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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초겨울 명징한 소백의 기운 흠뻑 마시다
11월 초순인데 영하의 날씨였다. 소백은 곳곳에 얼음꽃도 피었다. 서걱대는 서릿발 같은 얼음을 밟으며 발아래로부터 차가운 침을 맞는 느낌을 받는다. 또 능선은 충만했다. 이미 잎을 떨군 나목은 낙엽 비단길을 만들어 놓았다. 상월봉(1394m)의 조망은 탁월했다. 국망봉까지 튼실하게 이어진 대간과 비로봉의 늠름한 자태, 그리고 소백 일대의 크고 작은 능선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국망봉으로 우회하지 않고 몸을 쓴 덕분이다.
이날 산행은 부산시민등산아카데미 총동창회 제1기 백두대간종주대(단장 박경효·총대장 김창진)과 함께 했다.
고치령 산령각엔 산신이 두 분
소백산국립공원 고치령~비로봉 구간 대간길은 맑고 차가웠다. 모처럼 새벽이 아닌 동이 튼 아침에 나선 산행길이어서 더욱 맑은 느낌이 충만하다. 총구간 19.7km를 8시간 동안 걸을 계획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버스가 갈 수 있는 마지막 마을인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에서 해발 760m 고치령까지는 마을 이장님의 차량 지원을 받아 쉽게 접근했다. 소백산신과 태백산신을 함께 모신 산령각의 목문을 일행 중 누군가 열어젖혔다. 백마를 탄 동자 태백산신과 호랑이를 거느린 백미와 흰 수염이 휘날리는 할아버지 소백산신이 있다. 이야기로는 단종과 단종의 숙부 금성대군을 모신 곳이라고 한다.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 요즘도 무속인들의 발길이 잦다. 고치령은 소백산에 속하지만, 태백산과 소백산을 연결하고 있다.
국망봉으로 향한다. 국망봉에 다다를 때까지 모든 이정표는 국망봉-고치령으로 안내되고 있다. 잠시 비알을 올라서자 낙엽 푹신한 능선길이다. 불과 한 달 새 단풍은 나목으로 바뀌었다. 자연에서 계절은 가장 뚜렷한 결과물을 낸다.
산행코스는 고치령(760m)~연화동 삼거리~늦은맥이재~상월봉(1394m)~국망봉(1420m)~어의곡 삼거리~비로봉(1439m)까지 가서 달밭골로 하산해 삼가탐방지원센터까지 이어진다.
강인한 생명력의 참나무
소백의 능선길은 다른 구간에 비해 그리 힘들지 않다. 능선의 해발고도는 1000m를 오르내리다가 상월봉 가까이 가서는 한껏 고도를 높인다. 크게 오르고 내리는 구간이 없는 것은 이곳이 소백산 국립공원의 등줄기라서 그런 것일까. 능선의 일렬로 선 나무들이 오늘이 11월 11일임을 상기시킨다. 일행 중 한 분이 이번 산행 참가자 모두에게 '빼빼로' 한 상자씩을 돌렸다. 초콜릿이 듬뿍 묻은 과자는 산행을 하기도 전에 다 먹었다.
단체 산행을 하면서 늘 고마운 것은 나눔이 많다는 것이다. 이미 버스에서 내리기도 전에 최연장자 '1번 형님'이 제공한 찰떡 하나를 먹었고, 또 주최 단체에서 나눠주는 팥빵과 음료도 받았다. 이번에는 나눔이 유달리 풍성하다. 탄산음료는 나중에 목마르면 먹을 생각으로 배낭에 챙겼다.
상큼한 귤, 달콤한 단감, 사탕, 커피, 막걸리 한잔, 피망, 게살죽, 박하사탕, 사과, 미숫가루, 쌀눈 죽 등등이 산행의 소중한 에너지로 쓰였다. 다 참가자의 배낭에서 나온 정이다. 소백의 정이 끈끈했다. 그런 때문일까. 능선 한쪽에 뿌리가 거의 다 드러난 참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덩치를 키워냈다. 웬만한 참나무보다 훨씬 우람하다.
죽을 위기를 겪었지만 강인한 생명력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나무가 경이롭다.
운동장처럼 넓은 낙엽 광장
갑자기 주위가 환해진다. 운동장만 한 넓은 공간이 온통 낙엽으로 뒤덮여 있다. 이렇게 넓은 공간이 능선에서 발견되다니. 사람의 보는 눈은 비슷한 모양이다. 이정표를 보니 마당치다. 마당처럼 넓은 고개란 의미로 보인다. 아직 국망봉까지는 8km 이상 남아 걸음을 재촉한다.
나무들은 불과 한 달 새 겨울 준비를 마쳤다. 나무가 옷을 벗자 겨우살이가 푸른게 돋보인다. 빨간 참빗살나무 열매는 눈에 금방 띄어 새들의 먹이가 되기 좋겠다. 그 씨앗들은 소백 능선 곳곳에 퍼질 것이다. 공생의 계절이 겨울이다.
초겨울 산행은 덥지도 춥지도 않아 딱 좋다는 이들이 많다. 이한철 후미대장과 동행하던 여성 두 분의 발걸음이 유달리 가볍다. 오늘은 왜 후미를 지키지 않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후미가 아니에요. 오늘은 중간이라 불러주세요." 이 후미대장은 오랜만에 산행에 참여해 느긋함을 즐기는 김창진 총대장과 함께 든든하게 뒷배가 되고 있다.
소백의 능선은 지금 영하 온도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발밑의 서걱거림이 지속된다. 자세히 보니 얼음이다. 땅밑 수분이 영하 날씨에 얼음이 되어 솟구쳤다. 흰 실타래 같기도 하고, 예쁜 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얼음꽃이 피었다. 겨울에는 야생에서 꽃이 피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이다. 이렇게 예쁜 얼음꽃이 피니 능선은 또 화려한 겨울 장식을 마친 셈이다. 이제 눈까지 온다면, 소백의 산줄기는 또 다른 멋진 풍경을 연출할 것이다.
고치령에서 3시간 걸리는 연하동 삼거리에 도착했다. 이제 2시간 남짓 걸으면 국망봉이다. 연화동으로 탈출하는 길은 의외로 짧다. 3km인데 1시간 40분이면 하산할 수 있는 모양이다. 소백산국립공원의 그림 이정표는 적절한 곳에 잘 설치돼 있다.
물푸레나무 군락지 황홀해
흰 페인트를 나무에 군데군데 칠한 것 같은 물푸레나무, 어릴 때는 흰 수피가 더욱 선명하다. 홀로 있는 나무도 아름답지만, 군집한 나무의 풍경도 독특한 매력이 있다. 능선 좌우에 도열한 듯 늘어선 물푸레나무 군락지를 지나니 늦은맥이재다. 어의곡주차장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다. 국망봉은 2.1km 남았다. 애써 선두를 따라잡았는데, 신세균 수목산악회장이 달달한 단감을 주면서 좀 더 쉬다 오란다.
늦은맥이재는 휴게 시설을 설치하는지 헬기로 운반한 듯한 톤백 여러 개가 놓여 있다. 상월봉으로 간다. 고도를 조금씩 올린다. 이끼가 많은 응달쪽으로 접어들었다. 마치 보호색처럼 된 짐승의 똥이 있다. 바위 위의 이끼와 어울려 깜박하면 손으로 짚을 뻔했다. 그래봐야 산 열매 씨앗과 껍질이다.
우산살처럼 펼쳐져 화려한 푸름을 자랑하던 봄날의 관중은 추위에 손을 들었다. 줄기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다. 그리고 서서히 푸름을 잃어갈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뿌리로 갈무리되면서 내년 이른 봄 또 아름다운 이파리를 솟구쳐 낼 것이다.
상월봉은 절대 우회 못 하지
국망봉이 1.1km 남았다는 이정표는 상월봉을 우회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앞서간 사람들이 우회로를 두고 굳이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기에 정말 따라가야 하는가 싶었다. 결론적으로 안 갔으면 크게 후회할 뻔했다. 산행은 모름지기 정상에 올랐을 때의 느낌도 좋지만, 정상을 온전히 바라보는 풍경도 훌륭했다. 상월봉 풍경은 국망봉에서 비로봉으로 이어진 소백의 맏 능선과 사방팔방으로 뻗어 내려간 능선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과 산 사이에 머무는 구름바다. 일망무제의 느낌은 오히려 상월봉이 비로봉보다 낫다는 느낌이다.
한참을 머물며 풍경을 카메라와 마음에 담았다. 먼저 출발한 일행이 멀리 국망봉으로 오르는 이들이 가물가물 보일 무렵 다시 걸음을 뗀다. 상월봉에서 국망봉으로 가는 길엔 산철쭉 군락이 도열하고 있다. 산철쭉이 피는 5월 말에서 6월 초까지 이곳에 온다면 잊기 힘든 꽃 터널을 걸을 수 있겠다.
옛 문헌에는 국망봉을 소백의 최정상이라고 기재해 놓았다. 아마도 산 아랫마을에서는 국망봉이 제일 높게 보이는 모양이다. 초암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에 이르니 비로봉은 2.8km 후에 있다.
아 소백산 비로봉에 다다르다
극망봉에서 비로봉을 가는 길에 특이한 모양의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제멋대로 굽은 나무다, 능선길에 큰 나무는 없다. 해발고도가 높은 탓이리라. 멀리 우람한 비로봉 능선이 보인다. 긴 덱 길이 비로봉까지 이어져 있다.
바람이 많은 탓일까. 나무 한 그루 찾을 수 없다. 긴 풀들은 이미 머리를 남쪽으로 누이고 드러누웠다. 가지런한 자세는 북서풍에 대응하는 자연의 법칙이다. 다들 정상석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머무는 시간이 길수록 추위가 엄습한다. 온도계를 살펴보니 양지인데도 영하 7도다. 삼가주차장을 향해 하산한다.
산길은 잘 정비돼 있어 전혀 무리가 없다. 설악산국립공원 한계령 하산로와 비교하면 탄탄대로다.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민가가 나온다. 물어보니 주민의 집이다. 안전 산행하시라고 인사해 준다. 식당업을 하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분이다.
달밭골 마을에 도착했다. 1번 형님과 박경효 단장이 1번 형님과 함께 막걸리판을 펼쳐 놓았다. 연거푸 몇 잔을 받아 마신다. 달밭골 조형물은 뭔가 전설을 이야기하는 모양새다. 이미선 간사가 조형물 사이에 자리 잡았다. 잘 어울린다. 그렇게 초겨울 소백 능선을 걸었다.
2023-11-16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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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오대산은 벌써 단풍 절정...가을과 겨울의 공존
해가 뜨자 온통 붉고 노란 단풍이 주위를 에워쌌다. 부산에서 덥다가 시원하다가 변화무쌍한 미궁의 계절 속에서 살다 왔는데, 오대산은 이미 겨울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절정이라고 해도 좋을 단풍이다. 올해는 단풍이 좋지 않다지만, 해발 1000m를 넘는 백두대간은 달랐다. 특히 노란 단풍이 많은 오대산은 몽롱한 늦가을을 만끽하게 했다. 바람이 세찬 구간은 잎을 다 떨구고 이미 겨울 채비를 한 나무도 있다. 산행 막바지에 겨울을 재촉하는 비를 맞으니, 손이 시렸다. 모든 것을 버리지만, 또 새로움을 준비하는 계절이 오고 있다. 겨울이다.
다소 만만하게 시작한 길
백두대간 오대산 구간은 다른 구간에 비해 거리가 길지는 않았다. 설악산 구간에서 고생한 기억이 생생해 23km 남짓의 산길을 만만하게 본 것도 사실이다. 산악 날씨를 확인하니 최저 4도까지 떨어진다. 물론 새벽 기온이다. 조금 두꺼운 옷을 챙겼다.
그런데 출발부터 살짝 걱정하게 하는 정보가 있다. 산행 안내를 맡은 부산등산아카데미 제1기 백두대간종주대(단장 박경효)의 이경규 선두 등반대장이 산행 코스를 설명하며 이번 산행은 다소 체력이 요구되는 구간이라고 했다.
진고개에서 구룡령까지 크고 작은 오르내림이 무려 15군데나 있다는 것. 그중 몇 개는 오르내림이 심하고 특히 막판에 '악' 소리가 나는 구간이 있으니 체력 안배를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달여 만에 나서는 산행이라 더욱 체력이 걱정됐다. 거기다 이 구간은 진드기 출몰 지역이라고 했다. 다행히 기온이 낮아서인지 진드기가 활동하지는 않았으나 산행 내내 조금이라도 따끔거리거나 간지러우면 신경이 쓰였다.
진고개 장엄한 밤 풍경
오대산 진고개 주차장은 유독 넓었다. 밤 기온은 서늘했고, 가로등은 어둠을 겨우 밀어내는 정도의 밝기로 우뚝 서 있다. 그 덕분에 하늘의 별이 총총하다. 북두칠성을 또렷하게 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가야 할 길만 아니면 몇 시간이고 하늘을 보며 앉아 있고 싶었다.
동대산을 향해 출발한다. 다들 방풍 겉옷을 꺼내 입었다. 산길이 가파르다. 에누리 없는 상승고도. 나중에 고도표를 확인해 보니 해발 1000m 쯤에서 400m 이상 치고 올라가는 오르막길이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동대산(1433m)까지 1시간 정도를 걸어 올랐다.
오대산의 주봉은 비로봉(1563m)인데 동대산과 두로봉(1422m), 상왕봉(1491m), 호령봉(1561m) 등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어 오대산이라 불린다. 아름드리 전나무가 아름다운 사찰 월정사도 품고 있어 월정사 템플스테이도 인기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동대산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지만, 사위는 검다.
때아닌 한우 논쟁
빛이 희고 단단한 차돌박이. 그런 모양의 석영 바위가 덩그렇게 서서 어둠을 밝힌다. 현 위치 '차돌백이' 이정표 옆에 두 개의 커다란 석영 바위가 산꾼을 맞이한다. 이 구간엔 마늘봉도 있었다. 누군가 맛난 소고기구이를 말한다. 즐거운 상상에 도파민이 분비되는지 모두 한바탕 웃는다. 이참에 남도의 산꾼답게 의령 한우산을 끌어오는 이가 있다. 한우산은 그 한우가 아니라(의령 한우산은 찰비산으로 찰 한(寒) 비 우(雨)자를 쓴다고 한다)고 신세균 수목산악회 회장이 핀잔을 준다. 산행 도반들의 엎치락덮치락 대화가 재미있다. 여기는 오대산이다. 어쨌거나 차돌박이와 마늘만 해도 푸짐한 한우 한상은 거뜬하겠다.
동쪽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다. 쓰러진 물박달나무 곁을 지난다. 주변이 밝아오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붉게 물든 단풍이다. 물박달나무의 흰 수피와 묘하게 대비되는 강한 색상이 지금의 계절을 규정하라고 재촉한다. 가을인가? 여름의 끝자락. 아니다 이곳은 깊은 가을이고 어떤 곳은 초겨울이라고 해도 좋다. 대간은 계절이 반 박자 정도 앞서가는 모양이다.
반할 수밖에 없는 숲길
밝아온 빛이 저마다의 색깔을 뽐내는 나뭇잎을 깨우치니 온산이 울긋불긋 물들었다. 이미 떨어진 잎은 잎대로, 선선한 새벽바람에 흔들리는 노랗고 붉은 단풍은 또 그대로 아름답다. 오래된 숲에서 볼 수 있는 고사목과 나무둥치가 뻥 뚫린 고목이 산꾼에게 연거푸 인사한다. 그들의 안부를 물어야 하는데 갈 길이 멀어 묵례만 하고 지난다.
유독 둥치에 구멍이 뚫린 나무가 많아 자세히 보니 속이 검게 그을린 흔적이 있다. 어느 때인지는 모르나 화마의 피해를 본 것 같아 안쓰러웠다. 그러나 저 공간에 산짐승들이 깃들어 겨우살이를 할 것을 생각하면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15번의 오르내림에 잔뜩 겁을 먹었지만 아직 체력이 남아서인지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두로봉(1422m)에서 상황봉으로 오대산의 절경을 즐길 수 있는 길이 있다. 다음에 꼭 와 봐야겠다고 다짐 하나를 적는다.
만월봉 지나자 천년 주목
만월봉(1281m)쯤에서부터 체력이 서서히 바닥나기 시작했다. 만월봉에는 북부지방산림청 홍천국유림관리소가 세운 커다란 백두대간 등산로 안내도가 있다. 안내에 따르면 만월봉은 바다에 솟은 달이 온 산에 비친다고 하니, 바다에서도 잘 보이고, 산에서도 바다가 보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주위가 점점 짙은 운무에 둘러싸여 시나브로 어두워지는 중이어서 바다는 볼 수 없었다. 남은 구간에는 응복산(1359m)과 약수산(1306m)이 버티고 섰다. 차돌박이와 궁합을 맞춘(?) 마늘봉(1127m)도 있다.
만월봉에서 짙은 가을빛으로 물드는 떡갈나무 군락을 뒤로하고 응복산으로 간다. 한눈에 보기에도 오랜 세월의 흔적을 온몸에 새긴 아름드리 주목 한 그루가 있다. 둥치의 반은 썩어서 반원 형태이지만, 여전히 잎은 푸름을 자랑하고 있다. 나무의 기운이 좋아서인지 여러 사람이 쉬어간 흔적이 보인다.
응복산에 도착했다. 이곳 일대의 정상석은 돌이 아니라 금속판으로 돼 있다. 산세가 하도 험한 곳이라 운반하기 좋도록 그리 만들었는가 보다. 오늘의 목적지인 구룡령까지는 6.71km가 남았다는 오래된 이정표가 있다. 산꾼들의 지도에는 대략 6.8km로 안내돼 있다.
