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기요·부산요 궤적을 쫓다] 1. 부산요, 300년 만에 세상으로 나오다 2부-부산다움의 근원 부산요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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폄하와 차별 없는 국제협업의 쾌거이자 부산 정체성의 원류

왜관가마 판화. 맨 위쪽에 ‘헌상요’라는 중요 주문 다기 제작 가마가 보이고 그 밑에 ‘대요’라는 일반 가마가 보인다. 그 아래에 장인의 거처인 번조두가 보인다. 이 그림은 <부산요와 일본다완>(아사카와 노리타카 지음/최차호 옮김)이란 책에 실려 있다. 저자인 아사카와 노리타카가 상상력을 발휘해 왜관가마 모습을 1930년 판화로 재구성했다. 부산요포럼 제공 왜관가마 판화. 맨 위쪽에 ‘헌상요’라는 중요 주문 다기 제작 가마가 보이고 그 밑에 ‘대요’라는 일반 가마가 보인다. 그 아래에 장인의 거처인 번조두가 보인다. 이 그림은 <부산요와 일본다완>(아사카와 노리타카 지음/최차호 옮김)이란 책에 실려 있다. 저자인 아사카와 노리타카가 상상력을 발휘해 왜관가마 모습을 1930년 판화로 재구성했다. 부산요포럼 제공

부산일보는 최초의 한·일 합작 프로젝트인 조선 도자기의 교류사를 재조명하는 시리즈로 1부 ‘일본에서 찾은 조선 도자’에 이어 2부 ‘부산다움의 근원 부산요’를 시작합니다. 부산요포럼에 참여하고 있는 도자 전문가들의 격주 릴레이 칼럼을 통해 300년 만에 복원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부산요의 역사적 가치를 조명할 예정입니다.

용두산 일대 조선 도자기의 역사적 현장

조선 도공과 일본 다인 고수가 협력

‘왜놈’‘조센진’ 없이 제품 제작 몰입

세계 도자사에 독창적인 입지 구축

‘부산요’ 복원과 역사문화사업화 통해

대표적인 영남권 문화콘텐츠로 육성

세계 도자기 산업의 거점 만들어야

■교류와 협력의 상징 부산

10여 년 전 나는 직업상 차를 끓이고 도자기를 매일 만지면서 일을 하였다. 손에 닿는 도자기의 질감에 매우 익숙했고 또 다정하게 느껴져서 시간만 허락되면 도자기를 굽는 전통 가마를 다니면서 사기장들을 만나고 도자기 공부를 했다. 그래서 우연히 알게 된 300년 전의 부산요에서 구워낸 도자기는 어떤 모습일지 너무나 궁금했다.

현대 도예가의 전설인 버나드 리치(1887~1987)는 “15세기 조선의 분청도자기는 세계 도자사에서 더 표현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기법을 개발하고 창조해 내었다…. 그 자유분방함이 지극히 현대적이다”라고 조선 도자기를 극찬한 적이 있다. 이처럼 이미 세계 도자사에서 독창적인 입지를 인정받은 조선 도자기의 역사적 현장이 바로 지금의 부산 용두산공원 일대에 있었다.

‘부산요’가 조선과 일본이 합작해서 70여 년간 운영해 왔다니 대단하고 전근대 시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겨나고 지속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도 역사적으로 평가해 봐야 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17세기를 회상해 보면 철을 생산하고 구리를 제련하고 종이를 생산해 내는 일을 포함해서 도자기의 생산도 최첨단 산업의 영역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특히 도자기는 다른 부분과는 달리 흙과 불과 인간의 예술혼이 조화를 맺어서 탄생한 도구이자 예술 작품이다. 영화, 의료, 항만물류, 게임 등도 좋지만 이 모든 것은 현재적이다. 부산의 뿌리, 부산다움의 근거 찾기가 필요하다. ‘영화보다 고유한 도자기의 도시 부산요’란 불가능한 것일까? 아니다. 왜냐면 일본에 도자 기술을 전수한 현장이 바로 부산 원도심에 있기 때문이다. 부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민족의 전통문화인 도자기를 당당하게 소개할 수가 있다. 나와 부산요와의 만남은 이런 소박한 애향심에서 출발했다.

부산요는 대체로 세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부산요 1’ 시기는 두모포왜관 밖에서 가마를 개설해 다완을 생산한 1639년부터 1644년까지다. ‘부산요 2’ 시기는 두모포왜관 안으로 가마를 옮겨와서 초량왜관으로 이전하기까지 다완을 생산한 1644년부터 1678년까지다. ‘부산요 3’은 초량왜관 시기 왜관 안에서 생산한 것을 의미하며 1678년 4월부터 1717년 부산요가 폐쇄될 때까지 운영됐다. 부산요포럼 제공 부산요는 대체로 세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부산요 1’ 시기는 두모포왜관 밖에서 가마를 개설해 다완을 생산한 1639년부터 1644년까지다. ‘부산요 2’ 시기는 두모포왜관 안으로 가마를 옮겨와서 초량왜관으로 이전하기까지 다완을 생산한 1644년부터 1678년까지다. ‘부산요 3’은 초량왜관 시기 왜관 안에서 생산한 것을 의미하며 1678년 4월부터 1717년 부산요가 폐쇄될 때까지 운영됐다. 부산요포럼 제공

