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북극항로 개척은 공급망 재편과 실리 외교가 핵심
이성우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선임연구위원
새 성장 동력 되려면 수요 창출부터
전쟁 중에도 서방 기업 러시아 교류
에너지·광물 자원 공급망 재편 기회
동남권 산업과도 긴밀한 연관성
한-러 외교·비즈니스 복원해야 할 때
신정부의 주요 국정과제 중 하나인 북극항로 개척 사업이 우리나라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공급이 아닌 수요 창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는 단순히 항로를 ‘개척’하는 것을 넘어, 이 항로를 ‘이용할’ 실질적인 필요성을 만들어내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현재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3년 반을 넘기며 국제 정세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미국, 유럽연합(EU), 그 외 여러 나라 및 국제단체들이 러시아에 여러 제재를 가했으며 우크라이나에 인도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한국도 대러 제재에 동참했다. 지난 7월 18일 EU가 발표한 18차 대러 제재는 러시아 에너지와 금융 분야를 겨냥했으며, 특히 중국 은행 2곳이 포함되었다. 이는 중국이 글로벌 대러 제재와 무관하게 러시아와의 무역을 지속해 왔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2024년 북극항로를 통한 국제 화물의 99.2%가 러-중 간 운송이었으며, 대부분 러시아 자원을 중국으로 운반하는 경우였다. 그러나 이번 EU의 18차 제재에서 획기적으로 강화된 조항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트럼프 행정부가 러시아산 원유 수입국에 100% 관세 부과를 언급했지만, 최대 수입국이 중국인 상황에서 복잡한 미중 관계를 고려할 때 실행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흥미로운 사실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 시장에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기업들이 제재를 주도한 미국과 EU 국적 기업들이라는 점이다. 더 인사이드가 발표한 2023년 러시아 최대 매출 15대 기업 중 미국이 필립모리스, 씨티은행, 카길 등 7개사였고, 독일 2개사 그리고 나머지도 일본과 유럽계 기업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철수를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경쟁자가 줄어든 틈을 타 시장 점유율을 확대한 것이다. 또한 2022년 12월~2025년 6월까지 러시아의 석유제품 수입국 순위는 튀르키예 26%, 중국 13%, 브라질 12%이며, LNG는 EU 51%, 중국 21%, 일본 15%였다. 반면 국제 평화라는 명분 하에 성실히 제재에 동참한 한국은 북방 외교에 균열이 생기고 북방 비즈니스가 축소됐다. 결국 중국은 물론 미국과 EU마저 러시아와 비즈니스를 지속한 가운데, 한국만이 실질적 손해를 감수한 셈이다.
장기화된 전쟁으로 인한 피로감 속에서, 종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각국은 전후 복구와 관계 정상화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만약 전쟁 종료 후에야, 한국이 러시아와의 협의를 통해 북극항로 개척에 동참하겠다고 의사를 표명한다면, 러시아가 전쟁 기간에도 꾸준히 관계를 유지해 온 중국이나 실리를 챙긴 서방 기업들 대신 한국을 우선적으로 대해줄 이유가 없다. 따라서 북극항로 개척은 러시아와의 외교 및 비즈니스 복원과 병행되어야 한다.
북극항로 수요 창출을 위해 우리나라의 편중된 에너지, 광물 자원 등의 공급망 재편이 선행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원유 의존도에서 중동이 71%를 차지하며, 이 중 68%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2024년 1월 블룸버그 이코노미스트는 대만해협에서 전쟁 발생 시 한국의 GDP가 23.2%나 감소하여 당사국인 중국(17%)보다 높은 충격을 받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수출입 화물이 대만해협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나라가 북극항로를 병행 이용하고 있었다면 이러한 충격은 훨씬 완화되었을 것이다.
현재 중국이 북극항로를 이용해 주로 수송하는 화물이 에너지, 광물자원인 것처럼, 우리나라도 자원 공급망에 북극권을 포함시켜 북극항로 개척의 기본적인 수요를 창출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러시아는 기초 산업 위주, 우리나라는 응용 산업 위주로 발전하여 산업구조 측면에서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이제 명분보다는 실효적 이익에 초점을 맞춰 러시아와의 북방 외교와 비즈니스를 복원해야 할 시점이다. 이를 통해 러시아와의 신규 수요 창출이 동반되어야만 북극항로 개척이 공허한 구호가 아닌 실질적인 성과를 낼 수 있다. 나아가 북극항로 개척과 연계된 수요는 우리나라 동남권 지역의 물류, 석유화학, 조선, 철강, 방위, 식품산업 기반과 높은 연관성을 가진다. 이는 지역 균형 발전에도 북극항로 개척이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궁극적으로 북극항로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무역로로 상용화될 때, 우리나라가 그 주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