누적된 피로에 비까지
응복산을 지나자 산길이 한껏 고도를 낮춘다. 얼마나 내려가는지 두려울 정도로 떨어진다. 그러다가 다시 오름길이 시작되면서 작은 봉우리 하나를 넘는데 마늘봉(1127m)이다. 선두와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중간 대오를 책임진 명용익 산행대장이 적당한 거리로 안내해 준다. 너무 처지지 않게, 그러나 너무 힘들지 않게 챙겨주는데 민폐여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힘들기는 산행 베테랑인 황계복 부산등산아카데미 강사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물론 힘들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산행을 마치고는 "응복산~약수산 구간이 너무 지루했다"고 말했다.
약수산을 2.6km 정도 앞에 두고 제법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산행 전날 예보를 봤을 때 1시부터 비가 올 것이라고 했다. 기상예보가 어지간히 맞다. 모두 비옷을 꺼내 입었다. 모자챙에서 낙숫물이 뚝뚝 떨어진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치고는 제법 거세다. 빗줄기에 단풍이 든 잎사귀도 우수수 떨어진다.
손끝이 시릴 정도로 기온이 떨어진다. 황 강사는 이런 환절기가 등산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도시 기온만 느끼고 가볍게 산행을 준비했다가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마침내 구룡령에 도착
약수산까지의 길은 능선이 좌우로 매우 가팔랐다. 지형이 험하니 차단봉을 세워 산꾼들의 안전을 도모했다. 된비알을 오른다. 끝이 언제일지 몰라 위는 쳐다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남은 길을 가늠하기 위해 고개를 든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젖은 산길을 올라 드디어 정상에 오른다. 탁 펼쳐진 풍경을 기대했는데 온통 '곰탕(비안개)' 조망이다. 그래도 이 장소가 평소엔 인제나 한계령은 물론 설악산 대청봉과 속초시, 양양군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인 모양이다. 오래된 사진 안내도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일탈하고 있다.
약수산 정상으로 착각했는데 정상석은 없고 한 대간꾼의 추모비만 있다. 가던 길을 조금 더 가니 약수산 정상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구룡령의 동쪽에 우뚝 솟은 약수산은 남쪽 골짜기의 약수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약수산 아래에는 명개약수가 있다. 명개약수는 철 성분이 있는지 샘 주변이 붉은 주황색이다. 인근에 불바라기약수, 갈천약수, 상봉약수 등이 있어 이 일대가 약수골이다.
약수산에서 구룡령까지는 심한 내리막길. 목책 계단과 돌계단이 번갈아 나오는데 보폭을 맞추기 쉽지 않다. 명 대장이 "아래로 내려올수록 단풍 때깔이 곱다"고 말했다. 생육환경이 좋으면 단풍도 더 붉다.
그렇게 느지막이 강원도 영동(양양)과 영서(홍천)를 가르는 분수령인 구룡령에 도착했다. 11시간 걸렸다.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
2023-10-1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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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명불허전 설악에 올라 겸손을 한껏 배운다
예행연습도 했더랬다. 백두대간 설악 구간 안내문에는 총거리 23.3km로 15시간이면 마친다고 돼 있었다. 다 탁상공론이다. 현장을 모르는 사람이 작성하지 않았을까. 왜?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으니까. 공룡능선에서 몸에 이상 신호가 왔다. 선경을 보며 몸과 마음을 추스른 것도 잠시. 배낭마저 중청대피소에 두고 설악산 최고봉 대청봉(1708m)에 올랐으나 내려오는 한계령까지는 멀어도 너무 멀었다.
보통 이 구간은 2번으로 나눠서 하는 이도 많다. 특히 부산에서 이동 거리가 길어 차로 5시간 이상 걸리는 곳이므로, 가능하면 느긋하게 하는 편이 낫겠지만, 중간에 내려오는 것도 정답은 아니다. 대간까지의 접근성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 대간 종주를 준비하는 이들은 단박에 끝내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좋은 산에 다녀와서 이렇게 징징거리는 것은 그만큼 사무치게 기억이 남는 산행이었다는 뜻이려니, 양해를 부탁드린다. '설악은 역시 설악다웠다'로 이번 산행을 표현하고 싶다. 흔히 어머니 산이라 부르는 지리산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바위가 곧 봉우리였다. 흙길마저 많지 않아 커다란 너덜겅을 징검다리 건너듯 걸어야 하는 구간이 많았다. 그래도 설악은 설악이다. "이 정도면 중국 장자제 여행 갈 것 없겠다"는 극찬을 들은 산이다.
설악의 참모습을 아는 이들이 많아서인지 여름이 막 물러가는 9월 중순의 설악산은 꽤 붐볐다. 거의 맨몸으로 달리는 사람, 키만 한 짐을 지고 묵묵히 걷는 사람, 아이와 외국인까지. 설악의 매력이 이들을 마구 불러 모으고 있었다. 청춘 시절 대청에 올라 오래 기억에 남았는데, 두 번째 찾은 설악산. 왜 자주 오지 못했던가 이제야 후회한다.
마등령 삼거리까지
설악 구간 대간은 미시령에서 한계령까지로 주로 끊는다. 미시령~마등령 구간은 비법정탐방로다. 이 구간을 제외하더라도 공룡능선, 대청봉, 한계령까지의 길은 험난하다. 우선 마등령까지 가려면 속초 방면 설악산 소공원에서 비선대를 거쳐 삼거리까지 6.5km를 4시간 가까이 올라야 한다. 내설악에서 출발하는 코스는 백담탕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한다. 백담사까지 7km 구간은 셔틀버스가 있다. 백담사에서 영시암까지 3.5km이고, 또 여기서 오세암까지는 2.5km다. 오세암에서 마등령까지는 1.4km의 덱 계단이다. 내설악도 걷는 구간이 7km가 훌쩍 넘어 어느 쪽이나 마등령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미시령에서 황철봉과 저항령을 지나 마등령까지 가는 비탐 구간도 무려 8km가 되는데 너덜지대가 많아 6시간 이상 걸리는 어려운 구간이다.
부산에서 저녁 9시에 출발해 출발지엔 다음 날 오전 3시에 도착해 산행을 바로 시작했다. 산에서 일출을 봤다. 그리고 설악에서 장엄한 일몰을 봤다. 헤드램프를 또 꺼내서 착용하고 어둠을 뚫고 한계령(오색령)에 도착했다. 오후 8시 39분이었다. 17시간 40분의 긴 산행이었다.
부산 수목산악회 신세균 회장이 "백두대간 전체 구간 중에 가장 난도가 높은 구간"이라고 설명했다. 오색리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출발해 부산에 오니 다음 날 새벽 5시가 가까웠다. 무박 3일의 긴 일정이다.
공룡능선 고작 5km?
마등령에서 희운각까지 가는 구간을 설악 공룡능선이라고 부른다. 왜 그런지는 직접 보면 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설악의 바위는 희고 공룡의 송곳니처럼 하늘로 치솟아 있다. 특히 공룡능선 구간은 길이는 짧지만 10km 이상의 산길을 걷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것이 정평이다. 국립공원에서도 이 구간은 '매우 어려움'으로 표시하고 등산 구간을 빨갛게 강조해 두었다. 5.1km인데 280분(4시간 40분)이 걸린다고 안내했다. 이번에 실제 걸어 보니 마등령 삼거리에서 희운각까지는 4시간 남짓 걸렸다.
설악의 바위 틈새마다 야생화가 피어 있다. 산오이풀, 구절초, 솔체꽃, 금강초롱, 산부추, 솔체꽃, 투구꽃이 제멋을 제대로 뽐내고 있다. 특히 보랏빛 투구꽃이 지천이어서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참 늦었지만 일출을 본 이야기를 하려 한다. 협곡 사이로 바다가 보인다. 그 바다 수평선에서 해가 이글거리며 솟아오른다. 모두 발걸음을 멈추고 숨죽이며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촬영하기 시작한다. 추억은 전화기 속에 침잠한다. 누구나 그렇다.
앞서가던 누군가 '똥 주의!'라고 외친다. 발아래를 주시하며 걷는다. 하트 모양의 까만 염소 똥이다. 이것은 산양의 똥. 막 배설한 것처럼 반들반들 윤기가 있다. 고마움에 고개를 한 번 더 숙인다. 설악 케이블카에 또 얼마나 가슴 졸이고 있을까.
저 바위는 저 솔은
마등령 숲속에서 아침을 먹었다. 사람들이 북적인다. 간편한 복장의 외국인도 많다. 산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지 본인의 체력을 과신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성큼성큼 가는 것을 보면 체력이 남다르긴 한 모양이다.
커다란 바위 위에 천년송이 멋지게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도무지 가능하지 않은 입지 조건인데, 우람한 체구를 키운 것을 보면 자연이나 인생이나 가늠할 수 없는 기적이 존재하는 것 같다.
겨우 1.2km를 걷는데 1시간이 걸린 것 같다. 희운각 대피소까지는 3.9km가 남았다. 철봉을 잡고 한껏 힘을 줘서 올라가는 구간이 있다. 끙~ 하며 다리에 힘을 주고 올라서는데 허벅지 근육에 경련이 생긴다. 쥐가 온 것이다. 쥐를 잡을 고양이가 필요하다.
갈 길이 구만리인데 벌써 몸에 이상이 생겼다. 조금 힘을 주면 다리가 멈출 것 같다. 엉거주춤 걷고 있는데 동행한 황계복 부산등산아카데미 강사가 불편하냐고 묻더니 배낭에서 약을 꺼내주었다. 앰풀과 알약 두 개를 단숨에 삼켰다. 희운각에서 포기해야 하나 생각했는데 다소 걸을 만해서 계속 간다.
고릴라 바위와 선경
옆에서 보면 고릴라의 상체를 닮았다는 고릴라 바위. 모두 좋아하며 기념사진을 찍는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킹콩을 닮았다. 고릴라라고 하기엔 너무 거대했다. 그 옆에는 돌고래를 닮은 바위도 있다. "보이는 만큼 보이고, 생각하는 만큼 느낍니다." 한 일행이 정리했다. 북한산에서 본 코끼리바위가 생각났다. 아무리 보아도 찾지 못했는데, 누군가 옆에서 일러주어서 코끼리를 만날 수 있었다.
새벽에는 별이 총총했고, 해가 뜨니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이 넘실거렸는데. 어디선가 비구름 같은 것이 몰려와 백두대간의 동쪽을 점령한다. 국립공원 안내문에도 공룡능선 구간은 기상이 시시각각 변하는 곳이라고 돼 있다. 북쪽으로 기준을 삼으면 오른쪽 동쪽은 구름이 짙어 있고, 대간의 왼쪽 내설악 서쪽은 푸른 하늘이다. 신기한 자연 현상이 빚어낸 선경이다. 그 그림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다.
촛대바위 아래 생명수
이미 오르막에서 가져온 생수 2리터를 소진한 사람이 있었다. 물 부족이었다. 배낭에 얼음까지 3리터를 챙겼는데, 얼음은 반 넘어 녹았고, 가져간 물은 거의 다 마셨다. 희운각대피소까지 가야 물을 구할 수 있다는데 막막했다.
희운각대피소는 아직 2.4km나 남았다. 현재의 걸음으로라면 2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다. 희소식이 들렸다. 부산등산아카데미 제1기 백두대간종주대(단장 박경효) 이경규 선두 산행대장이 촛대봉 아래에서 물을 구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마등령과 희운각 대피소의 중간지점에서 물을 구할 수 있어 행복했다. 다만, 시에라컵 등이 있어야 물을 원활하게 수통에 담을 수 있다. 산행할 때는 종이컵이라도 하나 챙겨가는 게 맞겠다. 정 컵이 없으면 나뭇잎이나 가지로 물줄기를 만들 수 있는데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려워할 것이 분명하다.
물을 가득 채우고, 다시 공룡의 등뼈를 걷는다.
산양이 신령처럼 사는 곳
설악산 산양은 천연기념물이다. 큰 바위가 있는 험준한 산악 지역에 주로 서식한다. 험준한 지형을 택한 것은 생존 본능일 것이다. 크게 이동하지 않고 한 곳에 머물러 서식하는 습성이 있다고 했다. 2~5마리 정도가 군집한다는데 수컷은 단독 생활을 한다고 국립공원에서 안내해 놓았다.
염소와도 다르고 양과도 조금 다른 산양은 설악산에서 수난의 상징처럼 되었다. 개발과 보존의 틈바구니에서 산양은 점점 구름 속으로 숨어들 것이 분명하다. 동해에서 밀려온 것이 분명한 구름이 공룡능선을 휘감고 있다. 조금씩 드러난 바위 봉우리가 기묘한 풍경을 선사한다.
사람들이 아예 자리 잡고 앉아 풍경 감상 삼매경에 빠진다. 구름이 짙었다가 옅어지곤 한다. 반복되는 풍경에 지루할 틈이 없다. 감탄만 나오니 비좁은 조망지가 북새통이다. 그래도 누구 하나 짜증 내는 사람이 없다. 여기는 하늘나라다.
희운각대피소까지는 1km가 남았다.
보라색 투구꽃 이색 풍경
투구꽃은 진보라색이다. 장수의 투구처럼 생긴 모양이다. 한국의 속리산 이북 지역에만 분포한다고 한다. 그래서 남쪽의 얼치기 산꾼에게는 생경한 꽃이었다. 꽃 모양이 로마 병정의 투구처럼 생겼다고 설명한 책도 있다.
어쨌든 이맘때 설악 백두대간은 투구꽃 세상이다. 묘한 색상이 깊숙한 느낌이어서 자료를 찾아보니 뿌리는 초오라는 독초로 약재로 쓴다고 한다.
바위 구간이 험한데 별도의 계단은 만들지 않고 쇠 난간을 박아 놓았다. 스틱은 거추장스럽지만, 등산 초보자만 아니면 무난하게 지나갈 수 있다. 국립공원의 관리 형태가 북한산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백운대 오름길과 비슷한 것은 혼자만의 느낌일까.
희운각대피소는 한창 공사 중이다. 물은 산행로 옆에 엑셀 파이프에서 쿨쿨 잘 나오고 있었다. 지하수는 아니고 계곡물이라고 한다. 지하수가 아니면 어떠랴. 물을 빈 병마다 채워 넣었다. 점심을 먹고 대청봉을 향해 오른다.
빈 짐의 무게도 무겁다
희운각에서 대청봉으로 오르는 길은 끊임없이 고도를 높이는 구간이다. 마의 구간이라 불린다. 딱히 다른 이름이 필요치 않다. 그도 그럴 것이 2.5km 구간에 고도는 500m 이상 한껏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대청까지 2시간 이상 걸린다.
당일 오후 2시에 희운각대피소를 출발해 1시간 15분을 쉼 없이 올라 소청에 도착했다. 한숨 돌린 뒤 중청대피소를 향해 걷고 중첨 삼거리에서 배낭을 벗어 던진 후 대청봉은 3시 59분에 도착했다. 딱 2시간이 걸린 셈이다.
소청에서는 봉정암으로 하산하는 길이 있다. 내설악이 한눈에 보이는데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중청삼거리에서 9월 15일 이후 숙박 기능이 사라질 중청대피소를 향해 걷는다. 중청대피소는 대피소 기능은 유지한다고 한다. 일행 한 사람이 약간 비싼 느낌이 드는 생수 한 병을 샀다. 대청봉을 향해 걷는다. 주변이 일망무제라 가슴은 탁 트이지만, 누적된 피로는 갔다가 돌아와야 하는 부담과 겹쳐 감동을 반감시킨다.
대청봉 정상석은 붉은 바탕이 각인돼 있다. 멀리 속초 시내와 동해가 보인다. 왜 여기까지 왔던가. 또 가야 할 길은 얼마인가? 갈 수 없는 북녘의 백두대간, 남으로는 점봉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아득하다.
한계를 시험하는 것인가
대청봉에서 한계령까지는 8,3km. 애초 지도로 집에서 산행 구간을 답사했을 때는 매우 평탄한 길로 생각했다. 한계령 자체가 해발이 높은 지역이어서 생각으로는 설악산 대청봉으로 오르는 가장 쉬운 길(?)로 착각했다. 하산 이후 모든 생각을 지웠다. 특히 한계령을 목전에 두고 산 하나를 다시 올랐을 때는 욕이 나왔다.
산길은 보통 2km를 한 시간 정도에 걸을 수 있다고 계산한다. 설악에서는 이 계산법이 맞지 않지만. 4시간 정도면 하산할 것으로 생각했다. 특히 하산길이니 쉽기까지 할 것 아닌가. 대청봉도 올랐겠다. 즐겁게 하산한다.
그런데 가도 가도 길이 끝나지 않는다. 4시에 대청봉에서 하산을 시작해 끝청 전망대까지 1시간이 걸렸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오후 5시다. 끝청봉(1610m)에서 한계령 갈림길까지 얼마나 걸릴지도 몰랐다.
다만 길가에 무수히 핀 금강초롱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보라색도 있고 흰색도 있다. 왜 이리 하산길이 긴지 아무도 애기 해주는 이는 없다. 한때 함께 걷던 일행들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물을 나누고 기분이 좋아지다
한계령 방향에서 오던 남녀 청년 학생 3명과, 앞서 하산하던 황계복 강사가 멈춰 서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물 이야기다. 이야기인즉슨 이 친구들은 남교리에서 출발해 서북능선을 거쳐 중청대피소까지 가는 중인데 물이 모자라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산에서는 절대 타인에게 물을 빌리면 안 된다'는 것은 철칙. 그런데 그런 강의를 한 황 강사에게 물을 요구했다. 황 강사는 배낭의 물 한 병을 아낌없이 줬다. 다소 화색이 돈 학생들과 그다음으로 만났다. 물 계산을 잘못해 몇시간 째 입술만 축이면서 오르고 있다고 했다. 물 1리터를 나눴다. 희운각에서 지고 온 귀한 물이다. 이상하게 기분은 좋았다. 학생들이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다.