■부산을 만들어 간 ‘부산요’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길고도 험난하다. 어느 외국보다도 가깝다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서로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은 대국 중국과의 관계가 우선순위에서 가장 앞섰다고 한다면, 일본은 한국과의 관계가 우선적이고 손쉽게 상대하게 된 대상국이다. 물론 일본으로서도 중국이라는 문화 대국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직접적인 관계에서는 상당 기간 한반도와의 교류를 통해 그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왜(倭)라는 표현 자체가 일본을 차별하는 시각이다. 당연히 일본적인 것도 그 가치성을 상실한다. 한국은 일본을 무시하고 의미를 깎아내리면서 무사안일만을 추구해 왔다. 무식하고 거친 곳이라 일본에 관해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일본문화 자체를 부정하였다. 이런 자세는 조선왕조가 들어서고 양반의 사대부 문화가 한반도에 자리를 잡으면서 더욱더 공고해져 온 건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통신사’가 일본에 가서 외교적인 행사는 물론이고 문화교류를 왕성하게 펼쳤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통해 조선이 얻은 것은 없다. 일본을 통해 세계인식의 지평을 넓히지도 않았고, 일본인과 일본문화를 접해 조선 문화를 더 풍부하고 수준을 끌어올리는 계기로 삼지도 않았다.

하지만 섬나라 일본은 다르지 않았나? 중국 것이든 조선 것이든 받아들여서 활용하고 또 자기 것으로 했다. 우리가 오랑캐냐 아니냐 하는 화이관(華夷觀)에 사로잡혀 우리 자신을 옥죄이고 있을 때 일본은 적어도 문화를 대하는 자세에서는 실용적이고 개방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런 자세가 없었다면 조선의 자기장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제 도자기의 생산이 ‘부산요’에서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일본에 수출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일본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정말 대단한 역사적 사건이다. 일본 쪽에서 아이디어를 내고 사업 구상을 하고 ‘마스터 플랜’을 마련하면 이를 조선 조정의 허락을 받는 통과 절차를 거치기는 하지만, 일본에서 파견된 생산 지휘자들로 주로 경도(京都)의 다인(茶人) 고수(高手)들이 조선의 도공과 대마도에서 파견된 일꾼들과 협력해서 도자기를 생산해 낸 것이다. 한 편의 드라마이기도 하고 거대한 교향곡의 탄생과도 비교되는 국제협업의 쾌거이다. 여기에는 조선인에 의한 ‘왜놈’이라는 폄하의식도 없고 일본인의 ‘조센진’이라는 차별의식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자기 생산이라는 공통된 일에 몰입해서 각자의 맡은 바 역할을 다하는 생산인으로서의, 나아가 예술인으로서의 활동만이 있었다. 언어소통의 어려움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도자기라는 공통의 대상이 있었고 어느 정도의 사전 지식이 있었으므로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고 만든 도자기 작품을 돌려보면서 그 부분만 지적해도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용두산 부산가마에서는 당시 조선인을 괴롭혔던 어떤 신분 차별과 족쇄도 존재하지 않았고 필요하지 않았으며 요구하지도 않았다. 부산은 이렇게 시대를 뛰어넘은 협력의 장으로 탄생했고 어떤 이데올로기로부터도 자유로운 해방구였다. 부산은 이렇게 해서 성장·교류·소통하고 함께했다. 우리는 여기서 부산의 정신, 부산 아이덴티티의 원류를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어찌 ‘부산요’의 정신을 되새기고 계승하지 않으리오!

■‘부산요’가 출발점이다

지금부터라도 가능하다. 부산시는 광복동에 부산요(釜山窯)라는 간판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역사 속의 가마터를 다시 용두산공원 일대에 되돌려 놓을 계획을 세워야 한다. ‘부산다움’과 ‘부산 정신’의 건설을 위해서도 물론이요, 물류와 관광이라는 산업적 측면에서도 큰 그림의 부산요 복원과 역사문화사업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21세기의 부산요 시대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1639년부터 운영된 ‘부산요’는 조선의 선의와 조선 도자기 예술인들의 기술 전수와 일본인이 조선다완에 매료되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조선 도자기 장인들이 우리에게 상속한 도자기는 현재도 많이 남아 있으며 파편도 일부 보존돼 있다. 이 유산들을 바탕으로 오늘날 후배 사기장들의 새로운 기술과 디자인의 연구를 증진해 ‘부산요’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고 일본과 도자 문화 교류를 재개해야 한다. 민간 차원에서 원도심에 부산요 자료관과 가마를 복원할 수 있도록 부산시는 힘을 모아야 한다. 현재도 마땅한 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용두산공원에 있는 팔각정(현재 커피 체인점 운영)은 부산요 자료관이나 조선 찻잔 박물관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부산문화재단이 운영하는 한성 1918(현재 개인 커피숍 운영)의 1층은 도자기(공예)전시관으로 운영하면 될 듯도 한데 왜 두 곳 모두가 커피숍이 차지했는지를 부산시에 묻고 싶다. 문화 콘텐츠가 없는 것일까?

일본은 기장과 양산 법기, 창기, 김해 등지에서도 도자기를 주문 생산했다. 이제부터라도 부산요의 역사적 가치의 현대적 재해석과 함께 이를 창조적으로 되살려 인접 지역과의 도자문화와 도자산업을 연결하고 묶어내는 지역 문화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나아가 이를 대표적인 영남권 문화콘텐츠로 만들어서 한·일 도자문화 교류의 물류 창구와 세계 도자기 산업의 거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안태호


문화예술 기획가


민족미학연구소 사무국장 역임. 현 ‘부산요포럼’ 창립집행위원장.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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