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봄의 문턱, 보는 방식의 재탄생: 세잔을 생각하다
세잔, 병과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 1895. 시카고 미술관
3월 19일. 성모 마리아의 남편, 예수의 양부.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은 ‘침묵’의 성인, 그는 목수였다. 성 요셉의 축일에 폴 세잔을 떠올린다.
현대 회화의 개척자 세잔 역시 격렬한 선언도, 급진적 이론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당시 화단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 대신 고향 엑상프로방스에서, 묵묵한 노동처럼 같은 산과 사과와 탁자를 수없이 다시 그렸다.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말처럼, 마네가 회화의 ‘평면성’을 선언하면서 현대 회화의 출발점을 마련했다면, 세잔은 재현을 구조의 문제로 전환함으로써 이후 탈재현적 실험의 길을 열었다. 그전까지 회화의 과제는 캔버스 위의 대상이 실제‘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잔은 실제의 외형이 아니라, 실제가 지각 속에서 구성되는 방식을 그리고자 했다.
예컨대 식탁 위에 놓인 과일 바구니를 그리는 정물화에서 실제 우리 눈은 식탁과 그 위의 사물들을 한꺼번에 다 볼 수 없다. 왼쪽을 주목하면 다른 쪽은 보이지 않고, 또 과일 바구니 안쪽을 보려면 과일 바구니에 가까이 가서 위에서 보아야 한다. 세잔의 정물화는 이렇게 위치 이동을 통해 ‘다시점’에서 포착된 대상을 한 캔버스에 모아둔 것이다.
회화의 목적은 더 이상 모방이 아니다. 자연은 모사의 대상이 아니라, 지각이 형성되는 장이 된다. 철학적으로 이 변화를 가장 섬세하게 읽어낸 이는 메를로-퐁티였다. 그는 〈세잔의 회의(의혹)〉에서 세잔의 회화를 단순한 형식 실험이 아니라 ‘지각의 현상학’으로 해석했다. 우리는 세계를 본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세계를 끊임없이 구성한다. 세잔의 화면은 그 구성의 과정을 드러낸다.
세잔의 그림은 완성된 사물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보는 중인 상태’를 남겨 둔다. 흔들리는 윤곽, 불안정한 원근, 색의 긴장 속에서, 관람자는 실제처럼 보이는 캔버스를 소비하는 대신 지각의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때 회화는 눈앞의 풍경이 아니라, 보는 행위 자체를 사유하게 만드는 장이 된다. 그래서 세잔 이후의 회화는 자연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은 더 이상 외부에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주체와 세계가 만나는 지각의 구조 속에서 생성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전통적 재현 회화의 화면이 세계를 하나의 중심 시점에 고정시켰다면, 세잔의 구조적 화면은 세계가 지각 속에서 끊임없이 구성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그의 위대함은 격정이 아니라 반복에 있고, 영감이 아니라 구축에 있다. 그는 자연을 모방하지 않았다. 대신 자연을 보는 방식을 해부했다.
3월 19일, 성 요셉의 침묵을 떠올리며 세잔을 생각한다. 그가 남긴 ‘보는 방식의 변화’는 현대미술 전체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다. 그럼으로써 그는 현대 회화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오늘 우리가 세잔을 다시 읽는 이유도 여기 있다. 미술평론가·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