뒤에 오던 명용익 중간대장도 학생들에게 물 나눔을 했다. 목이 말랐던 학생들은 복을 만났다. 그들에게 행복한 기억이 되었으리라 우리도 그랬다.
다시 헤드램프를 켜다
어둠이 또 내렸다. 새벽 깊은 어둠 속에서 산행을 시작했는데 해가 졌다. 헤드램프를 켜고 묵묵히 걷는다. 지금의 오직 한 목적은 한계령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다. 너덜지대가 많다. 징검다리처럼 뛰어 건너야 하는데 자칫 발이라도 헛짚으면 큰일 나겠다. 등산화도 너덜너덜해지고 있어 언제 밑창이 떨어질지 모른다. 악재는 겹친다더니 바짝 긴장한다.
아침에 보았던 햇살 속의 산오이풀, 구절초를 떠올려야 하는데 어둠 저편의 심연 같은 칠흑 세계만 깊다. 한계령 3.1km를 남기고 휴대전화 배터리도 소진됐다. 비상 배터리를 연결해 충전하며 걷는다.
내리막길에서 누군가의 불빛이 보인다. 80세가 훌쩍 넘은 '1번 형님'이시다. 전 구간을 함께 하지 않고 오색에서 올라와 대청봉을 거쳐 하산하는 중인데 막판에 속도가 줄었다. 명 대장이 1번 형님을 케어하며 내려오기로 했다. 배낭이라도 들어드릴지 생각했지만, 마음과 달리 손이 나서질 않는다. 박경효 단장은 1번 형님과 코스를 함께 했는데 노고가 짐작된다.
한계령은 내리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검은 산 하나가 또 떡하니 막고 섰다. 올라야 내려갈 수 있다. 드디어 탐방지원센터 입구에 도착한다. 닫힌 문은 자동문이어서 내려갈 때는 자동으로 열린다. 이 시간에 올라오는 문은 열리지 않는다. 한계령 도로를 닦을 때 희생한 이들을 기렸다는 위령비를 보며 잠시 내려서는 백두대간 오색령이다. 이미 어둠이 한껏 내린 오후 8시 40분이다.
1시간 뒤에 박한철 후미대장과 일행 2명도 안전하게 하산했다. 설악산, 명불허전이다.
▲설악산 공룡능선
공룡능선은 그 자체가 영동과 영서지방의 구분 선이다. 마등령에서 시작해 희운각대피소 무너미고개까지 약 5km를 공룡능선이라 부른다. 2013년 대한민국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공룡능선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능선이 공룡의 등뼈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희고 매끈한 바위 봉우리는 대보화강암이다. 중생대 쥐라기에 생성한 것이니 공룡과 연관성이 많다. 평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아 느긋하게 걸으면 시간당 1km가 적당하다.
일부러 천천히 걷지 않아도 기암괴석과 절경에 눈이 팔리기 일쑤다. 풍광이 좋은 자리에서 느긋하게 쉬면서 걷는 것이 최고다. 단, 그렇게 하려면 희운각대피소나 소청대피소를 사전에 예약하고 1박 2일 일정을 잡아야 한다.
길이 예전에 비해 많이 넓어졌다(?)고는 하지만 정체 구간이 생긴다. 특히 단풍철에는 오르고 내리는 산꾼들도 혼잡하기에 체증을 각오해야 한다. 가능하면 오르는 이에게 우선권을 주는 게 맞다.
공룡능선에서 볼 수 있는 운해는 동해의 수증기가 공룡능선의 찬 공기와 만나 구름이 되고, 이 구름이 모여 봉우리 사이로 멋진 구름바다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국립공원 대표 경관 가운데 제1경으로 꼽히기도 한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체력 안배와 무리하지 않는 것이다. 가장 많은 산행 조난자가 발생하는 곳도 이 구간이니, 명승을 즐기려면 투자가 필수다.
2023-09-1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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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백종주] 완주기를 쓰고 싶었으나…도전기를 쓰다
부산에는 훌륭한 산행 코스가 많다. 특히 국립공원 지정을 염원하는 금정산은 지리산 못지않은 수많은 골짜기와 등산로가 있어 시민들의 '녹색 지대'가 되고 있다. 금정산은 낙동정맥이 다대포에서 마무리되기 전 우뚝 솟은 진산이다. 이 낙동정맥의 일부 구간과 금정산 북릉이라 불리는 양산 계석마을~갑오봉 구간을 넣어 금백종주라 부르는 코스가 있다.
금백종주는 주로 양산 계석마을에서 시작해 부산 사상구 주례동 계림초등학교까지 이어지는 도상거리 약 25km에 이르는 구간이다. 걷는 시간만 10시간 이상 걸리는 꽤 긴 코스를 하루에 종주하는 일종의 챌린지가 유행한 지 좀 오래됐다.
백두대간 훈련 코스로
금백종주는 등산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하루에 완주할 수 있는 코스지만, 초급자나 긴 코스에 익숙하지 않은 이에게는 완주하기 힘든 코스이다. 도상거리가 25km가 훌쩍 넘는 데다 걷는 시간만 10시간이 넘게 걸리기 때문이다. 평지를 10시간 걷는 것도 힘든데 산길을 이렇게 오래 걷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험준한 백두대간 코스를 가기 전에 훈련용으로 금백종주를 하는 사람도 있다. 이번에 금백종주에 도전한 것도 설악산 공룡능선이 포함된 백두대간 구간을 가기 전에 훈련용으로 제안받았다.
금백종주는 계석마을에서 시작해 장군봉과 금정산 고당봉, 만덕고개, 쇠미산을 거쳐 백양산을 지나는 코스다. 결론적으로 이번 도전은 실패했다. 가장 큰 이유는 더위와 또 연이은 폭우였지만, 실상은 저질 체력과 의지박약이었다.
그래서 금백종주 도전기라고 쓰고, 정확하게는 금백종주 금정산 구간이라고 이름 붙인다. 이렇게 코스를 쪼개는 것이 무슨 의미랴 만은.
계석마을에서 출발해 산불 체험 등산로 구간~질메 쉼터~다방봉(536m)~736봉~장군봉(734.5m)~갑오봉~고당봉(801.5m)~원효봉(687m)~동문까지 약 12km를 오전 7시 30분에 시작해 오후 3시가 조금 넘어 마쳤다. 7시간 남짓 걸린 여유로운(?) 산행이다.
물의 기운으로 시작하다
온전히 두 끼 식량을 챙겼다. 군데군데 물을 보충할 수 있는 지점이 있지만, 더위를 예상해 얼음 1리터를 배낭에 재워 넣었다. 무게감이 느껴졌다. 도시철도 범어사역에서 양산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배차 간격이 꽤 길었다. 버스 배차 안내 표시만 보고 인근 카페에서 미숫가루 음료를 먹느라 여유를 부렸더니만, 어느새 버스는 지나가 버렸다.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 다음 버스는 16분 후 도착 예정인데, 도무지 시간이 줄지 않아 지인이 택시를 불렀다. 호출한 택시는 금세 도착한다.
다방삼거리에서 계석마을로 진입해 산행을 시작한다. 길가에 밤송이가 널브러져 있다. 자세히 보니 모두 까서 알맹이는 챙겨간 뒤다. 밤이라니, 벌써 가을이 왔다는 증거다.
양산시에서 등산로를 정비해 산길이 완만하다. 일부 구간은 야자매트도 깔아놓았다. 운무가 깔린 산길을 걷다가 깜짝 놀랐다. 누군가 벗어 놓은 고무신 두 짝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걱정할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요즘 열풍인 맨발로 걷는 사람이 벗어놓은 신발이었다.
이른 시간, 전날 폭우가 쏟아진 뒤인데도 아침 운동을 하기 위해 산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다들 물의 기운으로 흠뻑 젖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산불 체험 등산로 코스
한 아름이 크기 소나무들의 행색이 이상했다. 푸름을 자랑해도 아무도 눈총 주지 못할 상황인데, 숲은 검은 기운이 완연했다. 의문은 이내 풀렸다. 몇 해 전 발생한 산불로 홀라당 타 버린 숲이었다. 긍정적인 것은 불에 탄 나무를 바리깡으로 밀듯이 베어낸 강원도 지역과 달리 그대로 두었다는 것. 숲의 자연 회복을 믿는 산림 행정이 고마웠다. 이제 나무들은 오랜 세월을 지나며 차례로 쓰러질 것이고 햇빛을 충분히 받은 풀들은 무성했다가 결국엔 숲의 천이 과정에 동참할 것이다.
산불 구간 일부에 등산로를 내 '산불 체험 등산로'로 만든 발상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숱 검댕이 숲을 지나며 불조심을 안 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마을 뒷산인지라 향토적인 유적이 많았다. 소꼴을 하는 목동들이 소에 올라타기 위해 이용한 디딤돌 바위도 있었고, 나무꾼이 지게를 두고 쉰 질메 쉼터도 있다. 질메쉼터에서 또 가파른 산행이 시작된다.
이맘때 산길은 버선이 지천
산꾼들이 버섯을 대하는 태도는 이래야 한다. 일반적으로 산꾼은 버섯을 탐하면 안 된다. 부산등산아카데미 황계복 강사는 산행하며 버섯이나 약초를 보고 걸음을 멈추는 산꾼에게 "참 가지가지 한다"며 핀잔을 주는 선배가 있었다고 말했다. 산꾼은 오롯이 산을 타야 한다는 말이다. 버섯과 약초는 약초꾼에게,
비가 내리고, 기온이 다소 내려가면서 인근 야산에는 버섯이 하루가 다르게 피어난다. 버섯을 꽃으로 비유할 순 없겠지만, 천상의 버섯 화원이 이맘때 주변 산이다.
노랗고, 기괴하고, 먹음직스럽고, 빨갛고, 희고, 탐스런 버섯이 등산로 곳곳에 불쑥불쑥 솟아있다. 이름을 알 수 없고, 식용을 가늠할 수 없어 무감한 듯 지나친다. 그러나 독성의 금기를 뛰어넘는 유혹이 있긴 하다.
장군봉은 지척이라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가야 할 길이 천 리라(이때만 해도 완주를 꿈꿨다) 가급적 우회로를 이용했는데 특히 736봉을 앞둔 우회로에서 낮은 길로만 가다가 그 부끄러운 '알바'(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 오는 일)를 하고 말았다.
미니 산행대의 대장 자리를 후임에게 이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쉿 장군평전에 가을이 왔어요
쉽게 우회할 수 있어 장군봉에는 이번에도 오르지 않았다. 장군봉을 우회하자마자 넓은 초지가 펼쳐졌다. 장군평전이라 이름 붙은 곳이다. 억새가 피기 시작했다. 벼 이삭처럼 고개를 숙인 억새꽃이 지천이다. 이제 날씨가 조금 더 선선해지면 황금빛 억새가 가을바람에 춤을 추리라. 갑오봉에서 아침을 먹는다. 오락가락하던 빗방울은 멈췄다. 더위도 시원한 바람에 정체를 숨겼다. 얼음 녹은 물을 연신 들이켜 몸을 식힌다.
갑오봉은 우회를 해도 되지만, 넓은 평전이 좋아 빠뜨릴 수 없는 구간이다. 내리막이 시작되면서 또 햇빛을 피한다. 습지가 시작되더니 물소리가 장쾌하다. 샘이다.
샘 인근에 미리 온 등산객 한 분이 짐을 풀고 여유롭게 쉬고 있다. 콸콸 쏟아지는 샘물을 받아 목을 축인다. 안부에 내려선다. 금정산 고당봉을 북쪽에서 바라보는 조망지다. 고당봉의 바위군이 빼어나다. 사진 한 장을 남겨 기록한다.
고당봉으로 오르는 길에 '범어사기'라고 각인된 바위가 있다. 절 부지 경계인 모양이다. 잣나무 아래 까먹은 잣 껍데기가 널브러져 있다. 청설모나 다람쥐의 아침 식사 자리다.
속세의 유혹이 이어진다
고당봉은 오르는 사람이 많았다. 고당봉에서 북문으로 내려서는 등산로는 북적거렸다. 1km 정도의 내리막길인데 피로감이 몰렸다. 북문에서 범어사로 탈출하는 코스가 있다. 이 길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북문 인근 금정산탐방지원센터에서 점심을 먹는다. 여럿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금샘 약수가 있어 쉬어가기 좋다. 아예 자리를 펴고 가져온 음식을 뷔페처럼 펼쳐 드시는 분들도 있다. 꿀맛이리라. 북문 하산길 유혹을 뒤로 하고 산성길을 따라간다. 커다란 돌로 만든 등산로가 익숙하지는 않다. 망루를 지난다. 산성 아래 금정구와 멀리 부산 해운대까지 조망이 펼쳐진다. 김유신 솔바위 안내판이 있다. 김유신이 소변을 눈 자리에 심은 소나무라니. 참 특이한 전설이다.
4망루를 지나니 동문으로 가는 내리막길이 펼쳐진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시작된다. 처음엔 가늘다가 점점 굵어진다. 소나무숲이 비안개에 젖어 들었다. 지나온 길을 가늠해 보니 12km가 넘었다. 시간도 재 보았다. 7시간이 넘었다. 그래 이만하면 됐다.
동문에 도착했다. 비를 피하는 두 사람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영화의 한 장면이다. 길을 물었다. 내려가면 버스정류장이 있다고 했다. 도시철도 온천장역에서 산성마을을 오가는 203번 버스는 15분 간격으로 다닌다. 꼬불꼬불 산성길을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하산한다. 남은 구간은 다음에 하겠다고 다짐한다.
2023-09-07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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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단목령~조침령 최후의 원시림 펼쳐져
태풍의 뒤끝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가지 못하는 길이 아쉬웠을 뿐. 이번 백두대간 구간은 온전히 걸으려면 조침령에서 시작해 한계령(오색령)까지 약 25km다. 그러나 단목령을 지나 한계령까지는 국립공원 구역 등으로 탐방로가 막혀 있다.
더러 법의 경계를 넘어 숨바꼭질하듯 산행하는 대간꾼들이 있긴 했다. 포털사이트 검색만 하더라도 이곳을 다녀와 산행기를 올려놓은 사람이 여럿이다. 어떤 이는 이 코스를 걷는데 12시간이 넘어 걸렸고, 준족임이 분명한 한 대간꾼 블로거는 7시간 만에 주파한 기록도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이 구간 산행을 다녀온 이들이 있었다. 기왕지사 막힌 길을 이미 다녀온 이들에게 몇 장의 사진을 얻었다.
한계령(오색령)~단목령 갈 수 없는 길
양희은의 노래 한계령을 듣고 있으면, 불현듯 배낭을 꾸려 떠나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이 한계령은 또 하나의 이름이 있으니 오색령이다. 한계령 휴게소 인근에 있는 백두대간 비석엔 '백두대간 오색령'이라고 선명히 새긴 비석이 있다.
예로부터 이 고개는 양양에서는 오색령, 인제에서는 한계령으로 불렀다고 한다. 양양에서 인제로 동해 쪽의 생산물이 고개를 넘었고, 영서의 생필품이 또 영동으로 가던 길이다.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는 최단 코스 등산로가 있어 산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백두대간 조침령으로 가는 코스는 한계령 혹은 오색령에서 시작하는 게 분명하지만, 길은 높은 철망에 막혀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백두대간 종주자의 출입을 막는 초소, 카메라 감시, 인력을 통한 순찰 등을 전방위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렇지만 대간꾼들의 걷고자 하는 열망을 온전히 다 막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금단의 땅에 있는 망대암산과, 그즈음에 있다는 UFO바위 등이 심심찮게 포털사이트에 올라온다. 사진으로 본 UFO 바위는 정말 상상하는 UFO처럼 생겼다.
한계령에서 조침령으로 남진하는 백두대간의 최대 걸림돌은 한계령 바위 지대라고 한다. 대간에는 몇 군데 난코스가 있다. 속리산 문장대에서 밤티재까지 이어지는 바위 구간, 지름티재에서 희양산에 이르는 직벽 코스 등인데 한계령 바위 구간을 최대 난코스라고 평하는 이들도 많다.
한계령에서 출발하면 바위 구간을 지나 UFO바위~주전골 갈림길~망대암산까지 곳곳에 험한 바위 구간이 이어지고, 망대암산 이후엔 점봉산(1,424m)까지 긴 오르막을 오르면 이후에는 짙은 숲길이 이어진다. 단목령 바로 아래에 맑은 계곡이 있다. 이어 북암령~양수발전소 갈림길~조침령까지 대간은 이어진다.
천상의 화원 곰배령과 점봉산
백두대간 구간마다 천상의 화원이 아닌 곳이 어디 있겠냐마는 특히 점봉산은 그 유명한 곰배령도 품고 있어 식생이 다양하고 야생화가 풍부하다.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점봉산에 자생하는 식물종은 854종으로 한반도 전체 식물종의 20%나 된다. 점봉산은 1987년부터 입산을 금지하고 있다. 대신 곰배령(1164m)은 사전에 탐방 신청한 이들에게만 개방하고 있다.
곰배령으로 가는 점봉산 산림생태탐방로는 전체 구간이 10,5km로 4시간 정도 걸린다. 설악산곰배령산림생태탐방로는 산림청 '숲나들e'에서 예약할 수 있다. 정해진 코스 이외에 설악산국립공원 점봉산분소에서 곰배령으로 가는 '곰배골탐방로'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별도로 예약해야 한다.
설악산국립공원 탐방로이므로 국립공원공단 예약시스템(https://reservation.knps.or.kr/)을 통해 따로 신청하면 된다.
이맘때 점봉산 일대는 동자꽃, 금강초롱, 새며느리밥풀꽃, 모싯대, 참취꽃, 산오이풀 등이 한창이다. 백두대간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특히 점봉산 일대의 식생이 이렇듯 풍부하니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이다.
