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봄 아쉬워 산 올랐더니 진홍빛 춘정 가슴에 사무치더라

김진성 기자 paper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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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바래봉 철쭉 기행

고도 높아 정상 부근 늦은 봄에도 만개
1970년대 면양 목장지에서 군락 형성
일반 산철쭉 비해 훨씬 선명한 진홍빛
사람 키보다 큰 터널 형성 독특한 풍경
정상석 배경으로 찍는 '요정샷' 장사진

국내 최대 철쭉군락지인 지리산 바래봉 팔랑치에는 여름에 계절을 내어 주려는 게 아쉬운 듯 진홍색 철쭉이 능선을 타고 자태를 뽐내고 있다. 김진성 기자 paperk@ 국내 최대 철쭉군락지인 지리산 바래봉 팔랑치에는 여름에 계절을 내어 주려는 게 아쉬운 듯 진홍색 철쭉이 능선을 타고 자태를 뽐내고 있다. 김진성 기자 paperk@

매서운 열기가 봄을 밀어내고 있다. 5월 중순인데도 낮 최고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날씨가 연일 계속된다. 가는 봄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절기는 이를 허락치 않는다. 매화·산수유에서 시작한 봄꽃들이 찬란한 벚꽃을 지나 봄꽃의 마지막인 철쭉에게 봄을 맡긴다. 가는 봄이 아쉬워 철쭉 군락지인 지리산 바래봉을 찾았다.

■직접 걸어야 감동이 완성되는 바래봉

지리산 바래봉(1165m) 철쭉 군락지 산행은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됐다. 능선을 따라 철쭉으로 붉게 물든 바래봉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 여기저기 꽃구경을 다녀봤지만 산 전체를 철쭉이 장악한 곳은 없었다. 철쭉의 붉은 기운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급히 찾아보니 아직 늦지 않았다. 4월 하순 무렵 바래봉 산 아래쪽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지만 정상 부근은 이달 말까지 철쭉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급한 마음에 한걸음에 바래봉으로 달려갔다.

지리산 바래봉은 ‘발산(鉢山)’이라고도 한다. 봉우리 모양이 나무로 만든 승려들의 밥그릇인 바리와 비슷하게 생긴 데서 유래했다. ‘삿갓봉’이라고도 하는데, 승려들이 쓰고 다니던 삿갓 모양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래봉이 국내 최고의 철쭉 군락지로 떠오른 데는 재미난 사연이 있다. 지리산 서쪽에 위치한 바래봉 일대는 숲이 매우 울창했다. 1970년대 초 이곳에 한국·오스트레일리아의 시범 면양 목장을 조성하게 된다. 그런데 식성이 좋은 면양이 잎에 독성이 있는 철쭉만 제외하고 대부분의 식물을 먹어 치웠다. 사람이 철쭉을 먹으면 구토와 어지러움 등을 느끼고 사망에도 이를 수 있을 정도로 독성이 강하다. 당시엔 이 지역이 출입금지 구역이어서 일반인들은 목장 철쭉꽃의 아름다움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산악인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이후 사진작가들의 멋진 작품이 발표되면서 일반인들에게 큰 관심을 끌게 됐다.

바래봉 철쭉은 일반적인 산철쭉과 비교해 색이 훨씬 짙고 선명한 진홍빛을 띤다. 해발 고도가 높아 일교차가 크고 바람이 강해 꽃잎의 색이 더욱 선명한 것이다. 고도 차로 산 아래 꽃이 지더라도 정상부는 만개하는 경우가 많다. 늦은 봄까지도 화려한 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이유다.

지리산 바래봉 정상까지는 임도가 잘 정비돼 있어 초보 등산객들도 산을 오르기 싑다. 김진성 기자 paperk@ 지리산 바래봉 정상까지는 임도가 잘 정비돼 있어 초보 등산객들도 산을 오르기 싑다. 김진성 기자 paperk@

바래봉 철쭉의 또 다른 매력은 나무 모양에 있다. 양들이 철쭉 주위의 풀을 뜯으며 나무 아래쪽을 정리해준 덕에 둥글둥글한 모양이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사람 키보다 큰 철쭉이 터널을 이루며 독특한 풍경을 연출한다. 바래봉의 철쭉은 바래봉 정상에서 서쪽 아래까지 4km 이상 넓게 퍼져 있는데, 팔랑치에서 1.5km쯤에 가장 밀집돼 있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 용산리에서는 매년 4월 말부터 5월 중순까지 바래봉 철쭉 축제를 열고 있다. 올해로 30년째다. 용산마을에 도착하니 철쭉 축제가 한창이다. 평일 오전이어서 관람객들은 많지 않았지만, 축제 관계자들의 움직임은 분주하다.

바래봉 철쭉 군락지까지는 3가지 루트가 있다. ‘지리산 허브밸리 주자장(용산마을)- 바래봉 삼거리-정상-바래봉 삼거리-허브밸리 주차장’으로 원점회귀하는 코스로 잡았다. 왕복 9.6km 정도이고, 5~6시간 소요된다. 이 코스는 초반에 조금 가파른 길을 지나면 대체로 완만하지만 다소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가장 대중적이고 초보자도 쉽게 오를 수 있다.

