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벵갈호랑이’를 진짜로 만드는 ‘3인 1조’의 몸과 호흡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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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 공연 핵심 역할
리처드 파커 조종 퍼핏티어 9인

박재춘·김예진·임우영 팀 인터뷰
“하루 종일 호랑이 생각만 했어요”

15㎏ 호랑이에 숨 불어넣는 역할
“국내 인형극계 퍼핏티어 분수령” 

퍼핏티어 임우영, 김예진, 박재춘(사진 왼쪽부터). 에스앤코 제공 퍼핏티어 임우영, 김예진, 박재춘(사진 왼쪽부터). 에스앤코 제공
'라이프 오브 파이' 연습 장면. 에스앤코 제공 '라이프 오브 파이' 연습 장면. 에스앤코 제공

무대 위 벵갈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모습을 드러낼 때, 관객은 가죽과 금속, 로프와 막대기로 된 ‘퍼핏’(puppet, 인형)임을 알면서도 숨을 죽인다. 그 생동감 뒤에는 15㎏ 퍼핏을 3인 1조로 조종하는 아홉 명의 퍼핏티어가 있다. “하루 종일 호랑이 생각만 했어요.” 박재춘·김예진·임우영 팀의 ‘헤드’ 퍼핏티어 박재춘의 말처럼, 이들은 체력과 호흡을 갈아 넣어 ‘가짜’를 진짜로 만든다.

정교하게 디자인된 퍼핏에 숨을 불어넣는 이들은 소년 ‘파이’ 역의 배우 박정민, 박강현과 더불어 공연을 이끄는 또 하나의 핵심축이다. 이들은 리차드 파커를 비롯해 오랑우탄, 얼룩말 등 다양한 동물을 연기한다.

지난 7일 개막해 오는 15일까지 부산 드림씨어터 무대에 오르는 ‘라이프 오브 파이’ 한국 초연(부산일보 3월 2일 자 13면 보도) 부산 공연에 앞서 퍼핏티어 3인과 국내 퍼핏 디렉터 겸 협력 무브먼트를 맡은 정명필 감독 인터뷰를 가졌다. 이들은 한국 공연계에선 아직은 낯선 이름인 ‘퍼핏티어’라는 직업을 확실히 각인시키고 있다.

지난 6일 오후 퍼핏티어 박재춘, 김예진, 임우영 3인의 인터뷰가 끝난 뒤 드림씨어터 로비에서 '리차드 파커 퍼핏 무브먼트'를 시연 중인 임원, 강은나, 강장군 팀. 왼쪽은 국내 퍼핏 디렉터 겸 협력 무브먼트를 맡은 정명필 감독. 김은영 기자 key66@ 지난 6일 오후 퍼핏티어 박재춘, 김예진, 임우영 3인의 인터뷰가 끝난 뒤 드림씨어터 로비에서 '리차드 파커 퍼핏 무브먼트'를 시연 중인 임원, 강은나, 강장군 팀. 왼쪽은 국내 퍼핏 디렉터 겸 협력 무브먼트를 맡은 정명필 감독. 김은영 기자 key66@

세 팀 호랑이 각각 다른 개성

‘라이프 오브 파이’ 한국어 라이선스 공연에는 세 팀의 퍼핏티어가 있다. 무대에 오르는 호랑이는 한 마리지만, 그때마다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머리·심장·다리를 맡은 세 명의 호흡이다. 박재춘은 “한 팀은 디테일한 움직임 개발에 강하고, 다른 한 팀은 무대 장악력이 강력하며, 우리 팀은 에너지가 강한, 감각적인 팀”이라며 웃었다.

세 팀 모두 3인 1조 구조는 같지만, 리차드 파커의 기질과 호흡, 무게감 표현 방식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공연마다 관객이 보고 듣는 호랑이의 숨소리와 걸음걸이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다.

현재 세 팀의 조합은 오디션과 워크숍을 거쳐 만들어졌다. 퍼핏 디렉터 겸 협력 무브먼트를 맡은 케이트 로우셀과 정명필 등은 지원자 9명(기존 퍼핏티어 4명, 무용·연극 등 신규 5명)의 성향을 지켜보며 조합을 바꿔가며 ‘머리·심장·다리’를 나눴다. 처음에는 파트 구분 없이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모든 팀 조합을 테스트했고, 그 과정에서 성향이 맞는 사람끼리 팀이 굳어졌다고 한다. “우리 팀은 끝나고도 ‘심장’과 ‘다리’가 으르렁거릴 정도로 에너지가 세요.” 박재춘의 말이다. 정 감독도 “호랑이 울음소리조차 팀마다 다르다”며 세 마리의 개성을 강조했다.

'라이프 오브 파이' 연습 장면. 에스앤코 제공 '라이프 오브 파이' 연습 장면. 에스앤코 제공

오디션부터 ‘텐 투 텐’ 연습

오디션은 체력 훈련과 협동 워크숍이었다. 동물 자세로 버티기, 종이인형으로 팀 스토리 짜기 등 사흘간 지원자들의 본능을 끌어냈다. “체력이 안 되면 무게감을 표현 못 해요.” 정 감독의 지적처럼, 리차드 파커 한 마리는 약 15kg. 그중 머리만 5kg 정도다. 그걸 들고 버텨야 한다. 연습은 ‘텐 투 텐’이었다. 콜 타임은 오전 10시였지만, 퍼핏티어들은 한 시간 먼저 나와 몸을 풀고, 전날 장면을 복기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특히 케이트의 지침은 명쾌했다. “동물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동물적인 감각으로 생각하라.” 세 퍼핏티어는 퍼핏 없이 먼저 몸으로 호랑이를 만들며, 자유롭게 걸어 뛰며 호흡을 맞췄다. 영상 분석과 피드백, 즉흥 동작을 반복해 ‘반사적인 지각 반응’을 익혔다.

