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판결문, 무너진 삶을 일으켜 세우는 첫 문장
김성현 사회부 기자
“결코 여러분이 부족해서 이런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닙니다.”
2024년 1월 피해자 229명을 양산한 부산의 180억 원대 전세사기 사건 선고 직후. 부산지법 동부지원 형사1단독 박주영 부장판사는 준비해 온 종이를 꺼내 피해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시 그는 검찰 구형량인 징역 13년보다 더 무거운 징역 15년의 법정 최고형을 선고했다. 이후 그해 말 해당 판결은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지난달 부산에서는 또 다른 전세사기 사건에서 중형 선고가 나왔다. 부산지법은 무자본으로 빌라를 지어 전세사기를 벌인 혐의로 기소된 건축설계사무소 대표 A 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고 피해자 2명에게 4억 원에 가까운 배상을 명령했다. A 씨는 지난 2018년 연제구에 18가구 규모의 빌라를 준공한 후, 보증금을 돌려줄 능력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3년 5개월 동안 12건의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며 총 11억 원의 보증금을 가로챈 혐의를 받는다.
전세사기는 단순한 재산 범죄를 넘어선다. 특히 사회 초년생과 청년층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는다는 점에서, 삶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는 사회적 재난에 가깝다. 몇 년 전 부동산 가격 폭등 속에서 확산한 무리한 갭투자와 부실한 임대시장 관리, 허술한 제도는 전국에서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정작 법정에 선 피해자들이 가장 자주 느끼는 감정 중 하나는 의외로 ‘소외감’이다. 재판은 엄격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고 판결문은 법리 중심으로 작성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의 고통은 때로 ‘피해 금액’과 ‘양형 사유’ 몇 줄로 압축된다. 법정은 공정해야 하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건조해지기 쉽다.
이유가 있다. 실제 법조 기자가 접하는 다수의 판결문은 정형화된 문장 구조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판사 개인의 고민이나 문제의식이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다. 사건이 과도하게 몰린 현실 속에서 형사재판 역시 점점 처리 중심으로 흘러간다. 법관들 또한 수십 건의 사건을 소화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기계적인 판단으로 기울기 쉬운 구조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오히려 박 부장판사의 판결이 주목받았던 것은 단순히 형량 때문만은 아니었다. 피해자들을 향해 “여러분 잘못이 아니다”라고 직접 말한 장면은, 사법부가 피해자의 삶과 감정을 어디까지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특정 판사 개인의 ‘따뜻함’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왜 피해자의 고통을 언급하는 판결문이 특별하게 받아들여지는지, 왜 인간적 언어가 담긴 재판이 드물게 느껴지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자는 과거 박 부장판사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인상적이었던 건 의외로 그의 경계심이었다. 그는 “따뜻한 법관처럼만 비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형사사법절차는 어디까지나 엄격하고 공정해야 하며, 판사는 감정보다 법리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 말은 오히려 중요한 균형점을 보여준다. 사법부의 역할은 무조건적인 공감이나 감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법정은 냉정해야 하고 판결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다만 전세사기처럼 삶의 존엄마저 무너뜨리는 구조적 재난 앞에서는, 피해자를 단순한 사건 기록 속 객체로만 남겨두지 않으려는 사법부의 고민 역시 필요하다. 사법부가 보여줘야 할 것은 단지 엄한 형벌만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 판결문은 사건의 끝이 아니라, 무너진 삶을 다시 붙잡기 시작하는 첫 문장일 수도 있다.
김성현 기자 kks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