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진규의 법의 창] 해사법원은 부산에 설치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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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정인 변호사

영·미·중, 해사법원 운영 해양주권 강화
선박 충돌 사고 등 일반 법원 처리 한계
부산, 동북아 해양 분쟁 중재 허브 도약을
정부 정책 결단·시 전략적 실행력 갖춰야

2021년 3월 23일, 세계 물류의 심장이라 불리는 수에즈운하에서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기븐’(Ever Given)호가 강풍과 항로 오류 등으로 인해 운하의 남쪽 구간에서 좌초된 것이다. 선체 길이만 약 400m에 달하는 이 선박은 약 6일 동안 수에즈운하를 완전히 막아 세계 무역의 12%에 해당하는 항로를 마비시켰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약 1200척 이상의 선박 운항이 지연되면서 하루 약 100억 달러(약 13조 원)에 이르는 무역 손실이 발생했다고 한다. 사고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집트 수에즈운하관리청(SCA)은 선주 측에 약 9억 달러(약 1조 2000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선박과 선원을 억류하며 국제적 분쟁이 발생했다.

결국 사건은 국제해사법과 보험, 선박책임제한제도, 그리고 국가 간 협상력 등이 얽힌 복잡한 소송전으로 비화되었다. 이 사건을 접하면서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한국 해역에서 발생하면, 우리는 법적으로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가?”

해상사고 및 관련 분쟁은 기술적 요인뿐 아니라 국제법, 보험, 선주와 용선자 간 계약, 그리고 국제적 중재 시스템까지 총체적으로 작동해야 해결되는 분야다. 따라서 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해사법원’(Maritime Court)이 필수이다.

해사법원은 선박사고, 해양오염, 해상운송계약, 선박저당권, 해양보험, 선원노동, 국제해양분쟁 등을 전문적으로 심리하는 해양 분야 특화 법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사건들이 일반 민사 법원 또는 일부 지방법원에서 처리되고 있지만, 선박 충돌이나 해상 화물 손상 등의 기술적·국제적 특성이 강한 분쟁을 일반 법관이 처리하기에는 신속성이나 전문성 등에 한계가 있다.

국제적으로는 이미 영국, 미국, 중국 등 해양 강국들은 해사법원을 운영 중이다. 예컨대 중국은 상하이에 국제해사법원을 설치, 운영해서 법적 ‘해양주권’을 강화하고 있다. 해사법원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법원 이외에도 해운·보험 전문가, 선박 기술 감정인, 해양법 전공 법관, 국제 중재 경험자 등 복합적 인프라도 필요하다. 이는 국가의 해양 법률 중심지로의 전략적 선택이 요구되는 일이다.

부산은 단연 대한민국 해양산업의 중심지다. 세계 6위 컨테이너항만, 한국 최대의 선박 출입항 기록, 그리고 수많은 선박회사, 해운중개사, 해양금융기관이 모여 있다. 부산에는 이미 해양대학,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한국선급 등 기관이 존재하고, 국제 중재센터까지 들어서며 제한적이나마 해양 분쟁 해결의 플랫폼이 마련되어 있다.

정부는 해양수산부를 부산으로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부산시민의 한 사람으로 환영할 일이다. 행정 중심(해수부)과 사법 중심(해사법원)이 같은 지역에 위치하게 되면 해양 정책 수립과 해양 분쟁 해결이 훨씬 유기적이고 신속해질 수 있다. 더 나아가 부산은 북극항로 시대를 맞아 동북아 해양 분쟁의 중재 허브로 도약할 수 있는 지리적, 산업적, 국제적 이점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를 통해 부산은 단지 국내 해양 사건을 처리하는 수준을 넘어, 국제 해사 사건을 유치하고 중재하는 ‘국제 해양법 수도’로 성장할 수 있다.

정부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정책적 선언과 그 뒷받침을 해야 하고, 국회는 해사법원 설치에 필요한 입법적 지원을 해야 한다. 지방정부의 노력 역시 요구된다. 부산시와 부산시의회는 단순히 ‘유치 요청’에 그치지 말고, 유치 지원 조직 구성, 지방조례 제정 등 해사법원 설치에 필요한 행정적, 예산적 지원 기반을 선제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또한 해양대학교, 로스쿨, 해양 관련 기관 등과 협력해 해사법관 후보군, 조사관, 기술 감정인 등 전문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실무 중심의 해사법 교육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나아가 부산시는 국제해양도시 브랜드와 해운박람회 등을 활용해 해외 해운회사, 해외 로펌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지역변호사회와 연계해서 향후 설치될 부산 해사법원의 국제적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에버기븐호 사건은 바다가 곧 법률의 공간이며, 그 공간을 누가 먼저 준비하느냐가 국제경쟁력을 좌우함을 보여주었다. 대한민국이 해양 강국을 꿈꾼다면, 법적 토대인 해사법원의 설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그리고 그 중심은 마땅히 부산이어야 한다. 지방정부의 전략적 실행력과 중앙정부의 정책 결단이 맞물릴 때, 우리는 해사법의 수도, 부산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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