시야는 제한적이다. 심장을 맡은 김예진은 “땅이 제일 잘 보이고, 리차드 파커 머리를 보려면 고개를 들었을 때 목 근육이 움직이는 감각으로 방향을 읽는다”고 말한다. 다리를 맡은 임우영은 “호랑이 머리도, 파이도 잘 안 보인다”며 “심장 쪽과 헤드를 맡은 동료의 발과 손 움직임만이 유일한 신호”라고 설명한다. 그만큼 세 사람의 호흡과 신뢰가 곧 호랑이의 생명이다. 박재춘은 “에너지 교류가 없으면 안 된다”며 세 사람의 믿음을 꼽았다.

'라이프 오브 파이' 연습 장면. 에스앤코 제공 '라이프 오브 파이' 연습 장면. 에스앤코 제공

무대 위에서 달라진 몸과 감각

서울 공연 3개월 만에 이들의 몸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푸시업 하나도 힘들어하던 임우영은 “이제는 무릎을 떼고 2~4개까지는 거뜬히 한다”며 웃는다. 몸 전체의 코어가 발달하면서, 조금만 눌러 봐도 서로의 몸이 “딴딴하게 느껴질 정도”로 변했다는 게 동료들의 증언이다.

신체 감각도 예민해졌다. 호랑이 안에서 서로의 숨을 죽이며 호흡을 맞추다 보니, 옆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도 즉각 반응하게 되었다. 김예진은 이를 “동물적인 감각이 생긴 것 같다”고 표현한다.

무대 위에서의 감정 감각도 변한다. 그날그날 컨디션과 에너지 상태를 몸으로 먼저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처럼 무대 위에서 쌓인 믿음과 감각이 커질수록, 호랑이의 눈빛과 숨, 움직임은 더 섬세해진다.

세 사람은 좋아하는 장면도 각자 다르다. 파이가 배 위로 올라오려 할 때 처음 으르렁대는 장면, 파이에게 기대 누워 있는 장면, 밤하늘의 별이 뜨는 장면 등이다. 특히 별 장면에서 별 퍼핏을 맡기도 하는 김예진은 “별빛이 관객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걸 보고, 무대와 객석이 한 공간에서 같은 별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

지난 7일 오후 7시 부산 드림씨어터 공연 캐스팅 보드 일부. 소년 파이 역의 박정민 배우 이름 옆으로 벵갈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퍼핏티어 9명의 얼굴과 이름이 나란히 올라와 있다. 김은영 기자 key66@ 지난 7일 오후 7시 부산 드림씨어터 공연 캐스팅 보드 일부. 소년 파이 역의 박정민 배우 이름 옆으로 벵갈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퍼핏티어 9명의 얼굴과 이름이 나란히 올라와 있다. 김은영 기자 key66@

퍼핏티어, 공연계의 새 위치

정 감독에게도 ‘라이프 오브 파이’는 특별하다. “저도 책과 영화를 봤지만, 이 공연의 장점은 장면 장면이 영화처럼 느껴지면서도, 무대 위 모든 배우가 퍼핏티어가 되는 순간들이 많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배의 잔해를 옮기고, 리프트 각도를 바꾸고, 조명과 영상이 틀어지며 배가 회전하는 장면에서, 배우들은 몸으로 배와 파도를 만들어낸다. 퍼핏티어 9명뿐 아니라 전 출연진이 퍼핏과 함께 움직이는 구조다.

정 감독은 “퍼핏티어라는 호칭이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쓰인 건 3년 남짓”이라고 짚는다. 이전에는 인형극 연출이나 배우로 뭉뚱그려졌던 역할이, 이번 작품을 계기로 캐스팅 보드에 다른 배우들과 나란히 이름을 올리게 됐다. 커튼콜에서도 동료 배우들이 “박수는 퍼핏티어가 더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무게감 있는 포지션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라이프 오브 파이’가 인형극·퍼핏 장르에 하나의 획을 그은 작품”이라고 말한다. 세 사람이 함께 조종하는 리얼리즘 퍼핏을, 이만큼 정교하게, 이만큼 주목받는 규모로 선보인 사례는 국내에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국내 인형극계는 이 작품 전과 후로 나뉠 것”이라고까지 표현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 공연 스틸. 에스앤코 제공 '라이프 오브 파이' 공연 스틸. 에스앤코 제공

나에게 퍼핏이란…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은 세 퍼핏티어에게 “나에게 퍼핏이란 무엇인가”였다.

박재춘은 “공연을 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꿈꾸는 그림과 환상을 구현해 줄 수 있는 매개체”라고 답했다. 사물에 손이 닿는 순간 어떤 것이든 살아나 움직일 수 있고, 무대에 올려졌을 때 배우의 몸과는 또 다른 믿음을 관객에게 줄 수 있다는 점에 매료돼 20년 가까이 ‘인형인’으로 살아왔다. 임우영은 “호흡”이라고 했다. 퍼핏에 숨을 불어 넣고, 자기 호흡과 퍼핏의 호흡을 계속 맞춰야만 퍼핏이 살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퍼핏을 처음 만난 김예진은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숨 쉬게 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했다. 자신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다른 존재를 통해 감정과 이야기를 전달하는 경험이 처음이자 강렬했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서 이들은 드러나지 않는다. 가면과 구조물에 가려지고, 커튼콜에서도 호랑이가 더 많은 환호를 받는다. 그럼에도 이들은 말한다. “관객이 호랑이를 진짜라고 믿고 숨을 함께 쉬어주는 순간, 퍼핏티어는 사라져도 좋다”고.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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