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폭주하는 아이들, 조금씩 흔들리는 세계
영화평론가
바비 보이즈의 음악에 맞춰 춤추는 소녀들, 고요했던 학교 수영장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진다. 어둠 속 소녀들을 비추는 조명은 달빛. 달빛 사이로 소녀들의 맑은 웃음소리와 역동적인 움직임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이때 소녀들을 지켜보던 한 아이가 물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소녀들의 열기가 사그라진다. 가슴 뛰는 이 오프닝은 영화 ‘태풍클럽’이 활기와 정적, 우울과 비관이 가득 찬 기묘한 세계임을 알린다.
‘태풍클럽’은 도쿄 근교의 작은 마을, 태풍이 몰려오는 4박 5일 동안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아이들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채 자신만의 세계에 머물러 있거나, 선생에게 환멸을 느끼거나, 삶과 죽음을 고민하는 등 저마다의 고민과 불안을 안고 있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한다. 주변에 아이들을 돌보고 보호할 어른의 존재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중, 태풍이 다가온다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약했던 바람이 점차 거세지고, 폭우를 동반한 태풍이 마을로 점차 가까워지자 아이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소마이 신지 감독 '태풍클럽'
청소년의 고민과 감정 주목
카메라에 자유로운 모습 담아
선생들은 태풍 소식에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만 어떤 이유인지 6명의 아이들이 학교에 고립된다. 남은 아이들은 불안해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지금껏 한 번도 표출하지 않았던 욕망을 분출하기 시작한다. 윤리나 규범 등의 고리타분함을 교육하던 학교는 축제의 장이 된다. 아이들은 자유롭게 사랑을 하거나, 속옷만 입은 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무엇이 그들을 즐겁게 만드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은 놀이 때문에 즐거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즐거운 감정들을 북돋아 내고 있다. 태풍처럼 격렬하고, 어디로 흘러갈지 모를 예측 불허의 감정들을 토해내고 만끽한다.
아이들은 온몸으로 태풍과 마주한다. 그들에게 태풍은 몸을 숨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에너지를 분출하는 시간이다. 즉 아이들에게 태풍은 모든 공간을 휘저어 버리는 동시에 억압되어 있던 본성을 확인시키는 기폭제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태풍이 마을을, 학교를 완벽하게 잠식했을 때 아이들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진정한 해방감을 맛본다. 그리고 태풍이 지나갔다. 전날 그렇게 몰아치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조용해진 마을, 그 사이 아이들은 한 뼘쯤 자라있거나, 어떤 아이는 희망 없음을 깨닫고 사라졌다. 아이들이 아주 조금 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미성숙한 아이들의 성장을 뜻하지 않는다.
감독 소마이 신지는 아이들이 있는 학교와 학교 바깥의 현실을 비춘다. 이때 감독은 아이들의 생각을 알려고 들지 않는다. 아이들의 세계를 비추는 카메라는 적당히 거리를 둔 채 그들을 그저 따라갈 뿐이다. 카메라는 아이들보다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후 천천히 이동한다. 이는 단순히 고정된 카메라라고 할 수 없다. 카메라가 관객의 시선을 규범화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아이들의 자유로운 정념을 추적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마이 신지의 대표적 스타일로 여겨지는 ‘원 씬 원 컷’은 예술적 기법으로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념을 표현하고 담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기에 그의 카메라는 공간의 깊이를 보여주거나 사유의 깊이를 넓히기보다는 실험적인 방식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역동적인 카메라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정념의 형상을 닮아있는 태풍과 학생이라는 유비적 대상을 포착하며 불완전한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2001년, 13편의 영화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소마이 신지의 ‘태풍클럽’은 1985년 일본에서 개봉했다. 한국에서는 시네마테크나 영화제를 중심으로 소마이 신지의 영화들을 간간이 볼 수 있었지만 정식 개봉은 아니었다. 39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어 도착한 이 영화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불안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청춘의 에너지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