8월 산행의 명과 암
물론 여름 산행은 꽃구경도 좋지만, 한 가지 복병이 존재한다. 더위와 습기다. 비가 오더라도 비옷을 입으면 무척 덥기 때문에 성가시다. 주변에 알아본 바로는 웬만한 비 정도는 산꾼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왕 땀으로 젖을 터, 비를 맞는 것이 오히려 더 시원하다는 것이다. 더위 혹은 예고 없는 소나기가 도사리고 있지만, 궂은 날씨라도 산행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이미 산행을 결심하고 나서는 순간부터 '자연'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가 온 뒤 습기가 많아 운무로 시야가 좋지 않은 상황을 두고 어떤 산꾼들은 '곰탕'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주위는 온통 운무에 휩싸여 시야는 뿌옇게 흐리다. 습한 기운 또한 만연하다. 어쩌다 보이는 산줄기 사이사이에 하얀 곰국 같은 구름과 안개가 넘실거린다. 이런 날씨를 두고 '곰탕 날씨'라고 한다니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람들 발길이 뜸한 망대암산에서 점봉산으로 오르는 대간 코스는 풀과 숲이 무성하다고 한다. 나무와 풀이 꼭 사람 키 높이라서 오르다 보면 나뭇가지로부터 뺨을 부지기수로 맞는다고 한다. 뺨을 그렇게 맞고서도 기어코 대간을 잇는 이들의 열정이 부럽다.
사진 속의 점봉산 정상석은 하트 모양이다. 곰배령 정상석과 비슷하게 생겼다. 점봉산~작은점봉산~곰배령으로 이어지니 정상석을 비슷한 형태로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단목령에서 조침령까지
점봉산에서 단목령은 6.2km 떨어져 있다. 대체로 무난한 내리막길이어서 어려운 구간은 없이 원만한 모양이다.
단목령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와 양양군 서면 오색리를 잇는 고개다. 박달나무가 많아 박달령으로 부르기도 한단다. 단목령에서 북암령까지가 2km, 북암령에서 조침령까지는 7.3km다.
단목령지킴터에서 조침령 방향으로 100m쯤 가면 계곡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 아래에는 청정 계곡물이 철철 넘쳐난다. 이곳에서 식수를 보충하거나 쉬어가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단목령은 인근 도심의 낮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지만, 해발이 높고 계곡이 있어 기온이 20도에 불과해 쾌적할뿐더러 서늘한 기운까지 느껴진다.
오직 나무와 풀숲만이 반기는 숲길 곳곳에는 아름드리나무들이 자리잡고 있다. 더러 수명을 다한 듯 부러진 가지를 안고 있지만 그 또한 자연의 관록을 느끼게 한다. 오래된 숲에 경외감이 생긴다. 심산 깊은 숲길을 한 시간가량 걸으면 북암령이다. 북암령은 세계적인 희귀식물인 한계령풀의 최대 군락지라고 한다. 한계령풀은 4월에 노란 꽃이 핀다. 그런데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이유는 5월 중순이면 지상부는 고사한 후 뿌리만 휴면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신갈나무, 들메나무, 박달나무, 물푸레나무, 엄나무 등이 자생하는 조침령 가는 숲길을 또 타박타박 걷는다. 조침령까지 7km가 남았다. 비가 오락가락해서 온몸이 비와 땀으로 범벅이 돼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지쳐갈 무렵 양양양수발전소 상부댐 제한적 개방 안내 표지판이 있다. 백두대간 탈출로라고 이정표에 나와 있다.
여기서부터 조침령까지 구간은 인제천리길 구간이다.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다. ‘조침령 0.3km’ 표지판을 지나자 목재 덱 길이 나온다. 덱 길을 내려서니 새들도 자고 간다는 조침령이다.
▲여름 산행의 백미 '알탕'
여름 산행은 땀으로 온몸이 젖기 일쑤다. 산행 막바지에 계곡이 있다면 금상첨화. 그래서 여름 산행의 필수 준비물은 여벌 옷이다. 만족스러운 알탕을 위해 산행 내내 옷을 지고 다니는 산꾼도 있다. 그 무게를 충분히 감당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알탕은 말 그대로 알몸으로 목욕하는 것을 말하는데, 산꾼들의 알탕은 주로 계곡에 몸을 담그는 것을 말한다. 조침령에서 1.2km 정도 내려와 터널관리사무소 광장에 도착하면 길 건너가 진동계곡이다.
여름에도 몸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 철철 흐르는 곳. 그 계곡에 몸을 담그면 산행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다. 물이 차갑고, 비라도 온 날은 유속이 빠르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그래도 알탕의 유혹은 뿌리칠 수가 없다.
물에 몸을 담그면 산행 내내 부르튼 발이 기뻐서 환호를 지른다. 근육마다 쌓인 피로가 빠른 유속에 실려 사라지는 느낌도 좋다. 물론 대한민국 모든 계곡에서 알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립공원 구역은 원천적으로 계곡 입수가 금지돼 있다. 상수원보호구역에선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
여름철 국립공원 구역에서 입수가 허용되는 곳이 있는데, 국립공원공단 홈페이지 공원별 알림을 참고하면 된다. 대체로 8월 말까지 허용하는데 지리산국립공원의 경우 내원사골, 대성, 유평, 백무, 중산리 계곡에 출입이 가능하다. 허용 범위는 손발 담그기와 세안 정도다. 목욕은 안 된다.
2023-08-18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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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선자령 고원 광활한 풀밭에 마음을 누이다
백두대간 선자령 구간은 광활한 초지가 일품이다. 이국적인 풍경에 더해 줄지어 들어선 풍력발전기는 별세계에 온 듯했다. 지형적 특성상 안개가 많아 동해에서 생성된 안개가 수시로 선자령을 넘어오는 탓에 몇 미터 앞에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 '절체의 풍경'이 연출되는 신비로운 곳. 장맛비를 뚫고 백두대간 선자령에 다녀왔다.
백두대간을 온전히 잇기 위해서는 선자령 지나 묘봉에서 오대산 노인봉까지 걸어야 하지만, 이 지역은 비법정탐방로로 산행을 할 수 없는 곳이다. 그래도 대간을 잇겠다는 사람들은 국립공원관리공단과의 눈치싸움을 통해 '대간을 진행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돌고 있다. 최근에 이곳을 다녀온 한 산꾼은 비법정탐방로 진입을 감시하기 위해 세운 카메라 탑이 누군가에 의해 쓰러진 것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쓰러진 카메라에 대해 안타까움, 혹은 고소함을 느끼는 것은 독자들의 자유라 의견을 구하거나 달지 않겠다. 다만, 이 비법정탐방로 대부분의 구간이 군부대 혹은 사설 목장으로 운영되고 있는 마당에, 또 대부분의 지역이 풍력단지로 개발된 상황에 유독 산꾼들의 접근만 막겠다는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산림청의 처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만하다. 만인의 입은 쇠도 녹이고, 만인의 발은 없던 길도 만들기에 그렇다.
백두대간 선자령 구간은 보통 대관령에서 시작하여 새봉(1071m)~선자령(1157m)~곤신봉(1127m)~동해전망대(1142m)~매봉(1173m)~소황병산(1328m)~노인봉(1338m)~진고개휴게소까지 이어지는 도상거리 25.7km 구간이다. 산꾼들 걸음으로는 11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다. 우선 오대산 진고개휴게소에서 노인봉까지는 탐방이 허용돼 있다. 오르막길 3.8km 구간이지만, 늘 오르막만 있지는 않다. 사실 선자령 구간 일대가 1000m 이상의 고원지대라 높낮이가 그렇게 심하지 않은 것이다.
매봉~노인봉 구간의 출입통제가 합리적으로 개선되기를 소망한다. 소황병산에서 매봉까지의 지역은 명확한 동고서저 지역이라 대간은 서쪽은 완만한 구릉이다. 천혜의 목장지여서 일찌감치 삼양목장이 자리잡았다.
대관령 삼양목장 광활한 초지
초원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풍경이다. 초지를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 매해 퇴비도 투여하는 모양이다. 풀밭에서 밥을 먹는데 도시락 아래에서 어둠을 느낀 산지렁이 한 마리가 어느새 흙을 뚫고 올라왔던 모양. 짐을 꾸리느라 도시락을 들었는데 생생한 산지렁이가 꿈틀거려 살짝 놀랬다. 특별히 소나 양의 사료로 쓰기 위해 초지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삼양목장은 1972년부터 초지를 개간했는데 무려 1983만 4710㎡(약 600만 평)의 광활한 면적이라고 한다.
삼양목장은 소를 기르는 것만 아니라 목장을 테마로 관광사업도 하고 있었다. 특히 유기 목초가 한창 자라는 6월에는 '풀파도 축제'를 연다고 한다. 답사를 갔던 시기는 7월 초순이었는데, 여전히 많은 구간에서 풀파도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었다. 일부 구간은 사료로 쓰기 위해 목초를 베서 곤포 사일리지(일명 목초 마시멜로)를 만들고 있었다. 벤 풀을 지게차 같은 기계가 둥그렇게 적당한 크기로 말아놓으면 곤포 기계가 다가가 로봇 팔로 척척 감싸는 작업이 신기했다. 그 많은 '목초 마시멜로'를 쉴 새 없이 만드는 풍경 또한 이색적이었다. 선자령 구간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선물이다.
매봉 아래로 광활한 초지와 풍력단지가 펼쳐진다. 가슴이 뻥 뚫리는 풍경에 모두 닫힌 마음을 풀어헤친다. 윤기 나는 풀잎 파도를 바라보며 천천히 구절양장처럼 휘어진 백두대간 길을 걷는다. 이 구간은 대체로 임도로 불러야 할 길이 대부분이다. 목초지라서 그늘도 많지 않다. 그러나 이날은 남쪽에서는 폭우가 쏟아진 날. 강원도는 비는 오지 않았다. 동해의 시원한 바람이 수증기를 듬뿍 머금고 날아와 순간순간 에어컨 바람을 바로 쐬는 느낌이다.
설악산 대청봉도 보이는 곳
동해전망대에 도달했다. 삼양목장 동해전망대는 해발이 1142m로 웬만한 산 저리 가라는 높이다. 안내문을 보니 날씨가 좋으면 설악산 대청봉과 오대산 국립공원이 한눈에 보인다고 돼 있다. 하지만 이날은 막 짙은 안개가 수시로 동해에서 몰려와 흩어지는 중이라 시계가 좋지 않다. 다만, 서쪽 목장 초지는 넉넉하게 잘 보인다. 안개가 비경은 시시때때로 연출하는데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서 있기조차 힘들다고 한다. 삼양목장이 큼직하게 새겨진 포토존이 있다.
익숙한 이름 '바람의언덕'도 있다. 대관령목장에서 출발한 셔틀버스가 막 도착하고 있다. 일행 중에 초반에 무리해 근육통이 생긴 분이 있었다. 오르막길에 유독 힘들어했는데, 누군가 버스 타기를 권했지만, 백두대간 종주를 마쳐야 한다는 신념이 더 강했다. "괜찮습니다. 걸어가렵니다." 산행 때마다 다양한 음식을 챙겨오는 분이다.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와서는 주변에 하염없이 나누는 것을 봤다. 이날도 집에서 출발할 때 짐 무게가 20kg이 넘었다고 했다. 딱 1인분의 무게만 지고 온 것이 살짝 부끄러웠다.
셔틀버스는 꽤 많은 사람을 태우고 올라왔다. 대관령 삼양목장 투어를 하면 이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약 20분 간격으로 배차하는 모양이다. 바람의 언덕으로 향한다. 풍력발전기 설치 지역이라 발아래 고압 전선이 묻혀 있다는 안내판이 자주 보인다. 아마도 거대한 풍력발전기를 설치하기 위해 임도를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런데 임도 주변이 온통 파헤쳐져 있다. 백두대간은 보존지역이고, 특별히 관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풍력단지 조성을 위해 길을 만들었다면, 주변 정리도 좀 했어야 하지 않을까. 비탈면에 속살이 드러난 대간의 현재 모습이 처참하다. 뿌리를 드러낸 나무와 풀은 비탈면에서 겨우 생명을 지탱하고 있다. 인간이 다니는 작은 걸음으로 인해 발생할 훼손과는 차원이 다르다.
백두대간 훼손의 주범은
언젠가 도로에서 과적하지 말자는 안내문을 본 적이 있다. 다시 관련 문구를 찾아 보니 '축 하중 10t인 화물차 한 대는 승용차 7만 대, 15t인 화물차는 무려 39만 대의 승용차가 지나간 것과 같은 도로 파손을 유발한다'고 적혀 있다. 누가 백두대간 파괴의 주범인가. 사람인가 인위적인 개발인가? 속 시원하게 대답할 기관이 있어야 한다.
셔틀버스가 서는 곳에 고맙게도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는 공간이 있다. 배낭에 지고 온 약간의 쓰레기를 분류해 버린다. 삼양목장 관광패스를 구입하고 들어온 이는 아니지만, 고마울 따름이다. 바람의언덕으로 올라선다. '삼양목장 목책로'라는 안내판이 있다. 해발 1150m 표시를 커다란 바위에 새겨 놓았다. 곤포 사일리지가 줄지어 잇는 초지 주변을 지난다. 풀밭, 풍력발전기, 하늘, 바람, 구름이 이 풍경의 주제다. 물론 대간꾼들도 점점이 박혀 그 길을 걷는다.
곤신봉(1131m)에 도착한다. "여태껏 오른 봉우리 중에 제일 쉽네." 누군가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봉우리가 보였다. 곤신봉은 옛 강릉부사가 집무하던 동헌에서 서쪽(곤신)에 있어 이름이 붙었다. 이 산 줄기에 명당이 많았는데 워낙 바람에 세서 묏자리를 곤신봉을 향해서는 쓰지 않는다고 한다. 산림청에서 만든 안내판에는 '이곳은 삼양목장 목초지와 풍력발전단지, 고랭지채소밭이 조성돼 있는데 백두대간의 대표적인 훼손 유형이다'고 쓰여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산림청의 대책이 뭔지? '이곳은 백두대간 보호지역'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7월에도 여전한 야생화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뛰어온다. 물 조끼를 제대로 갖춘 것이 산악마라톤 동호인인 모양이다. 매봉까지 뛰어갈 태세인데 색다른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보기 좋다. 한껏 파헤쳐진 임도가 밋밋하여 눈을 돌리니 메뚜기 한 마리가 나뭇잎에 앉아 있다. 큰까치수염이 한창 피어나기 시작하고, 초롱꽃도 예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달맞이꽃은 길섶에 피어 투명한 샛노란 색 꽃잎을 보여준다.
멀리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선자령 입구 안내판이 있다. 대관령으로 곧장 내려가는 길은 5.7km로 '순한 등산로'라고 적혀 있다. '순한' 등산로를 버리고 '독한' 등산로 선자령을 향해 오른다.
선자령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선자령 표지석은 사람 키의 서너 배가 될 정도로 컸다. '백두대간선자령'이라는 글귀가 위에서 아래로 선명하다. 선자령에서 남은 간식을 먹는다.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고 하니 다소 긴장이 풀린다. 그늘을 찾다가 그냥 뙤약볕 아래서 쉬기로 한다.
산꿩의다리가 활짝 피었다. 하얀 털복숭이 같은 꽃잎이 앙증맞다. 선자령에서 대관령까지 가는 길은 행복, 평화, 희망을 선물하는 목장코스다. 대관령숲길 여러 길 가운데 하나다. 경치가 좋아서인지 대관령숲길, 백두대간, 바우길1구간, 목장코스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진 산길이다.
작은 별 모양의 꽃잎을 가진 노란 기린초가 또 반긴다. 화려하지만 넘치지 않는 천궁의 하얀 꽃 무더기도 눈을 즐겁게 한다. 꿀풀, 참취꽃, 싸리꽃, 동자꽃, 여로꽃, 노루오줌꽃이 한창인 7월의 백두대간, 황홀하다.
몽환적인 풍경에 빠져 길을 잃다
새봉에 도착했다. 새봉에는 산불감시 카메라와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 올랐으나 산 아래는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새봉에서 잠시 숨을 돌린 뒤 2.5km 남은 대관령을 향한다. 오늘 걷고 있는 길이 목장코스인데, 안내판에는 '대한민국 계절의 첫 변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라는 수식어가 있다. 풍력발전기는 모두 53기라고 하는데 안내판이 세워진 후에 얼마나 더 세워졌을지는 알 수 없다. 봄과 여름의 푸른 초지 녹색바다, 가을의 황금 갈대바다, 겨울의 눈길 백색바다를 만끽할 수 있고, 덤으로 동해 푸른 바다까지 볼 수 있단다.
울창한 조림지로 접어든다. 줄지은 나무 사이로 스며든 안개가 몽환적이다. "참 몽환적이다. 멋지다." 여기 저기서 감탄사가 나온다. 카메라로 풍경을 눌러대기 바쁘다. 욕심만큼 잘 찍지는 못했다. 앞에 가던 사람을 놓쳐 버렸다. 뒤에 오는 사람에게 안개 속의 한 사람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정표는 여러 갈래. 국사봉으로 가는 이정표는 어두운 숲속으로 나 있다. 대관령 숲길 안내센터로 가는 길은 넓은 임도. 익숙한 임도를 선택한다. 따라오는 사람이 없다.
스마트폰을 켜서 길을 찾는다. 이 길도 맞고 아까 그 길도 맞다. 통신중계소가 나온다. 중계소 담장 철망에 전국의 산꾼들이 매달아 놓은 갖가지 표지가 달려 있다. 백패커 한 명이 무거운 짐을 지고 올라온다. 아마도 휴일을 맞아 백패킹 성지 선자령에서 오는 사람일 것이다. 선자령 곳곳에 야영 취사 금지란 팻말이 붙어 있던데 어떻게 가능한지는 알 수 없다.
