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거슈윈, 경계에 선 음악
음악평론가
1937년 초에 거슈윈(George Gershwin, 1898~1937)은 어디선가 고무 타는 냄새가 난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이어 두통과 환각 증상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의사들은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 문제라고 진단했고, 나중에서야 그것이 뇌종양인 줄 알아냈다. 그해 여름인 7월 9일에 거슈윈은 악보 작업을 하다가 쓰러져서 혼수상태에 빠졌다. 3일 후인 7월 11일에 종양 제거 수술을 받지만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불과 39세의 삶이었다.
거슈윈이 활동하던 시대는 1·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있었고, 금주법 시대와 대공황 시대가 겹치는 격동기였다. 그리고 음악사적으로 보면 재즈가 탄생한 시기이기도 했다. 역사 속에서 항상 소수자이던 유색인종의 음악이 주류 사회에 들어오는 때였다. 거슈윈은 백인이지만 그 역시 러시아 유대계의 피를 받은 이민자의 자식이었다.
거슈윈은 자신의 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음악은 그 시대와 사람들에 관해 얘기해야 한다. 내게 있어 사람들은 미국인이며 나의 시대는 현재다.” 그는 자신이 처한 시대와 주위 사람의 정서를 대변하는 음악을 만들기로 마음 먹었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재즈였다. 재즈와 클래식의 결합을 통해 정말 미국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 했다.
거슈윈은 15세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서 브로드웨이 근처의 작곡가와 출판사들이 모여있는 지역, 이른바 ‘틴 팬 앨리’(Tin Pan Alley)로 갔다. 음악 출판사에 피아노 주자로 취직한 그는 파퓰러 음악 작곡가 생활을 시작했다. 거슈윈이라는 이름이 유명해진 첫 번째 곡은 21세에 작곡한 노래 ‘스와니’다. 이 곡의 악보가 백만 장 이상 팔리면서 그의 인생은 역전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냈다. 1924년 화이트먼의 밴드를 위해 작곡한 ‘랩소디 인 블루’가 엄청난 히트를 거두면서 그의 이름을 미국 전역에 알렸다. 이어 ‘피아노협주곡 F장조’가 호평을 받았고, 관현악곡 ‘파리의 미국인’으로 인기를 더했다. 그는 미국 사교계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1931년엔 ‘그대를 위해 부르리’라는 뮤지컬로 퓰리처상을 받았고, 1934년엔 오페라 ‘포기와 베스’를 작곡하여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졌다.
오늘 소개하는 ‘3개의 전주곡’은 원래 쇼팽이나 쇼스타코비치처럼 24개로 된 전주곡 세트로 계획했던 곡이다. 그러나 바쁜 일정 때문에 이어가지 못하고 1926년에 3개로 묶어 출판했다. 비록 짜임새 있는 세트는 아니지만, 거슈윈이 접목하고 싶어 한 블루스의 모티브와 재즈의 기운이 넘쳐흐른다. 피아노뿐 아니라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등 다양한 악기로 편곡 연주되는 곡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