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으로 깨친 인간과 사랑’…2월 부일시네마 ‘타인의 삶’
영화 ‘타인의 삶’ 포스터. (주)라이브러리컴퍼니 제공
영화를 사랑하는 <부산일보> 독자를 극장으로 초대하는 ‘BNK부산은행과 함께하는 부일시네마’(이하 부일시네마) 올해 두 번째 상영회가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24일 오후 7시 부산 중구 신창동 ‘모퉁이극장’에 모인 관객 70여 명은 영국 BBC 선정 ‘21세기 100대 영화’에 오른 ‘타인의 삶’(2007)을 관람했다.
‘타인의 삶’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기 5년 전인 1984년을 배경으로 한다. 동독의 국가보위부 비밀경찰 비즐러(울리히 뮤흐) 대위는 당대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세바스티안 코치)과 그의 연인인 스타 배우 크리스타(마르티나 게덱)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는다.
베테랑 비밀요원인 비즐러는 고문과 강압수사를 서슴지 않는 냉혈한이다. 사회주의 독재정권의 하수인답게 자유나 인권 따윈 안중에 없는 그는 드라이만을 철저히 도청하고 감시한다. 그러나 비즐러는 드라이만에 대한 어떠한 혐의점도 찾지 못하고, 오히려 자유와 예술의 가치를 깨달아 마음에 변화가 생긴다.
영화는 ‘타인의 삶’을 관찰하다가 가치관이 서서히 변하는 비즐러의 모습을 통해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인간성의 회복, 사랑, 정의 등 인본주의적 가치를 역설하는 스토리가 인상적이다. 독일 현대사를 다룰 때 빠지지 않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메시지도 담겼다.
서스펜스적 요소도 놓치지 않았다. 국가보위부와 비즐러,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대립 구도를 뒤섞어 긴장감을 부여하며 첩보물 특유의 장르적 재미를 잡았다.
영화 ‘타인의 삶’ 스틸컷. (주)라이브러리컴퍼니 제공
‘타인의 삶’은 영화계에서 작품성을 널리 인정받았다. 2007년 제79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으며, 영국 BBC 선정 21세기 100대 영화에서 32위를 차지했다.
영화엔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주인공 비즐러 역을 연기한 울리히 뮈에는 인간 내면의 갈등을 뛰어난 연기력으로 그려내 여러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지만, 이듬해인 2007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이날 영화 상영 뒤에 관객끼리 감상을 공유하는 시간인 ‘커뮤니티 시네마’가 진행됐다. 대구 최초 독립영화전용관인 ‘오오극장’ 설립에 참여한 권현준 커뮤니티시네마네트워크 사회적협동조합이사장이 모더레이터로 나섰다.
권 이사장은 “이 영화를 세 번째 본다”며 “비즐러라는 캐릭터가 극을 전반적으로 이끌어가는데, 그가 인간성을 회복하는 과정들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고 평했다.
관객들도 대체로 인간성이라는 메시지와 비즐러의 변화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한 관객은 “내가 비즐러와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며 봤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뜻 깊은 영화였다”고 감상을 밝혔다.
또 다른 관객도 영화가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직장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관객은 “언제부턴가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일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데, 그렇게 하다간 극 초반의 비즐러, 혹은 아이히만(나치 정권 유대인 학살 총책임자)이 될 수 있지 않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선악을 구분하는 것이 무엇인지 되새김질하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온 관객도 있었다. 이 관객은 “갑작스레 친구가 티켓을 구해준 덕에 상당히 좋은 영화를 보게 됐다”면서 “개인의 신념과 원칙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제 인생에 깊게 투영해봤다. 마지막 장면이 울림을 줬고, 다음에 다시 보고 싶은 영화”라고 말했다.
한국의 근현대사와 ‘내란’에 대한 언급도 나왔다. 한 관객은 일제강점기와 분단에 이어 얼마 전 내란까지 겪은 한국의 역사가 독일의 현대사와 닮았다면서 “영화에서처럼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국민이 많은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이 밖에도 “이렇게 눈물 나게 만드는 영화인 줄 몰랐다. 집에 가서 한 번 더 보고 싶은 영화다” “상당히 많은 생각이 드는 영화” “간만에 본 수작” 등 관객들의 호평이 이어졌다.
소감을 모두 들은 권 이사장은 영화가 결국 도덕적 기준을 이야기한다고 설명했다. 영화 속 주요 장치로 등장하는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라는 곡은 독일어로 직역하면 ‘선한 사람을 위한 소나타’다. 극 중 대사에도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이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권 이사장은 “결국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은 인간 내면의 양심이다. 그것을 발현하게 하는 예술의 힘이 크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영화에서 제일 무섭게 그려지는 것이 검열이다. 그로 인해 예술가들이 자기검열을 한다”면서 “두려움 없이 창작하자”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발언을 인용했다.
최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2025)로 6관왕을 차지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수상 소감 중 “진정한 자유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 두려움 없이 뭔가를 만들어내자”는 취지로 말한 바 있다.
권 이사장은 이 발언을 관객에게 소개하면서 “우리 모두가 양심에 따라서 자유롭게 무언가를 창작하고 향유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커뮤니티 시네마가 마무리된 뒤 인상적인 소감을 남긴 관객 5명에겐 랜덤 포스터가 경품으로 지급됐다.
BNK부산은행이 후원하는 부일시네마는 매월 마지막 주 화요일 오후 7시 모퉁이극장에서 열린다. 부산닷컴(busan.com) 문화 이벤트 공간인 ‘해피존플러스’(hzplus.busan.com)에서 관람을 신청할 수 있다. 참가자를 추첨해 입장권(1인 2장)을 준다.
내달 상영작은 청룡영화상이 주목한 독립영화 ‘너와 나’(2023)이다.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