안개 자욱한 포장 길을 타박타박 걸어 내려간다. 이따금 차량이 올라오는 것을 보니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 대관령특수조림지 입간판이 있다. 등산로 입구까지는 800m다. 길을 찾았다. 안개 속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있어 가까이 다가가니 일행이다. 대관령국사성황당입구 표지석에서 백두대간 선자령 구간 산행을 마무리 한다.
길을 건너 대관령숲길 안내센터가 있는 휴게소에 도착했다. 남자 화장실 세면대의 물은 예전과 달리 이제는 졸졸 나오고 있었다. 다들 그 작은 물줄기로도 땀을 충분히 씻어냈다. 먼저 도착한 일행이 건넨 시원한 맥주 한 잔에 산행의 속 피로도 잠재운다.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
2023-07-1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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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알8봉 3일에 뽀개기] 쫓기듯 오른 가지산 운문산, 조망은 최고더라
영알8봉 2일차 산행. 계획 없던 우중산행을 하면서 오른 간월산 정상에서 막 8봉을 완등한 이를 만났다. 그는 자기가 2만 7600번 대라고 했다. 이미 5월 중에 3만 번째 완등자가 나올 거라는 기사도 떴다. '3만 번이 넘으면 메달은 절대 지급하지 않는다'는 울주군의 입장은 8봉 등정 모바일 앱의 공지사항에서 단호하게 게시돼 있었다.
이왕 시작한 8봉 완등 챌린지, 기념 메달을 갖고 싶다는 욕구가 충만했다. 관련 기사를 검색하니 5월 17일 오전 10시 기준 영남알프스 8봉 완등자는 2만 7069명이었다. 그런데 2일 차 취재를 한 날이 5월 18일. 계산해 보면 하루 사이에 500명이 훌쩍 늘었다. 기사에는 5월 말이면 3만 명을 넘어설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보다 훨씬 앞당겨질 상황이었다. 황계복 부산시민등산아카데미 강사는 5월 중에만 마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왠지 불안하고, 마음이 급해졌다.
애초 부처님오신날 대체휴일에 3차 산행을 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연휴가 너무 길었다. 고민 끝에 결국 일정을 앞당겨 3일 차 산행에 나섰다.
가지~운문산 느긋한 산행은 취소
사실 5월 부처님오신날 대체휴일을 포함해 느긋하게 첫날 가지산을 오후에 오른 뒤 산 능선에서 비박을 하면서 1박 2일 동안 3일 차 마무리 산행을 하기로 계획했다. 황 강사의 제안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등정이 너무 늦어져 '메달'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메달권에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깊을수록 의지가 충만해졌다. 8봉을 완등할 생각이 깊어져 계획을 수정했다. 그리고 황 강사에게 전화를 했다. 안 그래도 황 강사는 우리가 계획한 날에는 비 예보가 돼 있어 어찌하나 고민했다고 말했다. 세찬 비까지 온다니 야영이나 등산 자체가 힘들 상황이다. 굳이 그날을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는 혼자서 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배낭을 꾸리며 혹 이미 3만 명이 넘었으면 어쩔까? 하는 우려도 했다. 평일 빗속을 뚫고 산을 오르는 사람을 숱하게 본 적이 있는 터라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이제 남은 산은 가지산과 운문산. 둘 다 만만찮은 산이다. 같은 산줄기에 놓여 있어 종주 산행을 해도 괜찮지만, 원점회귀가 쉽지 않은 산이다. 그래서 애초 계획은 석남사에서 가지산에 올랐다가 아랫재 거쳐 운문산을 오른 뒤 석골사로 하산하는 단일 코스를 정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택시를 타고 차를 회수해야 할뿐더러 거리도 만만찮다. 1일 2산을 어떻게 할 것이냐 고민이 생겼다. 결론은 가지산과 운문산을 각각 최단 거리로 단독 산행하자고 마음먹었다.
석남터널 최단 거리 코스 단행
예전에 낙동정맥 종주를 하며 운문재~가지산~석남터널~배내고개~간월산으로 걸은 적이 있다. 가지산 정상에서 석남터널까지 걷고 하산했는데 하산 지점이 능선에서 의외로 짧았다는 기억이 있었다. 검색해 보니 역시 맞았다. 다들 가지산 최단 코스로 석남터널을 기점으로 오르고 있었다. 석남터널로 차를 몰았다.
석남터널 도로는 아래에 시원한 밀양대로 터널이 생긴 뒤로 교통량이 거의 없는 도로가 됐다. 오직 관광이나 드라이브 목적으로 이곳을 찾는다. 터널은 울주와 밀양의 경계인데, 당일 현장에 도착하니 터널 이쪽저쪽에 차량이 많이 주차돼 있었다. 이 많은 차들이 모두 산에 가기 위해 온 것인가? 줄지은 차량을 보면서 또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영알8봉 등정이 이렇게 인기가 높다니?'
다행히도 울주에서 터널을 지나 밀양 권역에 접어드니 딱 한 대 주차할 만한 공간이 있었다. 차를 잽싸게 대고 산행을 시작한다. 석남터널에서 중봉을 거쳐 가지산 정상까지 오르는 편도 3.3km 구간이다.
1.8km를 쉼 없이 오르자 가지산 철쭉 군락지가 나온다. 주변에 천막으로 얼기설기 지은 간이매점이 있다. 식혜를 판다고 해 놓았는데 쉬어가는 사람이 많다. 여기서부터 꽤 긴 가파른 계단길이 시작된다. 인내심을 가지고 계단을 오르니 삼거리 이정표가 있는 능선이다. 밀양 방면, 가지산 정상 방면, 석남사 주차장 방면의 갈림길. 철쭉이 만발한 길을 따라 가지산 중봉(1167m)으로 오른다. 중봉은 조망이 탁월하다. 하지만 가지산 정상은 아직 저 멀리 있다. 정상 부근 지형을 살펴보니 중봉에서 살짝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야 한다. 갈 길이 멀어 쉴 틈도 없다. 올라가는 사람보다 내려오는 사람이 더 많다. 도대체 몇 명이나 되나 궁금해 지나치는 사람을 일일이 세다가 50명이 넘자 그것도 그만두었다. 어찌 급한 마음에 서너 명을 추월했는데, 이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경쟁에는 구애받지 않고 느긋하게 산행하고 있었다. 갑자기 부끄러워져 얼굴이 산철쭉처럼 확 달아오른다.
드디어 영남알프스 최고봉 가지산(1241m) 정상에 도착했다. 등정 인증 사진을 찍는 행렬이 길다.
머리를 얻어맞고서야 각성하다
등정 인증 모바일 앱은 정상석 100m 이내 어디서든 인증사진을 찍을 수 있다. 단 정상석과 본인의 얼굴이 함께 찍혀야 한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래서 구태여 줄을 서지 않고, 정상석이 겨우 보이는 곳에서 인증사진을 얼른 찍었다.
정상석과 나란히 서서 멋진 인증 사진을 찍을 사람은 줄을 서야 한다. 20분 이상 걸릴 게 뻔했다. 시간이 없었다. 아직 가야 할 산이 남았다. 멀리 동해까지 바라다보인다는 가지산 정상. 느긋하게 즐길 여유가 없다. 다들 느긋하게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쫓기는 사람처럼 돌아선다. 뒤통수기 뜨거워진다.
중봉으로 하산하는데 올라오는 사람을 마주치니 여유가 좀 생겼다. 쉴 틈도 없이 중봉에서 표지석 사진만 한 장 더 찍고 서둘러 하산한다. 삼거리에 도착했다. 온 길로 내려가려면 석남사 주차장 방면으로 가야 하는데, 밀양 방면으로 내려온 모양이다. 올라왔던 길 그대로 하산하려던 계획이 어그러졌다. 주 능선이 점점 멀어지더니 계곡으로 떨어진다. 올라올 때 무척 힘들었던 계단이 보이지 않았다.
길은 점점 좁아졌다. 그런데 전화위복이다. 자연 그대로의 등산로여서 계단 길보다 훨씬 걷기가 좋다. 올라올 때 보이지 않던 나무와 꽃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양팔을 벌려 멋지게 자란 소나무. 하얀 꽃을 피운 민백미꽃. 민백미꽃은 잘 보기 힘든 야생화라고 한다. 내리막길이 조금 지루하다 싶더니 이번엔 무덤을 온통 덮은 은방울꽃 군락지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무덤 주위가 온통 은방울꽃. 누워 잠든 이도 평안하겠다.
아래에서 차 소리가 들린다. 금세 도로가 보인다. 갓길 공터에 주차된 차량이 있다. 살펴보니 올라간 지점과 불과 10여m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주차된 차 사이를 비집고 나오다 뭔가에 머리를 부딪쳤다. 잠깐 멍하니 섰다가 확인해 보니 얼음골이 8km 남았다는 '교통 표지판'이다.
다행히 표지판의 모서리를 누군가 구부려 놓았다. 뾰족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서둘지 말라는 가지산의 경고다.
아랫재 오른 지가 언제이던가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운문산(1188m)으로 간다. 최단 거리 코스는 남명리 상양마을에서 출발한다. 다들 상양마을회관 주차장을 이용하는데, 오후인데도 차량이 꽉 찼다. 등산로 초입까지 차로 갈 수는 있으나 이날은 통행금지 표지판이 있다. 어찌어찌 마을 귀퉁이에 차를 대고 운문산을 향한다. 등산로 초입에 이정표가 있다. 운문산 3.3km, 아랫재 1.8km. 공교롭게도 석남터널~가지산과 거리가 똑같다. 가지산 1차 쉼터였던 철쭉군락지 이정표까지도 1.8km였다. 신기한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등산로 초입에서 막 산행을 마친 일행과 마주친다. 다들 싱글벙글한다. 오후에 산행을 시작하는 사람을 측은하게 쳐다보는가 싶더니 한 사람이 툭 하고 뼈아픈 말 한마디를 한다. "늦게 오셨네요." "예~" 하고 올라가는데, 무안했다. 그렇지만 속으로 대답했다. '이 산이 마지막 산입니다!' 앞서가던 몇 팀을 추월한다. 그래도 오후에 산을 오르는 사람이 혼자는 아니었다.
아랫재까지는 원만한 산길. 십수 년 전에 이 코스를 오른 적이 있는데 풍경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려오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주눅이 들 뿐이다. 남양 홍 씨 묘지 입구라는 표지석을 지나 느릿느릿 걸어 아랫재에 도착했다. 아랫재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었다. 산불초소 앞에 빈 배낭 여럿이 놓여 있다. 원점회귀하거나 가지산에서 넘어와 아랫재로 하산할 사람이 운문산 정상에 오를 때 두고 가는 배낭이다.
배낭을 두고 산행하는 것은 당장 편안할지 모르나 옳은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랫재에서 운문산까지는 1.5km. 왕복하면 3km이상을 걸어야 하는데 배낭을 두고 가는 것은 무모하다. 아니나 다를까. 오르다 보니 물통과 간식을 먹은 쓰레기도 길섶에 두고 간 사람이 있다. 배낭처럼 내려올 때 잘 챙겨갔으면 좋겠다.
몰려오는 회한, 산은 그대로인데
깊은 수풀 사이로 난 오름길을 쉬지 않고 걷는다. 큰 바위를 우회한다. 바위를 지나 능선에 올라서니 비로소 시야가 트인다. 눈앞에 계단이 있다. 앞에 만만찮은 봉우리 하나가 또 버티고 섰다. 침목형 나무로 만든 계단에서 뒤돌아보니 출발지인 상양마을이 동화책 속 풍경처럼 앙증맞다.
바위지대를 통과하는 나무 계단이 또 있다. 이번에는 더 시야가 훨씬 높아졌다. 부는 바람도 시원하다. 정상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기에 오래 쉬지는 못했다. 느낌으로는 정상이 머지 않았다. 툭 튀어나온 작은 정상석. 운문산(雲門山)이라고 한자로 쓴 정상석인데, 대한산악연맹이 세운 것이다. 해발 1200m로 쓴 걸 지우고 1188m라고 고쳐 새겼다.
몇 걸음 더 오르니 호거산 운문산이라는 정상석이 있다. 다행하게도 가지산과 달리 줄을 서지 않아도 됐다. 정상석과 나란히 서서 8봉의 마지막 인증사진을 찍는다. 완등 버튼을 눌렀는데 앱이 잘 작동하지 않아 당황했다. 손을 하늘로 뻗어 휴대전화 신호를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포기하고 쉬고 있는데, 휴대전화 화면에 드디어 '완등 인증'이 떴다. 인증서를 열었다. 야호 3만 명 안에 들었다. 영알8봉에서 얻었던 모든 근심과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정상에 벌러덩 누워 쉬는 이들도 있다. 가지고 온 음식을 먹으며 멋진 조망을 즐기며 쉬는 사람이 많다. 그 틈에 앉아 배낭에 남은 모든 간식을 흡입한다. 그리고 느긋하게 아래를 바라본다. 남명리 일대와 도래재 넘어가는 길이 꿈길처럼 아득하다. 억산 가는 길의 산 그림자도 아련하다. 막상 완등 등수를 확인하고 나니 메달권에 들었다는 기쁨도 있지만 살짝 허탈하기도 하다. 승자의 자만인가?
영알 8봉을 오르내리는 내내 산행하는 사람들을 잠재적 경쟁자로 봤다. 죄송한 마음이다. 정상에서 오래 머무른다. 그제야 올라오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메달권 완등을 기원한다.
이번엔 천천히 산을 내려온다. 올라올 때 본 페트병과 쓰레기는 우려와 달리 보이지 않는다. 아랫재 바로 아래 샘터에 물이 퐁퐁 샘솟고 있다. 수통 가득 물도 채우고 목도 축인다. 물이 달다. 올라올 때 점찍었던 오래된 무덤의 석장승 앞에 다가간다. 키작은 석장승이 익살스럽다. 주차된 차에서 짐을 풀고 가족 단톡방에 완등 화면 캡처 사진을 찍어 보냈다. "와 대단해요!" 가족들의 격려에 피로가 싹 가신다. 반듯한 밀양대로를 타고 귀가한다. 장엄한 영남알프스 산군이 양팔을 벌리고 얼치기 산꾼을 포근하게 품어준다.
▲영알 8봉 완등 소감
산행을 마친 직후인 5월 26일 영알8봉 완등자가 2만 9600명을 넘어섰다. 5월 27일 토요일 부처님오신날 오전 11시 2분 인증물품 3만 개가 모두 소진되었다는 울주군의 공지사항이 떴다. 올해는 신불산 디자인의 순은 기념메달을 준다.
3만 번째 이후 완등자는 아쉽지만 메달은 주지 않고, 인증서만 준다. 2023년 11월 30일까지 완등 사진 촬영과 인증이 가능하다. 모바일 인증서만 주는데 인증자는 앱에서 다운할 수 있다.
지난해에는 10월 17일이 되어서야 3만 번째 완등자가 생겼는데 올해는 무려 5개월가량 앞당겨졌다. 내년에는 얼마나 더 당겨질지 두고 볼 일이다.
영남알프스 완등은 완등 인증모바일앱을 통해 직접 촬영하고 기록한 인증사진만 인증한다. 즉 타인이 내 휴대폰을 가지고 올라도 인증을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하루 3봉까지는 인정해 준다.
그래서 보통 산행에 익숙한 사람은 3봉, 3봉, 2봉으로 3일에 걸쳐 완등한다. 부울경 지역이 아닌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인증 챌린지라 이해는 하지만, 하루 3봉 인증이 무리한 경쟁을 부른다는 지적도 있다.
물론 하루 1봉만 인증하는 식으로 제한한다면, 울주군청은 당장 전국 산악인의 욕받이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전 등정자에게 메달을 지급하고, 1일 1봉만 인증하는 식으로 조건을 강화하는 방안도 있을 것이다. 물론 멀리서 오는 이들이나 준족의 산악인에겐 시시포스의 고통이겠고, 울주군의 예산 부담도 커질테지만….
올해로 3년째 진행하는 영남알프스 완등 챌린지. 그동안 주최 지자체인 울주군은 1일 3봉 제한, 14세 이상 나이 제한, 앱을 통한 인증 방법 변경 등 다양한 변화를 모색했다. 내년에는 더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운영 방침이 마련되리라 본다.
공교롭게도 올해 부처님오신날 3만 명 완등이 달성됐다. 아직 완등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메달을 주지 않는데 완등이 의미가 있을까마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쫓기지 않고 느긋한 산행을 할 수 있으리라. 영남알프스는 사실 억새 일렁이는 가을과 초겨울의 풍경이 더 아름답다. 가을에 반드시 다시 오겠다.
영남알프스 운문산/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
2023-06-0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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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도롱뇽 사는 부산 쇠미산 ,녹차밭이 숨어 있네
"우리 녹차밭은 거름도 비료도 일절 하지 않습니다. 쇠미산의 물과 땅, 바람이 키워내지요." 녹차나무를 심은 김용상(83) 전 금병산우회 총무가 직접 심고 일군 녹차밭을 소개했다. 쇠미산에 녹차밭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소개한 이는 김선관 부산시낚시협회 회장. 갑자기 녹차밭 제보가 와서 의아했는데 현장에 도착해서 모든 것이 풀렸다. 김 회장은 30년 이상 이 동네 토박이로 매일 쇠미산을 등산하는 마니아. 김 전 총무는 40년 동안 이 동네 토박이로 녹차나무나 벚나무의 나이테를 속속 알고 있는 이야기꾼. 두 사람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들으며 쇠미산에서 푸른 기운을 들이마시는 힐링 산행했다.
