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흥도와 단종이 부러운 이유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영화 '왕과사는남자' 속에 묘사된 단종과 엄흥도의 모습. 부산일보DB
1600만 명을 넘는 관객몰이로 대한민국 영화사를 새로 쓴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성공한 영화다. 단종은 안방극장 사극에서는 단골 주인공으로 등장한 인물이다. 배우 이민우와 정태우, 심지어 여자배우인 윤유선까지 배역을 맡아 인상깊은 연기를 선보인 바 있다.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로는 1956년작 ‘단종애사’와 1963년작 ‘단종애사’가 있다.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세 번째 영화에 해당한다.
영화의 역대급 인기로 단종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이 관광객 러시로 들끓을 정도였다는 얘기들이 조금은 구문이 된 지금, 단종을 둘러싼 얘기를 새로이 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얘기는 사후 240여 년만에 왕으로 복위된 단종을 대중 앞으로 다시 불러 세운 일제 강점기의 두 소설가에게로 향한다.
영화 '관상'에서 묘사된 수양대군의 모습. 부산일보DB
■수양만이 할 수 있다?
소설가 김동인은 1941년 잡지 <조광>에 ‘대수양’이라는 제목으로 역사소설을 연재했다. 제목에서 보듯이 소설은 수양대군의 영웅적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설 속 수양대군은 부친인 세종대왕까지 능력을 인정하고 맏이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 할 정도로 뛰어난 위인으로 설정돼 있다. 반면 그의 형 문종은 유학의 원리원칙과 서적의 글귀에만 천착하는 문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김동인은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주살한 계유정난을 어린 조카 단종의 자리를 노린 동생 안평대군 일파의 쿠데타 음모를 사전에 알아채고 선제 진압한 것으로 묘사한다. 계유정난 이후 왕좌에 염증을 느낀 단종이 상왕을 꿈꾸면서 왕위에 오를 생각이 없으나 능력은 출중한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김동인이 수양대군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의도는 명확하다. 그는 일제 강점기 극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민족적 자존감이며 수양대군은 이 같은 민족적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의 표본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자칫 왕권이 흔들릴 수 있는 조선 초기에 탁월한 전략으로 나약한 왕을 대신해 왕권 확립을 해낸 것이 수양대군이었다는 분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이 같은 분석은 수양의 세조 등극 이후 벌어진 사육신의 난 같은 왕위 정통성을 둘러싼 동시대의 극한 반발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의 소설이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장면까지만으로 끝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 할 것이다.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에서는 사육신 사건을 처절하고도 서늘할 정도로 자세히 묘사한다. KBS <역사저널, 그날> 장면
■한때 왕이었던 소년의 몰락
소설가 이광수는 김동인에 앞서 1928년 말부터 1년여 동안 <동아일보>에 ‘단종애사’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연재했다. 역시나 제목에서 보듯이 이 소설은 단종의 슬픈 이야기를 절절하게 담고 있다. 할아버지 세종과 아버지 문종의 기대 속에 역대 어느 왕보다 단단한 정통성을 가지고 왕위에 오른 단종이 호랑이 같은 삼촌 수양대군과 정인지, 한명회, 신숙주(소설은 이 3명을 대표적인 간신이자 악인으로 묘사한다)의 간계로 쫓겨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다. 고명(顧命) 실국(失國) 충의(忠義) 혈루(血淚) 등 네 편으로 이뤄져 있다.
고명 편은 단종의 탄생과 세종의 총애, 세종 사후 문종의 등극과 문종이 임종하면서 신하들에게 단종을 돌봐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을 다룬다. 실국 편은 계유정난으로 알려진 수양대군의 쿠데타 장면으로서 수양대군 일파의 비열한 음모를 자세히 묘사한다. 충의 편은 사육신들이 상왕으로 쫓겨난 단종의 복위를 위해 안간힘을 쓰다 발각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내용이다. 사육신 일족이 손자까지 삼대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참혹함과 죽은 이들의 이름 하나하나까지를 지독히도 자세하게 다뤄 읽는 내도록 서늘함을 느끼게 한다. 혈루 편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된 뒤 영월로 유배를 갔다가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다룬다.
이광수는 일제 강점기에 단종애사를 통해 왕위를 잃은 단종과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을 동일시하고 단종 복위에 목숨을 건 사육신의 절개를 통해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려 한 듯하다. 단종애사의 내용 중에는 역사와 맞지 않는 부분도 다소 있지만 현재까지 소설의 내용이 독자들에게 단종 관련한 사실(史實)로는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이광수가 의도한 바가 김동인보다 적절했던 것으로 읽힌다.
부산 서구 부민동 임시수도기념관 모습. 비상시국에 한때 수도였던 부산의 흔적. 부산일보DB
■한때 수도였던 도시의 추락
여기서 잠시 김동인과 이광수의 소설 속 내용을 한 도시와 겹쳐서 바라보도록 하자.
단종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잇따라 세상을 뜨는 비상시국에 잠시 왕위에 올랐던 것처럼 전쟁이라는 비상시국에 대한민국 수도의 지위에 잠시 올랐던 도시가 있다. 바로 부산이다. 비상시국이 지나가자 수양대군을 영웅시함으로써 강력한 추진력을 토대로 한 효율성 극대화 움직임이 일었던 것처럼 전쟁이 끝나자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효율성 극대화 움직임이 곧장 이어졌다. 단종 복위 시도가 처절하게 무산됐듯이 수도권 버금자리라도 버텨보려던 부산의 시도도 철저히 무산돼 왔다. 그렇게 단종은 목숨을 잃었고 부산은 현재 소멸위기 도시의 반열에 올랐다. 김동인의 소설 대수양과 겹치는 부분은 강력한 추진력을 토대로 한 수도권주의의 득세라 하겠다. 반면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와는 임시수도였던 부산의 처절한 몰락 부분이 겹친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이광수 소설 단종애사의 혈루 부분을 영화화한 것이다. 혈루 편은 소설 전체의 10% 정도에 불과한 분량이다. 다른 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그 내용 속에서도 엄흥도에 대한 내용은 방치된 노산군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지냈다는 단 한 줄 뿐이어서 혹시라도 놓친 부분이 있는지 책을 다시 들춰 보게끔 한다. 영화는 그 한 줄에서 시작해 상상을 가미함으로써 수백년 만에 새로운 생명력을 얻은 단종을 관객들 앞에 생생하게 내보인 것이다.
단종과 비슷한 길을 걸어온 부산에겐 단 한 줄의 엄흥도 같은 씨앗과 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계기가 남아 있을까. 씨앗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이며 생명력은 누가 불어넣어야 할까.
다가오는 부산시장 선거에서는 그 답의 일단면이라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