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았던 사랑 잊지 않으려”… 보수초등 56년째 사제의 인연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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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병은 교사와 1969년 6학년 제자들
유영애 씨 제안, 매년 스승의 날 모임
선 씨, 당시 보기 드문 젠틀맨으로 불려
17명 제자에게 인생 조언 편지 전달
동창생 만나는 기쁨도 모임의 원동력

지난달 11일 보수초등학교 졸업 55주년을 맞아 6학년 4반 졸업생들이 스승의 날 행사를 열었다. 당시 담임 교사였던 선병은(왼쪽 아래) 씨와 동문회장인 유영애(맨 오른쪽) 씨. 지난달 11일 보수초등학교 졸업 55주년을 맞아 6학년 4반 졸업생들이 스승의 날 행사를 열었다. 당시 담임 교사였던 선병은(왼쪽 아래) 씨와 동문회장인 유영애(맨 오른쪽) 씨.

56년.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해도 빠짐없이 이어져 온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있다. 1969년 부산 중구 보수초등학교를 졸업한 6학년 4반 학생들과 당시 담임이었던 선병은(89) 씨가 그 주인공이다. 졸업생들은 매년 스승의 날이면 선 씨를 찾아 감사를 전해왔다. 코로나19로 모임이 중단된 한 해를 제외하고는 단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이 만남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유영애(69) 씨다. 그는 대학 시절 전국에 흩어진 동창들을 수소문해 스승의 날 모임을 시작했다. 유 씨는 “학창 시절 선 씨에게 존경과 사랑을 배운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모임을 이어왔다”고 밝혔다. 처음에는 1박 2일 일정으로 여행을 함께했으나, 최근 몇 년은 선 씨의 건강을 고려해 당일 점심 모임으로 진행하고 있다.

졸업한 지 50년이 훌쩍 넘었지만 제자들이 한결같이 스승을 찾는 이유는 단순한 의무감이나 관습이 아니다. 유 씨는 선 씨를 ‘그 시절 보기 드문 젠틀맨’으로 회고한다. 단정한 인상과 따뜻한 태도, 그리고 훈육 속에서도 느껴지던 진심이 제자들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고 했다.

특히 기억에 또렷이 남는 사건도 있다. 유 씨는 초등학생 시절 키가 커서 ‘거인’이라 불렸다. 그는 친구들의 놀림에 화가 나 돌을 던졌고, 친구의 이가 부러지는 사고가 벌어졌다. 더군다나 피해 학생의 이모는 같은 학교의 교사였다. 유 씨는 일이 부모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숨겼다. 며칠 뒤 선 씨는 제사 음식을 들고 유 씨의 집을 조용히 방문했다. 부모에게는 직접 말하라고 타이르며 함께 피해 학생의 집을 찾아가 사과를 이끌어냈다. 유 씨는 이 일을 두고 “선생님이 어른의 품격과 책임을 보여준 장면”이라고 말했다.

선 씨는 매년 스승의 날이면 A4 용지에 직접 쓴 글을 자리에 모인 제자들에게 나눠준다. ‘이렇게 살아보니 좋더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조언은 제자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적힌 봉투에 담긴다. 점심 식사 전 1시간 남짓 짧은 강연도 이어진다. 지난 5월 초 열린 모임에서 선 씨는 “내가 너희들한테 받은 고마움이 더 크다”며 식사비를 자신이 내기도 했다. 제자들에게는 작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졸업 당시 학급 인원은 약 80명이었지만, 현재까지 모임에 꾸준히 참석하는 인원은 17명 정도다. 경찰, 기업 임원, 유치원 원장 등 다양한 길을 걸어왔지만, 이 모임에서는 모두 ‘선병은의 제자’라는 이름으로 함께한다.

유 씨는 “우리도 이제 모두 일흔이 됐다. 친구 중에는 ‘이제 그만 만나자’는 이도 있다. 무릎도 아프고, 몸도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선생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만큼은 모임을 멈추지 않기로 했다”고 전했다.

모임은 단순한 기념이 아닌 삶의 연대이기도 하다. 안부를 주고받고, 힘든 일이 생기면 서로를 돕는 관계로 이어지고 있다. 유 씨는 “선생님을 뵙는 것도 좋지만, 친구들을 만나는 기쁨도 크다. 그게 우리가 56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했다.

스승의 날을 둘러싼 최근 분위기에 대해 유 씨는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는 “요즘은 교사들이 너무 위축돼 있다. 도덕책도 사라졌고, 학생 수가 줄다 보니 학부모들의 기대와 간섭이 더 커졌다. 교사를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단순한 ‘직업인’처럼 보는 현실이 아쉽다”고 밝혔다. 이어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학생들도 존중과 예의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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