쇠미산에 숨은 녹차밭
문전옥답이라고 하듯이 산도 가까이 있으면 보물이 된다.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덕유산 등 좋은 산이야 많고 많지만, 늘 큰맘 먹어야 다녀올 수 있는 곳. 야트막한 야산이지만 어떠랴. 내 집 근처에 있는 산이 보물이다.
금병산우회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쇠미산을 사랑하는 인근 주민들이 모인 산우회다. 금병약수터도 회원들이 관리하고 있고, 지금도 매일 약수터 인근 체육시설에는 회원과 주민들이 집결한다. 현장 분위기는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화기애애하단다.
사연은 이랬다. 부산시낚시협회 김 회장이 문자를 보냈다. 산속에서 녹차밭을 수십 년째 가꾸는 어르신이 있어 꼭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한 번은 만날 약속을 했으나 비가 와서 미뤄졌다. 다시 잡은 날 약속은 오전 8시 20분으로 했다. 녹차밭 가꾸는 이들은 오전 7시면 산에 온다고 했다.
부산 동래구 쇠미로 파라다이스골프랜드에서 김 회장과 만나 산행을 시작한다. 앞서 걷는 김 회장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수십 년을 다닌 길이라 익숙한가 보다.
한 10분쯤 가니 길가에 가로수처럼 심은 녹차나무가 있다. 새순이 파릇하다. 이내 금병약수터가 나오고 미리 연락을 받은 김 전 총무가 기다리고 있다. 얼굴색이 무척 밝은 분이다.
벚나무 170그루 심다
소개할 녹차밭은 원래 주민이 개간해 밭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산속에서 채소를 재배하려면 거름과 농약이 없고는 안 된다고 했다. 맑은 공기를 마시러 오는 주민들이 민원을 많이 넣었다는 것. 결국 그 밭을 가꾸던 분이 그만둬 묵정밭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밭을 가꾸던 곳이다 보니 여름철 비가 많이 오면 토사가 무너져 내리는 등 또 다른 부작용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 금병산우회 총무이던 김 총무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고 한다. "여성 회원 한 분이 녹차 씨를 구해 주었어요. 그래서 물에 오래 불려서 심었죠." 의외로 녹차나무가 잘 자랐다고 했다. 녹차의 뿌리는 직진성이 있어 흙 속 깊이 뿌리내렸다. 자연스럽게 토사가 무너지는 것도 막을 수 있어 방재수 역할도 했다. 농약과 비료는 일절 쓰지 않으며 매년 가꾼 것이 20년 정도 됐다고 한다. 가을이면 전지도 해 주고, 새순은 따서 동료들과 나눈다. 심하지만 않으면 등산객들이 잎을 따 가는 것을 막지도 않고 있단다.
"이 주변 벚나무도 우리 산악회에서 심었습니다. 제가 총무할 때라 잘 알지요. 벚나무 150그루를 회비로 사서 심었는데 당시 한 그루 3000원씩 줬지요." 김 총무의 말에서 자부심이 묻어났다. 회원이 동네 주민이라 우리 동네 산을 가꾸고 지키자는 단합심이 남달랐다고 했다.
벚나무는 아름드리로 자라 주민들에게 한여름 시원한 그늘을 선사하고 있었다. 금병산우회의 아지트이기도 한 금병약수터 주변엔 산악회의 안내문과 게시판, 구청에서 만든 약수터 안내판 등이 있다.
작은 연못에는 도롱뇽
녹차밭이 탐스럽다. 새순을 하나 따서 입에 넣었더니 쌉쌀하면서도 향긋한 녹차향이 난다. 주변 운동기구가 있는 곳은 바닥이 맨질맨질하다. 매일 오는 분들이 빗자루로 쓸고 닦아 안방처럼 깨끗하다. 김 총무와 헤어지고, '김 회장의 매일 산행 루트'를 따라 오른다. 김 회장은 매일 느긋하게 한 시간 정도 쇠미산 등산을 즐긴다고 했다.
산허리를 질러 만덕고개 방향으로 간다. "조금 더 가면 참 멋진 곳이 있습니다. 한 주민이 매일 와서 가꾸던 곳인데요. 지금은 완성한 상태이고, 그 분은 요즘은 잘 안 보이네요." 작은 연못과 돌탑이 있다. 돌탑은 얼마나 정성들여 쌓았는지 예술성이 느껴진다.
맑은 연못에는 도롱뇽이 산란해 놓았다. 다만 며칠 전 내린 비로 알 무더기에 흙탕이 덮여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것도 자연이니. 공든 탑은 허물어지고 쌓기를 반복하며 완성했는데, 그날 탑을 쌓은 주민과 산에서 자주 만나던 이들이 자축연도 했다고 한다.
하늘이 담긴 작은 연못을 뒤로 하고 다시 산길을 간다. 아름드리 굴피나무가 반겨준다. 성큼 올라서니 만덕고개 생태통로다. "여기 오면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지 모릅니다.” 오름길 막바지에 김 회장의 ‘전용 대형 선풍기’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 생태통로 아래에서 잠시 땀을 식히다가 하산한다.
여러 갈래 길이 있어 다양한 하산로가 있는데 원점회귀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길눈이 있어야 한다. 멀리 골프장 그물망이 보인다. 부산시낚시협회 회장 덕분에 그가 수십 년 동안 애착하는 쇠미산 산행 코스의 푸른 맛을 살짝 맛봤다.
▲금병약수터 등산로
파라다이스 골프랜드를 찾아가면 된다. 골프연습장 진입 전, 보탑사 입구가 사실상 금병약수터 산행의 기점과 종점이다.
보탑사 입구~좌측 등산로~금병약수터~녹차밭~체육 시설~작은 연못(돌탑)~굴피나무 군락지~만덕고개 생태통로~계곡 옆 하산로~보탑사 입구까지 1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만덕고개에서 이정표가 잘 돼 있고, 보탑사 입구에도 등산로 안내가 잘 돼 있다. 산길이 여러 갈래로 많으나 위로 오르면 금백종주길(금정산~백양산) 주능선이자 낙동정맥 능선에 도달하기에 주능선에 올라도 크게 문제될 건 없다. 이번 코스는 능선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허리를 가로지르면서 완만한 산책형 등산을 할 수 있다. 토질이 마사토라 미끄러우니 낮다고 얕보지 말고 운동화보다는 등산화를 신어야 한다.
금병약수터 샘물은 시원하고 수질도 좋아 매일 약수를 찾는 사람이 있을 정도. 이색적인 녹차밭 풍경도 즐기며 가볍게 걷는 산길이 금병약수터 산행 코스다.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
2023-05-30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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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알8봉 3일에 뽀개기] 천상화원 신불평원 빗속에 거닐다
비가 오면 산에 가지 않는다. 비가 와도 산에 가야 한다는 사람은 두 가지다. 산에 미쳤거나, 뭔가 이상한 사람이다. 보통의 산꾼들은 비 예보가 있으면 일정을 미룬다고 한다. 다만, 산에 가서 예기치 못한 비가 내리면 맞고 산행하는 것이 정석이라는 것.
아침에 일어나 좀 어둡다 싶어 창밖을 내다보니 비가 오는 것이 아닌가. 영남알프스 8봉 3일에 뽀개기 2일 차 산행을 예정하고, 황계복 부산시민등산아카데미 강사에게 전화를 했다. 영남알프스에 대한 저술까지 한 전문 산악인이라 물어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시간이 맞으면 함께 가주겠다고 한다. 17km 이상의 긴 거리라 '괜찮은데요'라는 말을 하지 않고 불쑥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출발하는 아침에 비가 왔다. 원래는 수요일 예정을 했는데, 회사 중요 일정이 있어 하루를 미룬 것이 화근이었다. 목요일 비가 온다는 예보를 채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황 강사는 비가 온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사정이 있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
비를 보고서야 전화를 드렸다. "집을 나서 지하철 타러 가고 있어요."란 말을 듣는 순간 대충 꾸려 놓았던 배낭을 들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청수골 옆 백발등으로 오르다
신불산자연휴양림 하단에서 시작해 원점회귀하는 산행을 할 예정이었다. 3일 만에 영알 8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신속함이 관건. 그래서 자가용을 이용하고, 내려와서도 바로 차를 이용할 수 있게 계획을 짰다.
울산~함양 고속도로 구간 배내골IC에서 내리니 휴양림이 코앞이다. 내비게이션 안내를 잘못 입력했던지 상단휴양림으로 가려는 차를 황 강사가 바로 잡았다. "이 기자 우회전!" 차가 제대로 방향을 잡아 이내 배내천을 건너 휴양림 쪽으로 진입한다.
신불산자연휴양림 하단은 예약이 힘들기로 유명하다. 덱 야영장도 성수기엔 하늘의 별 따기. 주차난도 심각해 휴양림 입구 갓길에는 주차 차량으로 북새통을 이뤘는데 이번에 가니 차단봉을 설치해 갓길 주차를 못하게 막았다.
황 강사는 청수골 좌측 능선 백발등 코스를 안내했다. 사유지를 통과하면 접근이 쉬운데 철망까지 쳐서 막아두었기에 청수골을 조금 오르다가 왼쪽 능선으로 붙을 수 있었다. 이용하는 산꾼들이 제법 있는지 길이 반듯하다. 초반부터 된비알이지만, 영축산으로 오르는 쉬운 길이라고 한다.
백발등은 아픔이 있는 산길이다. 임진왜란 당시 단조성에 주둔한 의병을 도저히 공격할 수 없었던 왜군이 이 숨은 길을 알게 돼 기습했고, 의병들은 패전했다. "영남알프스는 가만히 보면 지형이 산군의 바깥쪽은 천 길 낭떠러지로 가파르고 안쪽은 온화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분화구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지요." 황 강사는 이런 지형 탓에 언양이나 통도사 쪽에서 공격하는 왜군은 쉽게 격퇴할 수 있었으나 배내골에서 허를 찌르면서 접근한 왜군은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한고비 올라서자 소나무 한 그루가 바위와 한 몸인 듯 엉켜 있다. '용송'이라고 한다. 용송이 경이롭다. 바위 위에 올라서니 또 소나무 몇 그루가 자리 잡고 있다. 뿌리가 길게 뻗은 것이 대마도 한 신사에서 본 소나무와 많이 닮았다. 영남알프스 산군이 잘 보인다. 건너편 산정에 인공 구조물 하나가 있는데 빨치산 전망대 자리에 육각정을 세운 것이라고 했다.
영축산 비상하는 독수리
용송과 한 몸인 바위 위에서 한참을 쉰 뒤 다시 걷는다. 숲길로 들어서니 비가 직접 머리에 내리지 않아 좋다. 왼편에 거대한 암릉이 있다. 이곳을 오르는 길도 있는 모양이지만, 오른쪽으로 우회했는데, 비탈면이 만만찮았다. 한참을 가다가 능선 길로 합류했다. 평평한 지대를 잠시 지나니 자연휴양림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병꽃나무가 비에 젖은 얼굴로 반긴다. 단조성터 안내판이 있다. 단조성터를 지키던 의병이 왜군의 기습으로 전사했는데 의병의 피가 못을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돌무더기와 아직 남은 성벽 흔적이 있다. 단조성은 단조늪지로도 유명하다. 비가 와서인지 더 질퍽거리는 길을 지나 방화선 지대로 들어선다. 멀리 영축산 정상에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평일 비 오는 오전, 영알 8봉 등정 챌린지의 위력을 새삼 느낀다.
영축산 정상에서 만난 이는 두 쌍의 남녀다. 다들 연세가 지긋하게 드신 분들이다. 다정하게 산행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가야 할 신불산 쪽을 바라본다. 넓게 펼쳐진 신불평원은 꽃평원이다. 울주군 삼남읍에서 구름이 일어 넘실넘실 신불평원으로 올라온다. 비와 구름이 빚어내는 황홀경을 여기저기 담는다. 영남알프스 안내판에는 영축산에서 간월재까지를 하늘억새길 1구간 억새바람길로 명명했다. 실은 백발등도 가을에 흰 억새가 넘실거리는 것이 백발 수염 같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황 강사가 뒤를 돌아보란다. 그리고 설명한다. "영축산 정상은 독수리의 머리요 지나온 신불평원은 왼쪽 날개, 영축산 너머 함박등까지는 오른쪽 날개 형상이다. 영축산은 독수리가 통도사 쪽을 향해 나는 형상이다."고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거대한 독수리가 막 비상하면서 날개를 펼친 형상이 보였다.
올해는 유독 철쭉이 좋은 해
풍경을 감상하다가 문득 시장기를 느껴 점심을 먹는다. 황 강사는 산행에서 밥은 오르막 전에 먹으면 힘들다고 항상 말한다. 독수리가 나는 형상을 보려면 독수리보다 시야가 높아야 하니, 밥 먹을 자리는 제대로 찾았다. 도시락을 후딱 비우고, 뜨거운 커피 한잔으로 식은 몸을 데운다.
신불재까지 750m가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다. 주변은 온통 연분홍 산철쭉이다. 식물은 아무래도 해거리하는데 올해가 꽃이 좋은 해 같다고 황 강사가 말했다. 사시사철 매년 산을 찾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 신빙성이 있다. 특히 올해는 초봄 냉해가 있었는데, 진달래 등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나무는 시원찮지만, 개화를 늦게 하는 철쭉은 냉해 없이 원만하게 제 계절을 만끽한다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이 계절에 걸음걸음마다 꽃과 만나니 산행의 기쁨이 배가 된다.
신불재에 내려섰다. 원형으로 만든 거대한 덱이 보인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가을이면 백패커들의 텐트가 촘촘히 들어서던 곳이다. 신불재 아래 샘터도 좋은데 확인하지 않고 지나친다. 하늘의 비가 수분을 공급해서 그런지 목이 전혀 마르지 않다.
신불평원 일대 온산이 철쭉이다. 이 산에 이렇게 꽃이 많았던가. 연분홍, 짙은 분홍 꽃 무더기가 흰 구름 속에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운무 가득한 신불산 정상
봉수대 모양으로 생긴 둥근 돌탑이 먼저 반기더니 신불산 정상석이 우뚝 서 있다. 정상 바로 아래 넓은 덱 공간은 무한 조망을 자랑한다. 언젠가 여기서 하룻밤을 자야 하겠다. 밤이면 별이 총총 빛나리라.
잠시 비가 긋는다. 날씨가 좋아지려는지 온기도 느껴진다. 지형에 따라 시시각각 분위기가 바뀐다. 간월재까지는 1.1km, 간월산까지는 1.9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다. 정상에서 벌써 500m를 내려온 것이다.
목장길 같은 길을 내려오는데 눈에 확 띄는 꽃무더기가 있다. 쥐오줌풀꽃이 만발한 것. 등산로 주변이나 초지에 잘 자라는 특성 그대로다. 이번엔 노란 꽃이 잔치를 벌였다. 미나리아재비꽃이다. 도감을 찾아보니 6월에 꽃을 피운다는데 5월 중순에 벌써 만개했다. 간월재로 내려서는 길에 뜻밖의 횡재를 했다. 그런데 좋은 일만 있을 리 없다. 그칠 것 같던 비가 다시 시작해 빗줄기가 세차다. 간월재 거대한 돌탑을 카메라에 담는데 흐려서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간월재 목책에 산악자전거 한 대가 홀로 쉬고 있다. 주인은 간데 없다. 간월재 휴게소는 컵라면 등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을 판다. 괜히 사지도 않을 거면서 비에 젖은 채로 실내에 들어가는 것이 민폐라는 생각에 바로 지나친다. 밖에서 슬쩍 보니 거대한 온수통이 몇 개나 설치돼 있다.
더욱 세찬 빗속에 도착한 간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거세다. 체력도 살짝 떨어진다. 이제부터는 지구력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다. 케이블카의 도움도 없는 1일 3산은 좀 무리인가 하는 자책감도 들었다. 황 강사는 하루 전날 종일 산행을 마치고 오후 10시에 귀가했다는 데도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묵묵히 산을 오른다. 경륜과 체력에 감탄한다.
예전에 왔을 때는 못 봤는데 규화목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규화목은 수중에 매몰된 뒤 오랜 시간 지나며 화석이 된 나무. 간월산 규화목을 분석한 결과 중생대 나자식물(침엽수)의 특징이 관찰됐다고 한다. 2012년 처음 발견했다고 하는데, 간월산 다녀간 지가 그 정도가 지났는지 가물가물하다.
이 비를 뚫고 간월산 정상에 너덧 명의 등정자가 있다. 어떤 이는 간월산이 영알 8봉 첫 등정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등정 앱을 미처 다운받지 않아 산정에서 새로 받는다. 1차 때 2만 7000번째 완등자를 만난 뒤 기가 죽어 있었는데, 이제 새로 시작하는 사람을 만나니 묘한 기분이 든다. '서두르지 않아도 될까?'
시계를 보니 2시 40분이다. 비도 오고 하니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6번째 등정 인증샷을 찍고 하산한다. 황 강사는 다시 간월재로 돌아가기보다는 왕봉골 방면 능선으로 바로 내려가자고 길을 안내했다. 정상에서 정확하게 15분을 하산해 임도를 만났다.
자연휴양림으로 정확한 하산
임도를 계속 따라 내려가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 임도를 따라 3분쯤 가니 길 왼쪽 벤치 옆으로 난 숲길에 빨간 표지 하나가 있다. 973봉으로 가는 능선길이다. 바로 숲으로 들어선다. 숲길을 요리조리 내려가다가 높은 철제 탑을 만난다. 여기서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선다. 보라색 특이한 꽃이 피었다. 자란초다. 이 꽃도 주로 6월에 피는 야생화로 기록돼 있는데 올해 계절이 빠르긴 빠른 모양이다. 기왕 꽃 본 김에 주변을 더 살피니 은난초가 수줍게 피었다. 은난초는 5월에 핀다고 한다. 꽃들의 알지 못할 마음을 가늠하면서 신불산자연휴양림 상단 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쭉 뻗은 능선으로 새로 개설한 듯한 임도가 선명하다. 누군가 입구 바위에 '옥봉 통일전망대'라고 페인트 손 글씨로 써 놓았다. 황 강사가 눈짓한다. '파래소폭포로 바로 가기 보다 능선길로 갈까?' 이심전심으로 화답했다.