등산로 입구 안내소 옆에 지리산 운봉 바래봉 유래를 적은 바위 조형물이 눈길을 끌었다. 이곳에서 바래봉 정상까지는 4.2km로 가는 내내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임도로 돼 있다. 임도를 따라 오르다 보면 곳곳에 등산객들을 위한 쉼터(정자)가 마련돼 있다. 산 아래쪽에서는 철쭉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봄을 아쉬워하다 시들어가는 철쭉의 모습만 간간이 눈에 띄었다.

1시간 여를 올랐을까. 철쭉의 모습은 없고, 지리한 임도만 계속됐다. 아상(我相)이 올라왔다. “너무 늦어 정상에도 꽃이 없는 거 아냐? 좀 더 일찍 올 걸 그랬나?” 등등 갖가지 짜증이 몰려왔다. 나 뿐아니었다. 앞서 가던 등산객 커플의 짜증스런 말투가 들려왔다. 등산과는 관계없는 이야기인데 짜증이 섞여 있다. 이들도 아상이 올라온 것일까. 철쭉만 보려고 했고, 보이지 않으니 짜증이 났다. 다른 사물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건 당연하다. 잠시 앉아서 호흡에 집중하고 나니 다른 것들이 보였다. 왕성한 푸른 기운을 간직한 나무와 풀들, 그리고 이들 사이로 날아다니는 나비와 벌레들. 정겨운 새소리들. 정말 경이로운 모습이다. 철쭉을 조금 내려놓으니 한결 가볍고 편안하다.

지리산 바래봉 정상석에서 찍은 미니미(요정샷) 사진. 김진성 기자 paperk@ 지리산 바래봉 정상석에서 찍은 미니미(요정샷) 사진. 김진성 기자 paperk@

■팔랑치에서의 감동이 정상까지 이어지다

바래봉 중턱쯤 올라왔을까. 드디어 철쭉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활짝 핀 진홍빛 철쭉들이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며 반겼다. 바래봉 삼거리에 놓여 있는 물품보관대가 눈길을 끌었다. 이곳에서는 바래동 정상과 최고의 철쭉 군락지가 있는 팔랑치을 다녀올 수 있다.

정상에 오르기 전에 팔랑치로 발길을 옮겼다. 바래동 삼거리에서 팔랑치까지는 왕복 1.8km. 철쭉 최대 군락지의 모습이 궁금했다. 팔랑치에 접어들자 마자 등산로 양쪽으로 핀 철쭉이 반겼다. 그동안의 고생이 보상 받은 기분이었다. 평일인데도 많은 등산객들이 철쭉의 마지막을 담으려고 줄을 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진 촬영에 방해 되지 않게 걸음을 재촉하며 팔랑치 전망대로 향했다. 진홍빛 철쭉 사이에 간간이 모습을 드러낸 하얀철쭉은 백옥같이 선명했다. 팔랑치 전망대에 오르니 능선이 온갖 진홍빛으로 물들었다. 아직 만개하지 않는 꽃들이 있었지만 바래봉 최고의 철쭉 군락지다운 자태가 드러났다. 팔랑치 전망대에 오른 등산객들도 철쭉들의 향연에 넋을 잃은 모습이다.

바래봉 정상이 궁금했다. 오던 길을 되돌려 바래봉으로 향했다. 바래동 삼거리까지 되돌아가는 길은 또다른 매력이 있다. 팔랑치로 가는 길에 능선을 봤다면 되돌아가는 길엔 꽃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흰철쭉과 함께 있던 하얀꽃인 이팝나무도 눈에 들어왔다. 순백했다.

팔랑치의 감흥이 가시기 전에 바래봉 정상에 올랐다. 바래봉은 또다른 느낌이다. 철쭉이 능선을 타고 바래봉 정상까지 이어져 있다. 특히 진홍빛의 철쭉을 깔고 지리산 천왕봉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매력적이다. 바래봉에서는 천왕봉을 비롯해 중봉, 제석봉, 촛대봉, 형제봉, 토끼봉, 반야봉 등 지리산 주요 봉우리들을 감상할 수 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웅장한 지리산을 풍경을 바라보며 아주 작은 인간을 느꼈다.

바래봉 정상 부근 곳곳에서 철쭉을 배경으로 추억을 담으려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몸통은 없고 꽃들 사이에 등산객들의 얼굴만 가득하다.

바래봉 정상은 등산객들로 또 다른 줄이 생겼다. 정상석의 인증샷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정상석을 배경으로 요즘 유행하는 미니미 사진(요정샷)을 찍으려 사람들로 장사진이다. 정상석 뒤 10여m에 사람이 서면 사람이 요정처럼 작게 보인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진이다.

바래봉을 한걸음에 달려오게 만든 사진과 같은 장면은 아니었지만, 늦은 봄 진홍빛을 한껏 품은 철쭉을 볼 수 있었다는 게 행운이고, 감사하다.

하지만 하산하는 길은 그리 즐겁지 만은 않았다. “바래봉 철쭉이 옛날 같지 않아. 이렇게 듬성듬성하지 않았어, 얼마나 이뻤다고. 모든 게 기후 변화 때문이야” 바래봉 정상에서 만난 한 등산객의 말이 하산 내내 뇌리에 남았다.


김진성 기자 paper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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