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운신의 폭은 좁지 않다
김대현 연세대학교 글로벌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젠더·섹슈얼리티와 관련해 무언가 진보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꼭 따라붙는 말이 있다. 그렇게 시시콜콜히 뭔가를 제약해서 뭘 어쩌자는 거냐는 볼멘소리다. 물론 살인하면 안되고 성폭력 하면 안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제약이지만, 기본적으로 자기 운신의 폭을 제약당하는 일을 즐거워할 사람이 드문 것은 맞다.
일단 사람은 자기가 물려받은 문화적 전형에 전부 다 도전하고 살 수 없다. 그것은 여성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여성성의 전형이 어딘가 잘못 성애화돼 있는 것은 맞지만, 여성 당사자가 그 전형을 완전히 초탈하고 살기란 힘들다. 따라서 그 전형이 조금이라도 묻었다는 이유로 연애와 섹스를 완전히 거부하는 4B 운동이 의미있는 만큼, 그 전형을 어떻게든 활용하며 사는 여성 팝스타나 걸그룹을 그 전형에 부역했다고 몰아붙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런 문화적 전형과 젠더 구조를 개인의 탓이라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사회이론에서 구조의 강제와 개인의 창발이라는 오래된 이항대립을 몰고 온다.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사회문화 안에 불평등한 젠더 구조가 있는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 그 구조를 어찌 지적하고, 나아가 그것을 혁파하고 해체하기 위해 무얼 해야 하는가에서 각자의 견해가 갈린다. 거기서 말조심을 좀 하고 살자는 얘기는 그 수많은 갈래 중 극히 일부의 방침일 뿐이다.
젠더를 포함한 사회 구조는 개개인에게 습관과 무의식의 형태로 스며든다. 그렇기에 분명하게 죄를 물어야 할 명백한 가해의 경우가 아니라면, 남 인생을 두고 지금 너한테 구조 묻었다는 지적이 즐겁고 통쾌한 정동이어서는 안된다. 그 즐겁고 통쾌한 지적 가운데 나 또한 그 구조에 연루돼있다는 사실이 지워지기 쉽기 때문이다. 사회 구조에 따른 개인의 지분을 말할 때 죄와 책임을 서로 분리하는 까닭이 이것이다. 남의 죄를 묻는 일은 신나지만, 책임은 애초에 그것을 나 아닌 남에게만 묻기란 불가능하다.
새롭고 다르게 살려는 마음은 예쁘고 힘이 드는 일이다. 그렇기에 일견 새롭지도 다르지도 않게 살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까지 미워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그도 그 나름의 긴장 가운데 그 자리를 버티는 것이다. 그것은 싸우지 않거나 앞으로 나아가지 않겠다는 결심과는 다르다. 구조에 맞서는 개인의 전략에는 수천 수만 갈래가 있고, 새롭고 다르게 살려는 마음이 그중 어느 한 가지 색깔일 수는 없다. 구조의 불의를 인정하는 것과 개인이 예정된 행동을 따라야만 한다는 강박 사이에는 막대한 거리가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도전하고 살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 운신의 폭은 그렇게 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