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쇼스타코비치, '타임'지 표지에 등장하다!
음악평론가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소련의 전쟁으로 번졌다. 1941년 6월 22일부터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해 9월부터 시작해서 총 871일 동안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한 채 모든 음식과 연료 공급을 차단했다. 10만 회가 넘는 공중 폭격을 했고, 15만 발의 포탄을 레닌그라드에 쏟아부었다. 폭격과 추위와 굶주림으로 100만여 명의 러시아인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러시아군은 쥐를 잡아먹어 가면서까지 악착같이 버텼다.
쇼스타코비치(Dmitri Dmitriyevich Shostakovich, 1906~1975)는 그 소식을 듣고 곧바로 군에 자원했다. 근시가 너무 심해서 일반 군인으로는 복무할 수 없었기에 시민군에 들어가서 소방수로 일했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지켜보면서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작곡했다. 1942년 2월에 볼쇼이극장 오케스트라가 초연했으며, 10월엔 전투 중인 레닌그라드에서도 연주되었다. 초연 후에 이 작품은 나치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곡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고, 쇼스타코비치는 일약 국가 영웅이 되었다.
7번 교향곡의 악보는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서방 세계에 전달되었다. 1942년 6월 22일에 영국 런던에서 초연했고, 마침내 7월 19일에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NBC심포니가 미국 초연을 했다. 공연은 미국 전역으로 방송되었고, 이튿날 ‘타임’지는 소방수 모자를 쓰고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을 표지에 게재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악명 높은 ‘즈다노프 선언’이 발표되면서 쇼스타코비치는 사회주의를 좀먹은 ‘최악의 형식주의자’로 몰려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때부터 쇼스타코비치는 두려움에 떨며 지내야 했다. 매일 밤 중앙위원회에서 보낸 요원들이 그를 감시했고 호시탐탐 끌고 갈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3년 스탈린이 죽었고, 다행히 쇼스타코비치는 죽음의 길에서 생환할 수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7번 교향곡의 네 개 악장이 각각 ‘전쟁’ ‘추억’ ‘광활한 조국’ ‘승리’를 상징한다고 했다. 긴박한 1악장은 “우리를 위해 죽은 영웅들을 위한 레퀴엠”이라고 설명했다. 2악장은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간주곡”이며, 길고 느린 3악장은 “다가올 승리의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행진곡풍의 4악장은 최후의 승리를 상징한다.
음악을 통해 전쟁의 폭력성과 참상을 고발하던 그가 살아 있다면, 지금의 러시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오늘도 여전히 어지러운 우크라이나의 전쟁 소식을 마주하며,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을 들으니 만감이 교차한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4악장-hr심포니, 클라우스 매켈라(지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