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악은 누구에게나 있다
영화평론가
개봉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홀로코스트로 본 '악의 평범성'
소리로 표현하는 비극과 공포
벽을 타고 소리가 넘어온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소리는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누군가의 비명임을 눈치채게 한다. 사운드만으로 끔찍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음을 전하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영화다. 영화 제목의 의미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둘러싼 40㎢ 지역을 일컫는 말로, 영화 속 주인공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 온갖 꽃이 만발한 정원에 다섯 아이가 뛰놀고, 아내 ‘헤트비히’와 남편 ‘루돌프’가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헤트비히 말대로 그들이 있는 그곳은 흡사 낙원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이 가족의 행복이 누군가의 죽음들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린다.
루돌프 가족이 사는 집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벽의 바깥이 천국이라면, 벽의 안은 생과 사가 오가는 지옥이다. 죽음을 결정하는 사람은 루돌프이다. 그의 진짜 얼굴은 수용소로 끌려온 유대인들을 어떻게 하면 빠르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독일 장교였다. 다정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던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죽음을 지시하는 모습은 섬뜩하기 그지없다. 영화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한 가족을 보여주는 동시에 불안정한 음악, 멀리서 들려오는 총소리, 날카로운 비명, 아이의 울음소리를 함께 배치한다. 피 흘리는 장면이나 총격 장면이 등장하지 않음에도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바로 서사와 이미지, 사운드가 모두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벽 너머, 수용소의 상황을 볼 수 없다. 카메라는 루돌프 가족의 일상을 뒤따르며 그들이 보는 위치에서만 수용소를 보거나, 그곳에서 들려오는 미묘한 소리들만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이미지 중 하나는 아우슈비츠 굴뚝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이다. 유난히 푸른 하늘 속에서 검은 연기는 빠르게 흩어지고 바로 뒤 카메라는 정원의 싱그러움을 비춘다. 정원을 비옥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상상하게 만드는 연출이다.
이들 가족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총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 행동한다. 학살이 자행되고 있음에도 피크닉을 즐기고, 생일파티를 하고, 유대인에게서 강탈해온 물건을 자기 것인 양 사용한다. 특히 루돌프가 다른 지역으로 발령받아 아우슈비츠를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천국 같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며 분노를 터뜨리는 헤트비히의 모습에서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비인간성을 목격한다. 정원에서 놀던 형이 동생을 온실에 가두는 장면에 이르면 나치가 유대인을 감금하고 학살하는 모습을 아이들이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죽음 앞에서 태연한 가족의 모습은 ‘악’의 얼굴이 얼마나 평범하고 무심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영화는 유대인이 있는 수용소 내부를 한 차례도 보여주지 않지만 평범한 인간이 만들어내는 잔인함으로 말미암아 그곳이 지옥임을 상상하는 데 어렵지 않게 한다. 이때 소리는 공포를 가중한다. 또한 잔인한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을 줄 알았던 가해자가 우리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라는 점에서 충격을 안긴다. 이 지점에서 조나단 글레이져 감독은 다른 이의 삶을 짓밟으며 쌓아 올린 행복과 평화를 지키려는 루돌프 가족의 서사를 과거로 국한 시키지 않는다.
영화 말미에 카메라는 유대인이 있던 수용소가 아닌, 희생자를 추모하는 전시관으로 변모한 현재의 수용소 내부를 비춘다. 마치 애도하듯 수용소 안을 조심히 살피는 카메라를 무심히 바라보는 나를 느낄 때, 살해를 지시하던 루돌프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내 안에도 악이 내재해 있음을 확인한다. 영화는 아우슈비츠의 비극이 현재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