙였고, 제법 인기도 얻었다고 전해진다. 피란 시절 윤이상의 다른 작품에도 국난의 황망함이 오롯이 담겨 있다. 박목월의 시 ‘달무리’ ‘나그네’에 선율을 붙인 동명의 가곡에는 민초들의 고단한 삶이 녹아 있다는 평가다.
난리통에 부산에서 어울린 시인과 작곡가의 의기투합은 자연스러웠다. 자갈치시장 대폿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시인 박화목과 작곡가 윤용하는 동시대인의 역경을 노래로 승화하자고 다짐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옛 생각이 외로워…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박화목이 써 온 ‘옛 생각’을 윤용하가 ‘보리밭’으로 제목을 바꿔 노래로 만들었다. 한국적 서정이 담긴 선율 덕분에 오늘날까지 애창되는 한국의 대표 가곡으로 자리잡았다. 자갈치시장 친수공간에는 ‘보리밭’ 탄생 일화와 악보가 새겨진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전쟁통에도 예술가들은 창작을 멈추지 않았고, 피란민들을 위로했다. 그 시대의 기억을 소환하는 음악회가 열려 주목된다. 29일 오후 7시 30분 부산문화회관 중극장에서 열리는 ‘부산 전성시대’에는 피란 시절 부산에서 활동한 작곡가들의 가곡 12곡이 무대에 오른다. 동진숙 임시수도기념관장은 김동리, 유치환, 이중섭 등 문인과 화가, 작곡가의 당시 사진과 영상으로 해설을 덧붙인다. 전란 중 문화예술의 꽃을 피운 예술인들이 75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이는 셈이다. 공연 기획사 ‘부산문화’는 설립 30주년을 기념해 이번 공연을 기획했다. 고난의 시대에도 찬란했던 과거를 되새기며 부산 문화의 전성시대를 이어가겠다는 취지다. ‘문화로 융성하는 부산’을 견인하는 노력이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2025-04-27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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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43년 만의 사과
대한민국 경찰에게 1982년 4월 26일은 가장 치욕적인 날로 기억된다. 이날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경남 의령군 궁류면에서 이른바 ‘우 순경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의령경찰서 궁류지서 소속 우범곤 순경이 무기고에서 꺼낸 총기로 주민 56명을 살해, 34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본인도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경찰관 한 명이 비무장 주민들을 상대로 대규모 살상극을 벌인 이 사건은 당시 건국 이래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꼽혔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보도를 통제하면서 이 사건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당연히 추모 행사도 열리지 않았다. 9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잊힌 사건’으로 전락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 희생자 추모 사업이 본격화된 것은 2021년부터였다. 당시 의령군수가 “이 사건은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관이 벌인 만행인 만큼 국가에 책임이 있다. 국비로 이들의 넋을 위로해야 한다”라고 국무총리에 건의하면서 추모공원 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이후 궁류면 평촌리 궁류공설운동장 인근에 8891㎡ 규모 추모공원을 건립하는 사업이 본격화됐다. 추모공원 내 위령탑이 먼저 완공되면서 사건 발생 이후 42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해 4월 26일 제1회 위령제가 개최됐다. 너무도 끔찍했던 사건에 대한 너무도 뒤늦은 해원이었다. 당시 위령제에서는 위령탑 제막에 이어 유족이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는 등 희생자들의 넋을 추모하는 행사가 이어졌다.
43주기를 맞는 26일에는 제2회 위령제가 ‘의령 4·26추모공원’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날 특별한 행사가 예고됐다. 김성희 경남경찰청장이 위령제에 직접 참석해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고 유가족에게 사죄와 위로의 말을 전달한다고 한다. 사건 발생 이후 경찰 책임자가 공식 위령제 석상에서 사과의 말을 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긴 세월 동안 억장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던 유족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위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특히 의령은 우 순경 사건 때문에 현재까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주민들이 감수해야 했던 정신적인 충격은 물론이고 지역 자긍심도 큰 상처를 입은 것이다. 지난해 첫 위령제에 이어지는 경찰의 뒤늦은 공식 사과를 계기로 의령이 ‘우 순경의 악몽’을 떨쳐내고 새 시대를 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특히 이날 ‘의령 4·26추모공원’도 공식 준공된다. 이 공간이 참혹했던 비극의 상처를 보듬는 장소로 자리매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천영철 논설위원 cyc@
2025-04-24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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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전국 술집 최단경로 시간
올여름 유럽 여행을 계획 중인 A 씨는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3개국의 8개 도시를 방문하고 싶어 한다. 그는 최소한의 비용과 시간으로 이들 도시를 한 번씩 들른 뒤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여행을 꿈꾸고 있다. 과연 어떤 경로가 가장 효율적일까? 외국 여행을 계획했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봤을 법한 이 문제는 수학에서는 흔히 ‘외판원 문제’로 불린다. 일반인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지만, 조합 최적화 분야에서는 매우 잘 알려진 대표적 문제 중 하나다. 간단히 말해, 주어진 여러 도시를 모두 한 번씩 방문하고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가장 짧은 경로를 찾는 것이 핵심이다. 소위 점과 점을 잇는 ‘한 붓 그리기’와 유사하다고나 할까.
겉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방문 장소가 늘어날수록 가능한 경로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최적경로를 찾는 것은 매우 복잡해진다. 예를 들어 여행지 4곳만 있는 때는 3가지 경로가 가능하지만, 8곳이라면 2520개의 경로가 생성된다. 수천, 수만 개의 여행지를 고려해야 한다면 대형 컴퓨터를 동원해 풀어야 할 정도로 복잡해진다. 이런 이유로 사실상 정답을 찾기보다는 근삿값으로 가장 가까운 경로를 찾는 것이 현실적인 목표가 된다. 이 문제는 18세기 ‘수학계의 모차르트’라 불린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1759년에 처음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판원 문제는 컴퓨터 과학, 수학, 운영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본적으로 다뤄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실생활과 산업 전반에 걸쳐 널리 적용되고 있다. 특히 택배 물품을 전달할 최적의 경로를 찾거나, 컴퓨터 기판에 구멍을 뚫을 때 드릴이 움직여야 할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결정하는 데도 활용된다. 실제 미국 아마존에서는 택배 배송 트럭의 경로 최적화에 외판원 문제를 적용해 동선을 효율적으로 조정하고 있다.
세계적인 수학자 윌리엄 쿡 교수는 최근 한국 경찰청의 술집 위치 데이터를 바탕으로 전국 8만 1998개 술집을 모두 걸어서 방문하는 최단경로를 계산해 화제가 됐다. 3개월간 여러 대의 컴퓨터를 병렬로 돌려 얻은 결과, 최단경로에 드는 시간은 178일 1시간 56분 17초였다. 이제 외판원 문제는 택배 차량 운전자, 여행 일정을 짜는 이, 외근 나가는 직장인까지, 우리의 생활 속에 너무나 자주 등장한다. 외판원 문제를 통해 복잡다단한 세상 속에서 어떤 방식이 진정 효율과 질서를 찾아가는 최적의 방식인지를 우리 모두 배웠으면 한다.
2025-04-23 [1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