사실 용송이 있는 바위 전망대에서 '저기가 신불산 빨치산 관측소였고, 그 자리에 육각정을 지었는데 아래에 추모비도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한 번 가 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있는 터에 '통일전망대'라는 명칭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결론적으로 실망. 육각정은 콘크리트를 사용해 굳이 3층으로 높이 지었는데 쇠락해 가고 있었다. 추모비는 이념 논쟁에 휩싸여 사라졌는지 찾을 수 없었고, 주변엔 잡초만 무성하다. 콘크리트 건물을 짓기 위해 파헤친 길만 처량하게 붉은 흙을 드러내고 있다. 1km 남짓 짧은 거리에 시간도 20분 정도 걸렸는데 오는 길이 왜 그리 멀게 느껴지던지.
그래도 3층 전망대에서 영남알프스의 속살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는 것은 위안이었다. 전망대에서 파래소폭포로 내려가는 길은 폐쇄됐다. 능선을 따라 휴양림으로 바로 하산했다. 길이 묵어 아리송했지만, 황 강사의 노련함만 믿고 따랐다. 40분 만에 신불산자연휴양림에 도착해 산행을 마무리한다. 우중산행 참 진하게 했다.
▲우중산행 팁
비가 오면 산에 가지 않는 것이 제일 좋지만, 우중산행의 묘미 또한 있으니 길을 무조건 막아설 일은 아니다. 일단 이번 영알8봉 2차 산행은 시작부터 끝까지 비를 맞은 우중산행이었다. 파래소2교 청수골 입구에서 시작해 백발등~용송바위~932봉~단조늪~영축산(1081m)~신불평원~신불재~신불산(1159m)~간월재(900m)~간월산(1069m)~임도~973봉~728봉(통일전망대·육각정)~신불산자연휴양림 하단까지 17km를 6시간 50분 동안 걸었다.
처음부터 레인재킷를 입었고, 산행을 마치고서야 레인재킷을 벗었다. 비옷은 비싼 고어텍스 소재나, 비닐 소재나 별반 차이가 없다. 고어텍스의 첨단 기능도 비에 흠뻑 젖으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 차라리 편의점에서 파는 간의 우의가 물기를 잘 차단한다. 단 잘 찢어지는 게 흠. 챙이 있는 모자는 필수. 배낭은 방수커버를 하더라도 배터리 등 주요 휴대품은 비닐로 두 겹 이상 꽁꽁 싸야 한다.
등산화는 고어텍스가 기본이긴 한데 비는 바지를 따라 발목으로 들어가니 단목 스패츠를 하는 게 조금 낫다. 가벼운 오버트라우저를 입는 것도 좋다. 그럴 때는 반바지가 어울릴 듯. 발에 습기나 땀이 차면 등산복은 큰 짐이 되니까.
젖은 등산화는 반드시 신문지 등 종이 뭉치를 구겨 넣어 그늘에서 말려야 가죽 변형이 적다고 한다. 6시간 간격으로 종이를 갈아줘야 하는 것은 필수. 차량에는 갈아입을 여벌 옷을 준비해야 한다. 뜨거운 물을 보온병에 담아 가는 것은 여름에도 빠뜨리지 말아야 할 준비물이다. 이번에 체온이 떨어져 살짝 추울 때 한 모금의 따뜻한 커피는 생명수였다.
바위나 특히 나뭇가지, 드러난 뿌리가 미끄러우니 걷는 데도 신경을 써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중산행의 체력 소모는 좋은 날씨의 곱절 정도 되는 것 같다. 가능하면 자제하자.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
2023-05-25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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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이제 조침령, 아 저기 설악이 보인다
"지금 어디 지나고 있습니까? 오버" "꽃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오버" "예? 우리도 꽃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만 오버." 선두와 후미가 2km 정도 간극이 벌어졌다. 아마도 꽃구경하느라 늦었을 것이다. 선두 대장이 무전기로 후미 대장과 교신했다. 지나온 곳도 꽃 터널이고, 가고 있는 곳도 꽃 터널이다. 산철쭉밭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남자 대원들이 차례로 꽃 옆에서 사진을 찍는다. 남자들이 이렇게 꽃을 좋아했던가. 나이가 들면서 취향이 바뀌는 것일까. 백두대간 구룡령~조침령 꽃 터널은 아저씨들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부산에서 너무 먼 구룡령
부산 서면에서 오후 10시에 출발해 강원도 홍천군 내면 명개리 구룡령까지는 대절 버스로 6시간이 넘게 걸렸다. 덕분에 버스 안에서 충분한 휴식을 했다. 구룡령 백두대간 방문자센터 인근에 있는 커다란 백두대간 비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조침령을 향해 출발한다. 시작부터 계단이다.
오늘 코스는 구룡령~갈전곡봉(1204m)~왕승골 갈림길~연가리골(샘터)~임선봉(1061m)~방태천3교 갈림길~쇠나들이~조침령까지 21.2km 구간과 조침령~진동리 조침령 터널 관리사무소까지 1.5km 임도 구간이다. 모두 22.7km를 걸었다. 대간 구간 21.2km는 휴식 시간을 포함해 9시간 13분 걸렸다.
누구 기준인지는 모르지만, 조침령 21km(10시간), 진고개 22km(11시간 40분)이 걸린다고 이정표에 적혀 있다. 결과적으로 따져 보면 부산등산아카데미 제1기 백두대간종주대(단장 박경효, 총대장 김창진)는 10시간의 소요시간을 살짝 단축한 것은 맞다. 물론 선두 기준이다. 이번에 용케 선두 그룹을 놓치지 않아 내심 기분이 좋았다.
구룡령은 도로가 개설돼 명칭을 챙겨갔지만, 옛길이 진짜 구룡령이다. 구룡령 옛길은 강원도 양양 서면 갈천리와 홍천군 내면 명개리를 잇는 오솔길이다. '명승'으로 지정돼 있다. 명승은 국가 지정 문화재다. 경관이 아름답거나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인공물 등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문화재로 지정한 것. 거제 해금강, 담양 소쇄원, 남해 죽방령 등이 그것이다. 명승은 그 자체로 경관이 아름다운 자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인공물 등의 기념물 중에서 역사적·학술적·경관적 가치가 큰 것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지정한 문화재다.
구룡령은 영동과 영서를 잇는 상품 교역로이자 영동 사람들이 서울로 가던 길이다. 구룡령이라는 이름은 ‘아홉 마리 용이 고개를 넘어가다가 지쳐서 갈천리 마을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고갯길을 넘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구룡이 승천하는 모양처럼 구불구불해서 붙었다는 설도 있다. 도로 구룡령은 일제강점기 이곳의 철광석 등을 수탈하기 위해 일제가 주민들을 강제 징용해 만든 도로라고 한다.
헤드램프가 반짝반짝하며 대간 능선을 줄지어 걷는다. 구룡령까지 40분이라는 이정표에 다다르니 동녘 하늘이 붉게 밝아온다. 마침 헤드램프의 밝기가 약해졌는데, 없어도 걷는데 큰 지장이 없을 정도다. 평소보다 늦게 시작했고 해도 길어져 일찍 동이 튼다.
대간인데 산이 없다?
"이 구간에는 산이 없어요. 강원도 백두대간 구간 가운데 가장 온화한 구간이라고 보면 됩니다." 황계복 부산시민등산아카데미 강사가 설명해 준다. 그러고 보니 구룡령~조침령 구간 능선 어디에도 이름난 산은 없다. 보통 대간은 큰 산을 품고 형성돼 있는데, 22km 구간 내내 '산'이 없다는 게 특이했다. 그만큼 산길도 평온한 거라 생각하니 안심이 된다. 유일하게 있는 갈전곡봉도 초반에 지나기 때문에 부담이 적다.
그래도 대간길이다. 아름드리 참나무 군락이 능선 좌우로 줄지어 서 있다. 보통 산정은 큰 나무가 견뎌내지 못하는데 세찬 바람에도 잘 버티고 있었다. 아름다운 길을 여유있게 걷는다.
붉은 해가 떠오른다. 진행 방향의 우측에서 일출이 시작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거의 5시 방향이다. 누군가 '해 뜬다'라고 해서 보니 빨간 숯불 같은 해가 막 솟아오르고 있다. 산철쭉이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갈전곡봉 정상의 비는 돌이 아니라 철비다. 스테인리스 재질로 돼 있다. 1204m 정상이라고 하지만, 구룡령 출발 지점이 1000고지가 넘었으니 높이를 느끼지 못하겠다. 가야 할 조침령까지는 16.54km가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다. 이곳 이정표는 디테일이 살아있다. 앞으로 볼 이정표에서도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거리가 깨알같이 새겨져 있었다.
갈전곡봉은 방태산(1435m)과 연결돼 있고, 인근에 왕승골,아침가리골, 연가리골 등이 대간에서 발원해 깊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아침가리골은 오지 중의 오지이자 한여름 계곡 트레킹 장소로도 유명하다.
여기도 천상의 화원이네
고비가 이제야 올라오다니. 이른 봄에나 볼 수 있는 고비 싹이 이제 올라온다. 신비로운 광경이다. 피나물 꽃도 만발했다. 가녀린 노란 꽃잎이 눈에 쏙쏙 들어온다. 어린 관중도 새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구룡령 백두대간에서 2023년 봄이 반복되고 있다. 발밑만 보며 감탄사를 연거푸 내뱉고 있는데 황 강사가 고개 들어 멀리 보란다. 설악산군이다.
점봉산과 그 너머 숨은 한계령 그리고 설악산 대청봉이다. 케이블카 건설 예고 등 인간의 간섭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청은 늠름하게 하늘을 이고 있다. 가야 할 길을 다시 눈에 담는다. 산이 푸르러지고 있다.
다시 아래를 보나. 금낭화가 수줍은 듯 피었다. 한국 원산 야생화인데 꽃잎이 신라 금관의 고리를 닮았다고 해 더 유명하다. 그런데 뜬금없이 첩첩산중에서 지게를 만난다. 그 옆에는 작은 잡목 등은 쉽게 잘려 나갈 듯한 칼날을 지닌 예초기도 있다. 뭔 일인가 싶었는데 갑자기 길이 넓어진다. 대간길은 특별히 손을 타지 않아 자연 그대로인 경우가 많은데 무슨 산책로처럼 길을 넓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을 하느라 산철쭉 몇 그루 쯤은 얼마든지 베어 냈던지 길 양옆으로 잎을 채 키우지 못하고 죽은 나무가 즐비하다. 산길이 일정 정도 너비로 넓어진 것으로 봐선 야자매트 등을 깔 모양이다. 단풍취며 피나물이며 갖가지 야생초가 산길에 즐비해 차마 밟을까 조심조심 다녔는데 산꾼들을 위해 길을 확장하는 현장을 보니 기가 찬다. 일전에 다녀온 밀양 재약산은 진달래와 철쭉 군락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주변 참나무를 무참히 베었다. 여기에서는 산길 확보를 위해 산철쭉을 너무 쉽게 베고 있었다. 고마운 일인가? 산길 정비는 최소화가 정답 아닐까? 채 피지도 못하고 시들고 있는 산철쭉을 보면서 분을 삼키고 있는데 은방울꽃 군락으로 화를 누른다. 은방울을 닮아서 은방울꽃인데, 실은 은방울꽃을 보고 은방울을 만들었다는 그 꽃. 은은한 사과 향과 레몬 향이 좋아 향수 재료로 쓰인다고 한다.
3둔과 4가리를 품은 곳
꽃을 보고 걷는데 앞서가던 종주대원 몇 명도 부산하게 꽃을 사진으로 담느라 바쁘다. 부산시민등산아카데미 1기 백두대간 종주대와 만난 지 아직 몇 차례 되지 않기에 서먹서먹하다. 이들은 1기부터 30기까지의 기수 중에서 자원해 백두대간 종주대에 참여했다고 한다. 기수별 우정도 돈독한데 백두대간 종주라는 동일한 목표를 진행하고 있으니 막역한 사이가 분명했다. 그런데 종주대 막바지 코스에 편승하다 보니 한두 명의 지인 말고는 친해질 시간이 없다. 이번이 세 번째다. 그래도 기사를 읽었다며 인사해 주는 이도 있고, 쉴 참에 사과나 간식을 건네주는 분들이 있다. 굴러온 돌을 무시하지 않고 챙겨주는 따뜻함을 느낀다.
종주대의 특색도 조금씩 보이는데 커다란 의자를 지고 와서 쉴 때 확실하게 쉬는 분.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않는 분. 맛난 간식을 아낌없이 제공하는 분. 막걸리 한 병 챙겨와 꼭 잔을 권하는 분 등 다양하다.
유독 친하게 다니는 분들이 있었는데 자기들끼리 부를 때 '이파리들'이라고 했다. 뭔 사조직인가 싶어 궁금했는데 낙엽팀이란다. 같은 기수로 종주대에 참여했는데 늘 뒤처져 스스로 혹은 모두가 낙엽(떨어짐)으로 불렀다는 것. 그런데 가만히 보니 닭목령 구간에선가 앞에서 빌빌거리고 있는데 성큼 추월하더니 이내 보이지 않던 등산 고수들이 아닌가. 왜 이분들이 낙엽이 되었는지는 나중에 그 비밀이 밝혀졌다..
연가리골 샘터에 도착했다. 능선에서 100m만 내려가면 샘터가 있다고 하는데 가 볼 엄두는 내지 않았다. 목이 그리 마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파리 팀 한 분이 건넨 오이와 사과를 먹고 나니 그나마 있던 갈증도 싹 가셨다.
연가리골은 아침가리, 적가리, 명지가리와 함께 4가리로 불리고 월둔, 귀둔, 살둔은 3둔으로 부른다. 3둔 4가리는 정감록에 기록돼 있다고 한다. 물과 불, 바람으로 인한 해가 없는 장소란다. 강원도 오지 중에서도 가장 오지란 말. 둔은 농사짓기 좋은 평퍼짐한 산기슭. 가리는 계곡 안에 자리 잡은 작은 땅이라는 뜻으로 소 쟁기질로 하루에 갈 수 있는 단위 '갈이'에서 나온 말로 보고 있다.
미라니냉이꽃 피나물꽃
조침령까지 남은 거리가 드디어 한 자릿수로 줄어들었다. 전날 부산에서 출발할 때는 비가 내려 걱정했는데, 강원도의 숲길은 맑기만 하다. 알 듯 말 듯한 꽃이 있어 스마트렌즈로 검색했지만 도무지 이름을 알 수 없다. '미나리꽃일 확률이 52%입니다.' 미나리가 산속에서 필 리 없고, 미나리는 아는 식물이어서 100% 아니었다. 나중에 식물단체에 물어 확인하니 미나리냉이였다. 잎은 미나리를 닮았고 꽃은 냉이를 닮아 미나리냉이란다. 산지 그늘진 곳에 주로 자라는 여러해살이다. 이렇게 또 한 생명체를 배운다.
예의 이파리팀도 야생화에 빠져들었다. 넓게 펼쳐진 꽃군락지에서 카메라를 켜고 사진을 찍느라 걸음을 딱 멈췄다. 준족인 이들이 '낙엽 팀'이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산행을 더 풍족하게 즐기는 이들의 여유가 좋다.
뚜렷한 탈출로가 없는 구간이라고 사전 설명을 들었지만, 그래도 연가리골, 왕승골, 작은미아치골 등 중간 하산로는 있었다. 다만, 우천시에는 절대 통행금지라는 안내문이 있어 계곡이 험한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한때 지인 가족과 아침가리를 찾은 적이 있다. 꼬불꼬불한 임도를 올라 상류에서부터 계곡 트레킹을 했는데, 물길을 걷는 재미가 독특했다. 그 이후 물속에서 신는 신발을 여름마다 샀던 기억이 있다.
두 단계 건너 다시 만난 봄
북진하는 백두대간 구간에서 국립공원 지역은 골칫거리다. 어떤 이는 비탐(비법정탐방로) 출입 금지 구간을 건너뛴다. 또 어떤 이는 개구멍을 찾아 기어코 지나간다. 감시하는 국공(국립공원관리공단)과, 기어코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이으려는 산꾼 사이에 항상 긴장이 흐른다. 그런데 알 만한 사람은 안다. 이 말도 안 되는 정책을. 산꾼이라면 수십 년을 출입금지 구역으로 묶어 놓는 것이 결코 정답이 아니란 것을.
예전에 가야산 만물상 코스가 수십 년 폐쇄됐다가 개방된 적이 있었다. 공식 개방을 앞두고 국립공원관리공단의 협조를 받아 함께 사전 답사를 했다. 결과는 실망이었다. 수십 년 동안 출입금지구역이었다던 만물상 코스는 어느 코스보다 길이 반들반들했다. 몇 군데 절벽 구간에 안전 계단을 설치한 것이 개방과 비개방을 결정 지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물론 우리나라의 안전 의식은 좀 독특하긴 하다. 서구의 경우 모든 레저나 활동에 자기 책임이 중심이다. 태풍 속에 서핑을 하던, 곰이 출몰하는 지역에서 야영을 하던. 미국 서부 개척 시대 영향인지 국립공원 지역에서도 야영도 하고, 모닥불도 피운다. 부러웠다. 우리나라는 불씨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다른 것이지만, 유독 우리의 산에 관한 정책은 규제 일색이다. 특정 지역 방문을 제한해서 이익을 챙기는 집단도 있다. 백두대간도 이미 탐방 역사가 오래됐다. 3000km가 넘는 미국의 애팔래치아 국립경관트레일에 비탐 구간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존뮤어 트레일은 공원 보호차원으로 탐방객 수를 제한하지만, 길을 막지는 않는다.
