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아파치의 조기 퇴역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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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헬리콥터들은 북미 원주민 부족과 용맹한 전사 이름을 딴 경우가 많다. 대형 공격 헬기 ‘아파치’(AH-64)의 이름도 원주민 부족 중 가장 용맹했던 아파치족에서 따왔다.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의 척박한 환경에서 살던 아파치족은 기마술, 매복, 야간전투에 능했다. 19세기 중반 미국과 멕시코에 맞서며 아파치족을 이끈 영웅은 제로니모였다. 그는 강철 같은 지도력, 불굴의 의지를 지닌 전사로 미군의 존경을 받았다. 미 공수부대원들은 강하 작전을 할 때 “제로니모”를 외친다.

아파치 헬기는 ‘전차 저승사자’로 불린다. 1986년 미 육군에 도입된 뒤 40년간 가장 치명적인 공격 헬기의 명성을 유지해 왔다. 1991년 걸프전에서 탱크 278대를, 2003년 이라크전 때는 탱크 80여 대와 장갑차 140여 대, 포 250여 문을 파괴하는 위력을 과시했다. 시속 365㎞의 빠른 속도, 두꺼운 장갑차를 뚫는 1200발짜리 30㎜ 기관포, 2.75인치 로켓탄 76기, 장거리에서 적 전차와 벙커를 무력화하는 ‘헬파이어 미사일’ 16기를 갖췄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아파치와 같은 공격 헬기가 힘을 쓰지 못하면서 무용론이 확산하고 있다. 200억 원이 넘는 러시아군 공격 헬기 ‘Ka-52’가 1000만 원 안팎인 휴대용 미사일에 줄줄이 격추됐다. 러시아군 주력 공격 헬기 ‘Mi-28’도 우크라이나의 자폭용 드론 공격을 받고 추락하기도 했다. 첨단 방공망과 드론 성능이 강화되면서 ‘전차 킬러’ 아파치의 위상 하락도 불가피하게 됐다. 미 육군조차 작년 20억 달러(약 2조 7300억 원)를 투자한 차세대 공격 정찰 헬기 사업을 취소하고 무인기와 유무인 복합 시스템 투자를 늘릴 계획이다.

우리나라도 공격 헬기 대신 드론과 유무인 복합 전투체계 등을 도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4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2차 추경예산에서 당초 본예산에 반영됐던 대형 공격 헬기 2차 사업 예산 100억 원 중 97억 원이 삭감됐다고 한다. 아파치 36대 도입을 위한 계약 예산이었는데, 이를 없앤 것으로 사실상 사업이 백지화 수순에 접어들었다. 업체가 제시한 헬기 가격이 대당 441억 원(1차)에서 733억 원(2차) 수준으로 급등했고, 현대전에서 드론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대형 헬기 도입 재검토 여론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첨단 드론 위주의 공중 전력 재편이 아파치 헬기의 조기 퇴역을 부른 셈이다. 군사 기술의 급변 속에 ‘지구 최강’이었던 아파치 헬기가 외면받는 모습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낀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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