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보행자의 죽음을 학습하지 않는 사회

이대성 기자 nmak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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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성 사회부 차장

복잡한 우회전 통행법에 혼란 가중
사고 예방은커녕 사고 위험만 키워
계속되는 죽음은 '심각한 사회 문제'
2년 넘게 실효 없는 통행법 개선을

횡단보도를 걸을 땐 주위를 두리번대는 습관이 생겼다. 달리는 자동차를 믿기 어려워 생긴 경계심이다. 잊을 만하면 발생하는 뉴스 속 횡단보도 보행자 사망 사고에 언제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졌다.

지난 7월, 회사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20대 딸을 잃은 어머니였다. 딸은 올해 5월 울산공항 인근 횡단보도에서 우회전하는 시내버스에 치여 숨졌다. 녹색 보행 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던 딸을, 우회전 일시 정지 의무를 어긴 버스가 덮친 것이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딸은 특수교사 꿈을 이뤄 울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일했다. 올해 12월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사고 기사 몇 줄로만 남아 버린 딸을 이렇게 하늘로 떠나 보내기엔 너무나 억울하다”며 “더 이상 허망한 죽음이 없어야 한다”고 울먹였다. 그러고는 국회 국민동의 청원 게시판에 ‘우회전 일시 정지 위반에 따른 보행자 사망사고 재발 방지를 위한 법률 제정에 관한 청원’을 게시했다며, 언론의 관심을 간절히 부탁했다. 사고만 없었다면 딸은 아름다운 12월의 신부가 됐을 터였다.

뉴스를 검색해 보면, 우회전 차량에 의한 보행자 사망 사고는 줄을 잇는다. 지난 8일 경기 안양시에서는 보행 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던 초등학생이 우회전하던 통학버스에 치여 숨졌다. 지난 9월 29일에도 경남 창원시에서 보행 신호를 따라 횡단보도를 건너던 20대 여성이 덤프트럭에 치여 생명을 잃었다.

보행자들이 무엇보다 안전해야 할 횡단보도에서 안타깝고 허망한 사고가 잇따르며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됐지만, 그 원인을 운전자의 부주의로만 치부하기에는 뭔가 개운치 않다. 보행자 보호를 강화하겠다며 개정된 법이 현실과 괴리돼, 오히려 운전자와 보행자의 혼란을 키우고 보행자 안전을 위협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22년 7월 개정된 도로교통법은 우회전 차량의 보행자 보호 범위를 ‘통행하고 있을 때’에서 ‘통행하려는 때’로 확대했다. 2023년 1월부터는 전방 차량 신호가 적색이면 우회전 차량은 반드시 횡단보도 앞에서 일시 정지해야 한다. 도로 접속 지점에 횡단보도를 설치할 수밖에 없는 교통 신호와 도로 체계를 감안해, 우회전 시 발생할 수 있는 보행자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복잡한 우회전 방식은 운전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사고 예방 효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법 시행 이후 부산에서 발생한 우회전 차량 사고 건수와 인명 피해가 오히려 늘었다는 언론 보도도 있었다.

실제로 우회전 시 운전자가 고려해야 할 상황은 지나치게 많다. 횡단보도가 몇 개인지, 각 횡단보도에 어떤 신호가 들어오는지, 보행자가 있는지, 걸으려는 움직임이 있는지, 녹색 화살표 신호가 있는지 등 경우의 수가 끝도 없다. 바뀐 법이 시행된 지 2년여가 지났지만 이를 정확히 숙지하고 지키는 운전자가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특히 보행자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라도 길을 건너거나, 건너려는 보행자가 있으면 차량이 반드시 일시 정지해야 하지만, 이를 아는 운전자도 거의 없다. 전문가들까지 나서 규정 간소화를 지적하는 이유다. 보행자 보호와 교통 흐름을 동시에 고려하다 보니 현장과 동떨어진 ‘기형적 규정’이 만들어진 셈이다.

그럼에도 경찰은 법 개정 초기 일시적 계도와 홍보에 그쳤고, 복잡한 규정을 현장에서 정착시키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은 부족했다. 강력한 단속에 나서기가 부담스럽다면, 꾸준한 계도라도 필요함에도 말이다. 2년 넘도록 달라진 우회전 통행법이 현장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면, 이제는 실효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받아들이고, 복잡하고 난해한 우회전 통행법을 간단하고 명료하게 바꿔야 한다.

우회전 차량이 차량·보행 신호와 관계없이 횡단보도 앞에서 무조건 일시 정지하도록 하고, 횡단보도에 보행 신호가 들어와 있거나 보행자가 있는 경우, 보행 신호가 끝나거나 보행자가 길을 다 건널 때까지 차량이 무조건 멈춰 있도록 하면 운전자의 혼란이 줄고, 보행자 사망 사고도 줄일 수 있다. 교통 흐름에 영향이 있겠지만, 생명보다 중요한 건 없다.

미국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후배는 미국의 우회전 방식이 우리나라와 너무 달라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우회전 도로에서 빨간색 스톱(STOP) 교통 표지판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 표지판 앞에서 3~5초가량 멈춰 서 있지 않으면, 경찰이나 단속 카메라에 적발돼 꽤 많은 벌금을 문다고 했다. 3~5초가 보행자의 생명을 지키는 ‘골든 타임’인 셈이다. 우리 사회와 정부도 더 늦기 전에 횡단보도 위 안타까운 죽음들로부터 소중한 생명을 지키기 위한 해법을 찾아야 할 때다.


이대성 기자 nmak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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