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이것이 왜 국가 재난이 아닌가?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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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규 플랫폼콘텐츠부 차장

어떤 뉴스는 읽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딥페이크 성착취 텔레그램방이 개설됐다는 전국 대학과 중고등학교의 위치가 한반도 지도를 촘촘히 채울 때, 드러나는 ‘지인 능욕’ 텔레그램방 규모가 22만 명, 40만 명 식으로 불어날 때, 불법 합성 성착취물을 만들고 공유한 가해자들이 수사 기관을 비웃고 급기야 관련 기사를 쓴 기자를 ‘능욕’하는 방까지 개설될 때 분노와 참담함에 차라리 눈을 돌리고 싶었다.

딥페이크 집단 성범죄 사건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온라인 공간에서 무리를 이루어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한 불법 콘텐츠를 돌려보는 디지털 성범죄의 역사는 인터넷의 역사와 시간대가 크게 다르지 않다. ‘○○ 비디오’가 있었고, 소라넷이 있었고,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있었다. 대부분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하게 성별로 구분되는 젠더 범죄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기술의 위력이다. 합성 기술의 보급으로 누구나 사진 한 장으로 가상의 성착취물을 손쉽게 만들고, 그것을 추적이 힘든 암호 화폐로 사고팔 수 있다. 텔레그램의 강력한 보안 기술은 성인 인증이나 개인 정보 공개도, 적발의 두려움도 없이 불법 콘텐츠에 무제한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일상 사진이나 프로필 사진만으로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 또한 무한히 연결되는 소셜미디어의 등장 때문이다.

딥페이크 집단 성범죄를 부추긴 게 기술만은 아니다. 과거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소극적인 수사와 가벼운 처벌, 부실한 대책이 이번 사건을 배양했다. 사건의 시발점인 서울대 딥페이크 사건도 피해자가 직접 나서서 노력한 끝에 수사와 기소를 이끌어냈다. 소라넷도 n번방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2년 전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TF는 갑자기 해체됐고, 당시 이미 구체화된 대책은 서랍 속에 묻혔다.

더 근원에는 여성 혐오와 성차별이 있다.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사회라면 여성을 ‘능욕’하는 콘텐츠가 적어도 10대들의 놀이 문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평등이 국가적 의제였다면 외신이 이번 사건을 두고 “만연한 성희롱 문화 속에서 기술 발전이 디지털 성범죄의 폭발적 증가를 불러왔다”고 분석할 때 국내 정치인의 일성이 “과잉 규제가 우려된다”, “급발진 젠더 팔이, 그만할 때도 됐다”일 수도 없을 것이다.

딥페이크 집단 성범죄 사건은 징후가 아니라 무수한 경고음을 방치한 끝에 10대들까지 파고든 파국이다. 더 두려운 것은 이것이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온라인에서 세를 키운 여성 혐오는 이미 현실의 여성 대상 폭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변의 지인이나 동료에 의해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은 사회에 대한 신뢰의 근간을 허문다. 그 결말은 공동체의 실패고 국가의 위기다.

“동료 시민에 대한 집단적 모욕과 멸시가 용인되고 학습되는 사회는 존속할 수 있는가? 존속해도 되는가? 이는 국가 위기 상태이다.” 한국여성민우회의 성명이다. “국가적 재난 상황임을 선포하고 시급히 대안을 마련하라.” n번방 사건을 처음 공론화한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촉구다. 필요한 것은 국가의 의지다. 늦었지만 더 늦어서는 안 된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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