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학수의 문화풍경] 호기심이 사라지는 나라,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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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철학 아카데미 숲길 대표 전 경성대 철학과 교수

실용적 관점 아닌 순수한 탐구 열정
현실에 매이지 않는 근원을 향한 질문
인간 특유의 본성이 갈수록 사라져

“왜 선배님은 수학을 연구하십니까?” 미국 대학의 수학과 교수가 출신 고등학교를 방문하여 후배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이런 질문을 받았다. “호기심 때문이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선배는 짤막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응답했다. 당시 2학년이던 필자를 포함하여 학생들은 깜짝 놀랐다. “수학 공부를 통하여 사회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또는 “학술적 업적을 성취하여 한국인의 위상을 세계에 드높이기 위해서” 같은 거창한 말을 우리는 예상했던 것이다.

호기심은 순수한 탐구 열정이다. 순수하다는 말은 실용적 목적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반면 배를 만들기 위해서, 전력을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서,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연구하는 것은 실용적 탐구이다. 이 경우 탐구의 동력은 현실 세계의 문제 해결 같은 실용성이지 호기심은 아니다. 그냥 알고 싶은 호기심에서 출발하는 순수 탐구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철저하게 근원을 향해 질문한다. 필자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는데, 동네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지나 저 멀리 산맥을 넘으면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다. 주위 어른에게 산을 넘어도 들판이 있다는 답을 듣지만, 아이는 그것을 넘어가면 또 무엇이 있는지 물었다. 마침내 아이에게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라”는 핀잔이 돌아온다.

인간은 쓸데없는 것이라도 묻고 싶은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제1권은 “원래 모든 사람은 알고 싶어 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안다(eidenai)’는 말은 아이의 호기심처럼 실용적 고려 없이 무언가를 탐구한다는 의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인식 활동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낮은 단계는 경험이며, 그 위 단계는 신발이나 국가를 만들고 운용할 줄 아는 기술적 인식과 인생을 잘 영위하기 위한 삶의 지혜이며, 가장 높은 단계는 호기심에서 일어나는 순수 탐구이다. 이 최고 단계의 인식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피아(sophia)’라고 불렀는데, 그의 선배들은 ‘필로소피아(philo-sophia)’라고 하였다. 필로소피아는 그리스 말로 ‘최고 인식’을 의미하는 ‘소피아(sophia)’와 ‘사랑하다’를 의미하는 ‘필로스(philos)’의 합성어이다. 필로소피아는 영어로 ‘필로소피(philosophy)’이며, 이것을 일본 학자 니시 아마네(西周)가 1874년 ‘철학(哲學)’이라고 번역하였다. 철학은 순수 탐구에 대한 번역어인 것이다.

필로소피아는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탈레스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는 세계가 원래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 물으면서, 세계의 시초는 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답변은 틀렸지만 순수하게 그냥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을 발휘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우주의 시초가 무엇인지 묻는 이런 탐구는 실용성이 없다. 세계의 시초가 물이든, 불이든, 공기이든, 원자이든, 그걸 안다고 해서 당시의 현실 생활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필로소피아 즉 철학은 실용성 때문에 일어나지도 않으며 실용성을 고려하지도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는 필로소피아는 사라진 것인가? 아니다. 현대의 순수 과학은 필로소피아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같은 학문은 지구 온난화나 질병의 퇴치 같은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동기에서 시작하지 않고, 최초의 근원을 그냥 알고 싶어서 탐구한다. 부산대 물리학과 유인권 교수는 우주의 최초 물질 상태를 연구하는 학자이다. 그는 탈레스의 후계자인 것이다. 유 교수는 자신의 연구가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기자로부터 질문을 받으면 매우 당혹스럽다고 신문 칼럼에서 밝혔다. 사실 이런 질문은 남자보고 언제 출산할 것이냐고 묻는 것처럼 빗나간 것이다.

탈레스에 대한 일화가 전해 온다. 그는 별을 관찰하면서 걷다가 구덩이에 빠져버렸다. 사람들은 철학자가 천상의 별은 보면서 발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보지 못한다면서 그를 조롱하였다. 이 이야기는 주로 철학이 실용성이 없음을 지적할 때 인용되어 왔다. 그러나 헤겔은 〈철학사 강의〉에서 다른 관점으로 일화를 이해한다. “사람들은 철학자를 비웃을 것이나, 그들은 철학자가 대중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대중은 구덩이에 빠질 수 없다. 그들은 더 높은 세계를 보지 못하므로 이미 구덩이에 늘 빠져 있다.” 하늘, 즉 높은 세계는 최고의 진리를 가리킨다. 대중은 그런 것을 탐구하지 않기에 실용성의 구덩이에 빠져 살면서도 본인은 그 점을 모르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호기심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고등학생들은 실용적 학과만 지원하고, 교육 당국도 필로소피아를 학교에서 추방하고 있는 것이다. 실용 연구만으로 인간은 잘 살아가지 못한다. 본성상 인간은 호기심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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