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 낙수효과 놓칠라… 기자재 연구·실증 거점 절실” [커버스토리]
조선업 호황 이면, 조선기자재업체의 불안감
조선 3사, 수주 잔고 135조 원
고부가가치 선종 위주로 몰려
대기업 핵심 기술 내재화 강화
미 해군 함정 MRO 시장도 열려
지역 기자재 업체 기술력 보강
친환경·디지털 전환 플랫폼 필요
그래픽=류지혜 기자 birdy@·클립아트코리아
한국 조선업이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과 같은 고부가가치 선종을 중심으로 역대급 수주 호황을 누리고 있다. HD한국조선해양,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등 대형 조선 3사의 수주 잔고는 이미 135조 원을 돌파하며 2028년까지의 먹거리를 확보한 상태다. 하지만 화려한 호황의 이면에 부산의 주력산업인 조선기자재업계의 불안은 커지고 있다. 지역 조선기자재업체들은 “이 상태로는 조선업 호황의 낙수효과를 제대로 누리지 못할 지도 모른다”며 이를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친환경, 스마트 조선기자재를 연구개발(R&D)하고 실증할 수 있는 ‘친환경·스마트 조선기자재 협동화단지’를 부산연구개발특구 단지에 마련해 달라고 부산시에 요청한 상태다.
■고부가가치선이 만든 양극화
최근 조선업계의 수주 행보는 눈부시다. HD한국조선해양이 미주 선사와 1조 5000억 원 규모의 LNG 운반선 건조 계약을 체결한 것을 비롯해, 한화오션과 삼성중공업 역시 수주 랠리를 이어가고 있다. 올해 전 세계 LNG 운반선 발주량은 115척에서 최대 150척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이러한 낙수효과가 지역 기자재업체들에 고르게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역 조선기자재업계에서는 현재의 상황을 ‘K자형 양극화’로 진단한다. 현재 조선업계 수주의 핵심은 LNG 운반선 등 고부가가치선 수주인데 그 안에 들어가는 핵심 기자재를 납품하는 업체와 범용 기자재를 만드는 업체의 희비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기자재업계 한 관계자는 “자동차로 치면 차량용 룸미러를 만드는 곳은 수소차든 내연기관차든 큰 차이가 없는 상황과 다르다”며 “고부가가치선이라고 해서 모든 부품의 단가가 오르는 것이 아니기에, 핵심 기술이 없는 업체들은 여전히 낮은 가동률에 허덕이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 조선기자재업체들이 많이 분포해 있는 녹산국가산업단지의 체감 경기는 대형 조선소의 활기와는 대조적으로 냉랭한 수준이다. 한국산업단지공단에 따르면 녹산국가산업단지의 지난해 3분기 가동률은 73.3%에 불과하다. 이는 전국 평균 가동률 84.2%를 하회하는 수치다.
■대기업 ‘기술 내재화’와 글로벌 경쟁
또 다른 위협은 대형 조선사들의 ‘내재화’ 움직임이다. 대기업들이 핵심 기자재를 직접 생산하거나 수직 계열화를 강화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 지역 중소 기자재업체들의 불안은 더 커지고 있다. 여기에 대형 조선소들이 인건비 절감과 현지 수주 대응을 위해 필리핀 수빅, 베트남, 미국 필리조선소 등 해외 생산 기지를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점도 지역 업계에는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최근 지역 기자재업계가 가장 주목하는 기회는 미 해군 함정의 유지·보수·정비(MRO) 시장이다.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이미 미 해군 함정 정비 사업을 수주하며 물꼬를 텄고, HJ중공업 역시 미 해군 보급체계사령부(NAVSUP)와 함정정비협약(MSRA)을 체결하며 미 해군 함정 정비 사업을 본격화했다. 정부 역시 2030년까지 전문인력 2000명 양성을 공언했다. 이 때문에 조선기자재업계 역시 MRO 시장 진출의 수혜를 볼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MRO 사업은 기존 신조 사업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수시로 발생하는 정비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물류 창고와 전용 수리 부지, 그리고 고도의 정밀 부품 가공 설비가 뒷받침돼야 한다.
부산의 기자재업체들은 조선소의 해외 진출, MRO 등 낙수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한편으로 대형 조선사나 해외 기자재업체가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인 기술력이 요구되는 순간이 곧 찾아올 것으로 예상한다. 당장 MRO 사업만 하더라도 기존 MRO 사업을 선점하고 있는 일본, 싱가포르 업체들과의 기술 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R&D와 실증을 위한 물리적 공간이 필수적이다. 조선기자재업계는 친환경·디지털 전환에 대응하기 위한 ‘연구·실증 거점’ 육성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친환경, 디지털 규제 넘어야 한다
조선기자재업계가 요구하는 ‘친환경 스마트 협동화단지’는 단순한 부지 마련의 의미를 넘어서야 한다. 이곳은 친환경 연료(LNG, 암모니아, 수소) 추진선용 기자재 R&D, 스마트 자율운항 선박 부품 실증, 미 해군 MRO 대응 물류 및 정비 거점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중소 기자재업체들이 개별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환경 규제와 디지털 전환을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한 ‘협업 플랫폼’이 필요하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지역 조선기자재업체 한 대표는 “대형 조선소들은 이미 2028년치 물량을 다 채우고 도크 가동률이 100%를 넘었다고 하지만, 우리 같은 기자재업체들은 미래를 준비할 공간이 부족해 수주 기회를 놓치고 있다”며 “지역 조선기자재업체들이 기술 격차를 만들 수 있도록 거점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병진 기자 joyfu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