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낯설지만 아름다운 경험
영화평론가
스트로브&위예 감독 회고전 열려
실험적이고 급진적인 작품 남겨
"영화를 오감으로 느끼는 경험"
2022년, 프랑스 출신의 장 마리 스트로브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고 소식에 시네필들은 애도를 표했고, 세계 곳곳에서는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도 지난 7월 18일부터 8월 11일까지 장 마리 스트로브와 평생 그의 영화적 동반자이자 아내였던 다니엘 위예의 작품을 상영하는 ‘지나간 미래 X 다가온 과거: 장 마리 스트로브 & 다니엘 위예 회고전’을 열었다.
사실 스트로브와 위예의 영화들은 시네마테크나 영화제에서 간간이 만날 수 있는 귀한 작품이기에, 회고전이 열린다는 소식만으로도 설렜다. 게다가 초기작인 단편부터 2006년 위예가 타계한 후 스트로브가 홀로 찍은 영화들까지 무려 32편이 상영되는 회고전이기에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그들의 영화를 볼 수 있을지 몰라 무척 기다려졌다. 그래서인지 올해 진행된 시네마테크 기획전 중 유독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관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처음 스트로브와 위예의 영화를 접하는 이들은 그들의 영화 세계를 난해하다고 느낀다. 서사 중심의 영화가 아니고, 대사와 독백들로만 채워져 있거나, 인물들은 건조하다 할 정도로 감정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카메라도 배우의 신체 일부만을 비추거나 텅 빈 공간을 비추는 등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기에 더욱 그렇다. 관객들은 감독들이 잘 알려진 문학이나 연극 등의 작품을 영화화했기에 쉽게 영화에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감독들은 그 작품을 통해 영화와 끊임없이 거리를 둘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두 감독은 오페라, 연극, 시, 소설 원작 텍스트를 가져오지만 원본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실러, 횔덜린, 카프카, 브레히트의 작품을, 실제 음악가를 캐스팅해 바흐의 음악을 재해석하거나, 세잔의 그림과 루브르의 명화들을 탐색하면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영화를 완성한다. 스크린에 옮길 수 없을 것 같은 재료들로 영화를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영화를 ‘번역의 영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스트로브와 위예는 현대 미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가히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 회고전에서 인상 깊었던 영화는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이었다. 이 영화는 프리드리히 횔덜린이 남긴 미완성 작품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을 가져오면서 과감한 방식으로 영화화한다. 그런데 그들은 횔덜린의 언어를 재해석하지 않으며 배우의 목소리를 통해 원문을 그대로 낭독할 뿐이다. 횔덜린이 쓴 본연의 언어를 이탈하지 않으려는 의도다. 그로 인해 배우들은 연기하지 않으며 오롯이 낭독하는 데 애쓴다. 배우의 낭독은 영화 세계로 진입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은 배우가 만들어낸 환상 속에 몰입하지 않고, 배우가 제시하는 상황, 즉 횔덜린의 텍스트가 의미하는 상황 그 자체와 직면하게 된다.
이제 특별한 경험을 한다. 전혀 모르는 타국의 언어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인다. 그러다 낭독의 내용을 전혀 알아챌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어느 순간 끝없이 몰려오는 자막읽기의 집착을 내려놓을 때는 스트로브와 위예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들이 들리고 보인다. 바람에 스치는 나무들의 살랑거리는 움직임,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의 변화, 영화 속 에트나 산의 불완전한 기운을 감지한다. 배우가 낭독하는 단어의 강조와 긴 휴지, 늘어짐, 노래를 부르는 듯 맑고 고운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미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도 영화를 감각할 수 있는 ‘영화적 순간’이다. 스트로브와 위예는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으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영화 만들기를 실천한 감독들이다. 그로 인해 이토록 자유롭고 낯선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