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전쟁이 지운 문명
2001년 3월 세계 최대 규모의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석불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수도 카불에서 서쪽으로 125㎞ 떨어진 사암 절벽에 새겨진 석불은 불교 전성기였던 6세기 전후 만들어졌다. 당시 아프간을 통치하던 탈레반 군사정권은 불상이 우상 숭배 등 이슬람 교리에 어긋난다며 바미안 석불을 포함해 수많은 석불을 파괴했다. 국제사회 만류와 호소를 철저히 무시한 것이다.
2003년 이라크전 때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화재들이 폭격으로 파괴됐다. 또 치안 공백으로 약탈이 자행된 바그다드의 국립박물관에서는 함무라비 법전이 도난당했다. 이 과정에서 수메르 토기, 아시리아 대리석 조각, 정교한 설형문자가 새겨진 거대한 석판 등 인류 전체의 보물이 망가졌다. 2015년 시리아 내전 중 IS(이슬람국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팔미라의 고대 유적을 폭파했다. IS는 우상 타파와 체제 홍보를 명분으로 메소포타미아·로마·페르시아·비잔틴 등 문명 교류의 중심지였던 팔미라의 문화유산을 망가뜨렸다. 대표적 건축물로 1세기 말 축조된 벨 신전은 출입구 기둥만 남은 상태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으로 문화유산 피해가 늘고 있다. 이란 문화유산 당국에 따르면 공습으로 전국 130여 곳의 유적이 직접 타격을 받거나 충격파로 손상됐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최근 열린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회의에서 이란의 문화재 피해 조사 상황이 공유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이란의 베르사유’ 골레스탄 궁전의 경우, 군사 타격이 반경 100m 이내에서 벌어지면서 특히 피해가 컸다는 것이다. 반경 100~250m 거리에선 장식 요소에 중대한 손상이 생기거나, 창문과 문 등 접합 구조가 파손된 것으로 확인됐다. 청록색 타일과 모자이크 양식이 떨어진 ‘샤 모스크’의 사례처럼, 폭격에서 350m 떨어져도 충격파, 지반 진동 등 누적 충격에 따른 위험이 상존한다고 한다. 직접 폭격이 아닌 공습 여파로도 문화유산이 파괴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번 조사를 통해 밝혀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발생한 대규모 문화재 파괴를 계기로 1954년 체결된 헤이그 협약은 무력 충돌 시에도 박물관, 유적, 역사적 건축물 등에 대한 공격이나 군사적 이용을 금지한다. 미국, 이란, 이스라엘 모두 협약 당사국이지만, 이를 얼마나 지킬지는 미지수다. 전쟁은 생명과 삶을 파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류가 축적해 온 기억과 문명의 흔적까지 지워버린다. 문화재 복원이 급한 데 25일(현지시간) 열릴 예정이었던 미국과 이란의 2차 종전 협상이 또 무산됐다. 안타까운 일이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