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떠날 것인가, 구독할 것인가
김마선 페이퍼랩 본부장
국가 기업 조직 ‘퇴보’할 때
이탈·항의·충성 심리 상호작용
청년 유출·일자리 부족 현실
항의 목소리 중심에 지역언론
의제 설정, 목소리 대변 등
철저하게 지역 시각에서 접근
국가나 기업, 조직은 왜 퇴보하는가. 미국의 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1915~2012)이 파고든 주제다. 대강 정리하자면, 그는 기술발전에 따른 잉여(느슨함)가 퇴보를 초래한다고 봤다. 발전경제학자인 그는 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유럽을 재건한 ‘마셜플랜’에도 참여했다.
그가 1970년에 쓴 책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는 그런 퇴보 상황의 치유 방안을 다룬다. 떠나거나(Exit), 항의하거나(Voice), 충성하거나(Loyalty). 이 3가지 선택의 상호작용을 통해 회복 모멘텀을 만들 수 있다는 요지다.
부산이 퇴보하고 있다. 지역이 소멸하고 있다. 거대한 블랙홀, 수도권이 돈과 사람을 마구 빨아들인다. 그 결과로 수도권은 고도비만, 지역은 영양실조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도 “과도한 집중을 막아야 한다”고 최근 밝혔다.
지역의 청년 유출(그로 인한 고령화)과 일자리 부족 문제를 굳이 여기에서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허시먼 식으로 보자면 이런 현실에서 지역민에게는 3가지 선택지가 있다. 지역을 떠나거나, 일극 체제에 항의하거나, 그도저도 아니면 군말 없이 잠자코 있거나.
청년들의 이탈은 곧 항의 기능의 약화를 부른다. ‘삶의 품질’에 관심 많고, 앞장서서 목소리를 내야할 주체들이 가장 먼저 떠나니 말이다. 지역에 오래 산 노인들은 충성도가 높지만 떠나기도 목소리를 높이기도 어렵다.
지역의 아우성에 야당은 무심하고, 여당은 무능하다. 인구 감소로 지역 정치권의 위상이 떨어지는 것도 걱정스럽다. 수도권 면적은 국토의 10%가 약간 넘지만, 국회의원 수는 절반에 육박한다. 이런 현실에서 누군가는 ‘우는 소리’를 해야 한다. 허시먼 식으로 중앙과 지방 정부, 정치권에 항의할 구심점이 필요하다.
필자는 지역언론에 답이 있다고 본다. 신문사에 근무해서가 아니라, 근무해 봤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꼭 〈부산일보〉가 아니어도 좋다. 〈경남신문〉 〈경상일보〉 〈매일신문〉 등 지역언론은 쓸모가 많다. 종이신문이든, 포털이든, 닷컴이든 지역언론에 관심을 갖는 것이 지역의 목소리를 살리는 길이다. 따지고 보면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도 지역신문이다.
회사로 배달되는 중앙지들 틈에서 가끔 다른 지역의 신문을 찾아본다. 명색이 일간지인데도 사나흘 뒤 우편으로 오는 것도 있다. 그 신문을 읽을 때마다 솔직히 드는 심정이 있다. 바로 ‘촌스럽다’는 것이다. 기사, 편집, 디자인, 광고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그러하다. 그런데 내가 25년째 만드는 〈부산일보〉는 어떨까? 다른 지역의 눈으로 보면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결국 돈과 인력의 문제다. 지역언론은 중앙집중 구조의 피해자이면서 이를 극복할 구심점이다.
‘촌(村)스럽다’는 것은 나쁘게만 볼 일이 아니다. 적어도 ‘관점’에서는 그렇다. 지역언론은 ‘전국의 지역화, 지역의 전국화’를 지향한다. 전국 뉴스를 지역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지역 이슈를 전국적 관심사로 만든다. 사회 고발이든, 정책 요구든, 약자의 목소리든 지역이 우선이다. 이를테면 ‘좋은 맹목성’이다.
장담하건대 만약 부산 언론이 없었다면 가덕신공항은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가덕신공항을 추진할 때 서울 언론은 ‘멸치 말리는 공항’이 될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그쪽의 시각이 대개 그러했다.
지난해 11월 부산엑스포가 좌절됐을 때 서울 언론은 비난의 글을 쏟아냈다. 사우디를 넘어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산시와 시민, 정치권, 지역언론이 똘똘 뭉쳤기에 국가를 대표해 도전이라도 해볼 수 있었다.
엑스포 좌절 이후 서울 언론은 다시 가덕신공항에 대해 견제하기 시작했다. 명분은 ‘제대로 된 공항’이다. 그들 논리대로라면 멸치 말리는 공항을 제대로 만들자는 말인가?
이쯤에서 지역언론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느냐는 반문이 있을 것이다. 매일 고민하는 것이지만 솔직히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평가는 독자들 몫이다. 잘한다면 ‘엄지척’을, 독자들로부터 멀어졌다면 ‘회초리’를 들어주시길.
미국은 ‘떠남’의 전통이 강한 나라다. 조국(영국 등)을 떠나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고, 수틀리면 떠난다는 원칙 아래 정치(양당제도)와 경제(자본주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신대륙도, 서부도 없다. 필요할 때마다 ‘지금 여기에서’ 목청껏 외치면서 불만 사항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다.
부산시민공원은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보다, 온천천은 서울 청계천보다, 부산대는 하버드대보다 못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리가 아끼고 가꿔야 하지 않겠는가. 그 아낌의 대상에 비록 촌스럽지만 지역언론도 포함되기를 바란다. ‘공공재’로서, 분명히 보답할 것이다. 마감하면서 보니 이 글 또한 떠나는 독자들을 향한 하소연(Voice)임을 깨닫는다.
김마선 기자 ms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