백두대간도 가이드제, 입산 허가제 등의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 원하는 사람은 제대로 완주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나 백두대간 보호를 외치는 산림청은 도대체 백두대간 탐방 정책에 대해 뭘 하고 있는지 참 궁금하다.
오대산 비탐 구간을 어쩔 수가 없어 두 단계를 건너뛰고 구룡령으로 갔기에 할 말이 많다. 덕분에 산철쭉 화사한 2023년 봄을 다시 만나긴 했지만 말이다.
백두대간 타는 사람들
부산시민등산아카데미(BCMA) 제1기 백두대간 종주대는 매달 한 번씩 대간 산행을 한다. 30여 기수를 배출한 아카데미는 제1회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는데 50여 명이 종주대로 시작해 30여 명이 꾸준히 대간 산행에 참여하고 있다. 지금까지 31차 산행을 했다.
10년도 전에 시작해 마무리하지 못하고 오래 묵혔던 대간 산행을 완주할 욕심에 BCMA 종주대에 옵서버로 서너 번 참여했는데, 참 좋은 분들이 많다. 여든이 넘은 열성 회원도 있다. 종주대 전용 버스에서 출발할 때면 매번 특별한 떡을 나눠줘 그러려니 하고 받았는데 이분이 찬조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이경규 선두 대장, 명용익 중간 대장, 이한철 후미 대장과 조윤정 간사도 사서 고생하고 있다. 이번 산행에는 조 간사가 개인 사정으로 오지 않아 다른 분이 대신해 살림을 맡았다. 그분은 대관령 숲길 탐방센터에서 유일하게 뜨거운 물로 손을 씻은 주인공이라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합천 운석공 산행에서 멋진 안내를 해준 신세균 수목산악회 회장과 황계복 부산시민등산아카데미 강사도 늘 든든한 분들이다.
조침령이 4.8km 남았다는 이정표다. 어떻게 100미터 단위까지 정확하게 거리를 잰 것인지 모르겠지만, 좀 헷갈리기도 하고 또 정확하다는 생각도 든다. 아래 계곡은 작은미아치골이다. 어쨌든 이 구간 이정표는 갈전곡봉과 조침령을 기점으로 안내해 놓았다. 갈전곡봉이 멀어지니 조침령이 다가온다. 산길을 가만히 보니 예전에 정비를 했던 모양이다. 일부 구간은 야자매트가 깔렸던 흔적이 있다. 숲길은 많이 복원됐다. 인간이 더 이상 훼손하지 않으니 말이다.
추모석 한 개가 길섶에 있다. 백두대간 종주를 하다가 돌아가신 모양이다. 3년 동안 대간 산행을 하다가 마무리 3구간을 남겨 놓고 돌아가셨다고 해 놓았다. 명복을 빈다. 대간을 시작할 즈음 지리산 구간을 지나 고기리 즈음에서 산더미 같은 등짐 배낭을 지고 가던 늙은 산꾼을 추월한 적이 있다. 그분은 대간을 다 마쳤는지…. 이 길에 서면 늘 궁금하다.
산정에는 봄, 산 아래는 여름
조침령이 1.3km 남았다. 모두 걸음이 한껏 여유롭다. 갑자기 대열이 멈춘다. 철쭉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이다. 너도나도 환한 표정을 짓는다. 꽃 앞에서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찍는 모습을 보니 꽃보다 남자다.
조침령 임도와 만나는 지점은 특이하게 철문이 있다. 가축 전염병 예방 차원에서 산돼지의 이동을 차단하기 위한 시설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사람 막는 길인 줄 알고 지레 놀랐다.
조침령 임도는 군인들이 만든 모양이다. 기념비에 그렇게 쓰여 있다. 다음에 올 때도 비석을 볼 수 있겠지만, 그리 힘들지 않게 이번 구간을 마친 덕분에 되돌아와야 하는 길을 굳이 가서 백두대간 조침령 기념석을 보고 왔다. 박경효 단장이 조침령 옛 비 앞에 미리 와서 종주대를 마중하는 전을 펼쳐 놓았다. 마른 멸치에 고추장을 찍어 하산주 한 잔 마신다.
임도를 제법 걸어 내려가니 빨간 버스가 기다린다. 아침가리 계곡이 근처라는데 계곡물에 풍덩 몸을 담그고 싶었다. 마침 버스가 서 있는 조침령 터널 관리사무소 앞이 방태천 상류였다. 누구라 할 것 없이 계곡에 첨벙 빠져들었다. 먼저 시원하게 씻고 나온 한 분이 '선녀탕'이 있다며 위치를 알려준다. 여벌로 가져 온 옷이 있어 좌고우면하지 않고 물에 뛰어 들었다. 온몸이 시원해 날아갈 것 같다. 강원도 물 참 좋다.
버스로 돌아오니 입구에 세워 둔 등산 스틱이 없었다. 채 정리하지 못해 세워 두었는데 잠시 당황했다. 다들 시원하게 씻고 버스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이던 종주대원들이 맥주를 권하며 '스틱은 누가 차에 실었다'고 알려주었다. 자리에 가 보니 옆 좌석에 앉았던 분이 어찌 아시고 잘 챙겨 주셨다.
'알탕'까지 마쳤으니 이 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산에서는 봄을 봤는데, 산 아래에서는 성큼 다가온 여름을 만끽했다. 백두대간 산행을 하며 계절을 훌쩍훌쩍 넘나든다. 강원도 명물인 메밀국수 맛집을 찾아가 하산식을 거나하게 먹고 부산에 돌아오니 깊은 밤이었다.
백두대간 조침령/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
2023-05-2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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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알8봉 3일에 뽀개기] 케이블카 타고 오른 하늘정원길 황홀경
고헌산을 급하게 오른 뒤 남은 시간 동안 천황산(1189m)과 재약산(1119.1m)을 해낼 수 있을까? 의문은 걱정으로 돌아와 석남고개에서 가지산이나 오르고 갈 마음을 잠시 먹었다. 그러나 얼음골을 향해 가는 차는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석남터널로 가는 것이 아니라 24번 국도 밀양대로를 달렸다. '그래 약한 마음을 접자. 비 맞는 것이 뭐가 대수랴. 비옷을 챙겨왔지 않으냐!' 얼음골케이블카를 목적지로 달렸다. 나들목이 남명리에 있어 목적지는 한참을 지나서 되돌아와야 했다.
오후에는 비가 온다는 예보가 계속 걸렸다. 점심을 느긋하게 먹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평일이라 밀양얼음골케이블카 주차장에 주차할 수 있었다는 것. 내려오면서 보니 인근에 사설 주차장이 많았다. '사설주차장은 밀양얼음골케이블카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플래카드가 붙은 것으로 봐서 공식 주차장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주차비 시비가 잦은 모양이다. 어쨌든 무료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평일에 간 데 대한 보상이었다.
'영알8봉 뽀개기' 1일 차 후반부 천황산~재약산 산행은 얼음골케이블카 하부승강장~상부승강장~샘물상회 갈림길~천황산~천황재~재약산~천황재~주암삼거리 갈림길~임도~샘물상회~상부승강장까지 이어지는 8.03km 산길이다. 휴식 시간 포함 2시간 58분이 걸렸다.
케이블카 탄 산악인들
주차장에 막 도착하는데 케이블카가 하부승강장에서 출발하는 것이 보였다. 일단 차를 대고 표부터 끊었다. 사람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더니 표를 끊을 거면 반대쪽 매표소로 가라고 알려주었다. 반대쪽으로 잰걸음을 걸었다. 직원 한 명이 따라오더니 현금으로 할 거냐 카드로 할 거냐를 묻고는 카드라고 하니 키오스크를 대신 눌러주었다. '키오스크 누를 실력은 되는데…'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물론 직원은 원활한 매표를 위해서 도왔을 것이다. 12시 40분 출발 왕복표다. 한 30분 정도 여유가 있어 그제야 몸과 마음이 긴장을 푼다.
평일이라 이용객은 적었는데 무리 중에 등산이 분명한 목적인 듯한 사람이 서너 명 이상이다. 촬영 장비를 갖춘 분도 있다. 드디어 출발. 케이블카가 해발 351m의 하부승강장을 출발해 상부역사( 1020m)까지 천천히 오른다. 표고 차는 669m이다. 선로 길이만 1.8km. 이 거리를 10여 분 만에 오르니 요금이 비싸다는 생각은 안 든다.
애초 많은 케이블카 이용객으로 인한 자연 훼손을 우려해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 사람은 등산을 할 수 없었다. 세월이 지나자 천황산으로 가는 길이 열렸고, 최소한의 자연보호 장치로 케이블카 편도표는 발행하지 않는다. 왕복표를 끊어도 하루만 통용되니 비바크용으로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꼼수'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케이블카와 '자연'은 접점을 찾아가고 있다.
예전의 가치관으로 판단하자면, 케이블카를 타고 산행을 하고 그 기사를 소개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겠지만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다르다. 특히 영알8봉 완등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눈앞에 있어 어느 산이든 '최단 거리'를 검색하라고 부추긴다. 그런 점에서 케이블카는 영알8봉 챌린지와 궁합이 맞는다.
그래도 케이블카를 탄 산악인들은 관광객처럼 백호바위를 보고 환호하거나 발아래 녹색 융단이 깔린 풍경을 보고 감탄하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 내 두 발로 걸을 이 길을 케이블카가 대신해 주고 있으니 고마워서일까. 살짝 부끄러워서일까.
하늘정원길에서 한 컷
케이블카가 상부승강장에 도착하자 차례로 내린다. 같이 온 사람들이 어느새 사라졌다. 사진 몇 장 찍고 지체하는 사이 소리없던 경쟁자(?)들이 모두 출발한 것이다. 하늘을 쳐다봤다. 짙은 구름이 군데군데 덮였지만 아직 비 올 기미는 없었다. 승강장 뒤편 등산로 입구에 커다란 등산 안내도가 있다. 안내도 아래엔 '밀양 영남알프스'라고 해 놓았다.
밀양얼음골케이블카 회사가 명명했음직한 하늘정원길을 걷는다. 상부승강장에서 전망대까지 놓인 덱인데 관리가 잘 돼 있다. 정말 하늘로 오르는 듯한 착시가 들 정도다. 상부승강장이 해발고도가 1000m 이상이니 여긴 아직 봄이었다. 산철쭉이 만발했다. 관광객들은 꽃을 담느라 걸음이 더디다. 양해를 구하고 추월한다.
역시나 걸음에 힘이 들어간다. 케이블카가 상부승강장에서 마지막으로 운행하는 오후 5시 50분까지야 다녀올 수 있겠지만, 비가 문제였다. 아니 함께 출발한 이들이 저만치 멀리 가서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문제였다.
10분 만에 샘물상회에 도착한다. 샘물상회는 영남알프스를 찾는 산꾼들에게는 꽤 유명한 매점이다. 정확한 연원을 알 수 없지만, 이 깊은 산중에서 오래도록 산꾼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갈증을 해소하는 쉼터가 되고 있다.
샘물상회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택한다. 능선을 따라 천황산으로 곧장 오르는 길이다. 상부승강장에서 출발할 때 본 안내도에는 샘물상회에서 천황재를 거쳐 천황산으로 오르는 3.5km 산길을 소개해 놓았다. 재약산까지 가야 하기에 그 안내도는 머릿속에서 지운다.
천황산 사자봉 지나가는 비
샘물상회는 천황재로 가는 길, 천황산으로 곧장 오르는 길, 배내고개로 내려가는 임도, 케이블카로 가는 길의 갈림길이다. 이 사거리에서 이제 천황산으로 향하는 본격 산길이 시작된다. 능선을 따라 10분을 채 걷지 않았다. 오래된 이정표 하나가 나온다. 얼음골 1.8km. 참 설레는 이정표다. 20대에 얼음골에서 이 길을 따라 천황산에 오른 적이 있다. 기다시피 해서 올랐던 기억이다. 요즘도 이 길을 이용하는 산꾼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정표가 남았으니 길이 있을 것이다.
산 아래 남명초등학교에서는 얼음골 사과 시농식을 하느라 운동장이 들썩거린다. 얼음골의 기후가 선사한 밀양 얼음골 사과. 일교차가 커서 꿀이 박힌 사과는 참 달다. 물론 박힌 꿀은 진짜 꿀이 아니라 높은 일교차에서 오는 밀병현상이다. 이 사과들은 달긴 하지만, 저장성이 일반 사과보다 못해 생산자 입장에서는 제때 팔지 못하면 오히려 손해가 나는 상품이다. 어쨌든 얼음골사과는 속의 노란 꿀이 인상적이었다.
갑자기 커다란 플래카드 한 장이 걸려 있다. '2022년 천황산 진달래군락지 보육사업' 밀양시가 발주한 공사인데, 진실은 진달래만 남기고, 나머지 진달래의 생육을 방해하는 참나무를 베는 사업이었다. 조경 전문가의 조언을 들어 사업을 시행하겠지만,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예전에 사자평 억새군락을 유지하기 위해 잡목을 제거하거나 불을 지르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 당시엔 그냥 두기로 했다. 사자평 일부 지역은 천천히 숲의 천이 과정을 거치며 자연화되고 있는데, 이 무슨 뜬금없는 '진달래 보육사업'이라니. 잘린 나무를 보는 눈이 아렸다.
창원 사는 사람이 굳이 부르기로 했다는 '팔지송'을 보며 지난다. 그 이 이름을 붙였던 그렇지 않았던 이 소나무는 예전부터 가지가 8개였다. 물론 팻말을 만들고, 또 다시 와서 팻말을 건 수고는 인정한다.
착잡한 마음을 누르며 한껏 넓어진 길을 걷는다. 큰나무가 없어 시야가 확 트인다. 발아래 자주색 앵초가 피어 있다. 계단목 사이에서 귀한 꽃을 피웠다. 하마터면 밟을 뻔했다. 정비한 등산로가 철도 침목처럼 나무를 깔아놓은 길인데 걷기엔 솔직히 불편하다.
천황산에 도착했다. 앱을 켜고 인증사진을 찍었다. 지나가는 비가 후두둑 쏟아진다. 과우(過雨)인 줄 모르고 화들짝 놀라 재약산을 향해 간다. 천황재가 저 아래 보인다.
재약산 수미봉으로 오르며
기억을 더듬으며 내려간다. 한때 수많은 돌탑이 있던 곳은 주변 정비를 하느라 그런지 대부분의 작은 돌탑이 사라졌다. 예전에 이곳에 왔을 때 어디쯤 돌탑을 쌓았는데 도무지 찾을 수 없다. 털보산장이 있던 자리도 깨끗하게 치워졌다. 천황재에서 천황산을 오르는 곳에 털보 아저씨가 운영하는 작은 산장이 있었는데 흔적도 없다. 다만 천황재의 넓은 덱은 낡았지만 그대로다. 전국에 백패킹 성지 중의 하나였는데, 지금은 야영, 취사 금지 안내문이 붙어 있다.
천황재 인근에 졸졸 솟는 샘이 있어 물 걱정 없이 야영했던 기억이 있다. 이것도 추억으로만 남게 됐다. 다행히 아래로 내려오니 비는 그쳐 숨을 돌린다. 재약산을 오른다. 등산로를 정비하는지 중장비가 다녀간 흔적이 있다. 역시 침목 같은 나무로 계단을 만드는 모양이다. 천황산에서 천황재로 내려서는 덱 계단도 어떤 구간은 계단 높이가 너무 높아 무릎에 무리가 온다. 시공하는 분의 잔꾀다. 제발 산길의 계단은 설계대로 했으면 한다. 여러 사람 무릎 망칠 수 있으니. 이런 공사를 아무런 감수도 않고 완공허가를 해 준 발주기관도 문제다. 사후에라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천황재에서 재약산으로 오르는 구간의 일부는 침목 같은 나무를 촘촘하게 배열해 걷는 데 무리가 없었으나 침목처럼 띄엄띄엄 배치한 곳은 예외 없이 발걸음이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래서 오히려 침목이 깔리지 않은 옆으로 우회하는 길이 이내 생긴다. 자연을 보호하려다가 오히려 훼손 범위가 넓어지는 역효과다.
특히 산을 사랑하는, 산행을 즐기는 우리 국민들이다. 이즈음이면 산꾼들의 의견을 제대로 들어 산길을 정비하는 노하우가 생길 법도 하건만, 행정은 국민의 소리를 제대로 들으려 하는지 의심스럽다.
재약산 정상이 가까워졌다. 여러 갈래 길이 있는데 산줄기를 통해 정상으로 접근한다. 뾰족한 바위에 올랐더니 표충사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청량하다. 오르는 길에 앞선 사람을 추월한 터라 몸이 뜨거웠다. 한참을 바람을 받아들인다. 몸이 어느 정도 식자 바람이 살아있는 재약산 수미봉에서 시계를 본다. 오후 2시 16분이다. 상부승강장에서 1시간 22분이 걸렸다.
샘물상회 입구 돌배나무꽃
재약산 정상에 인증 사진을 찍는 세 사람이 우연히 모였다. 한 분은 서울에서 왔다고 했다. 오전에 운문산을 다녀와서 오늘 2개의 산을 올랐다고 자랑했다. 오늘 하루 여기서 자고 내일 고헌산만 오르면 8봉을 다 마친다고 했다. "올해가 세 번째 완등입니다. 첫해엔 올라와서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했는데 이제는 올라오면 내려가기 바쁩니다." 매년 빠트리지 않고 찾는 모양이었다. 나름 노하우도 쌓여 3일 정도 투자해 영알 8봉 완등 도전을 실행하고 있다.
다른 한 분은 올해 1월 1일 가지산 신년산행을 갔다가 '영알 8봉'을 알게 돼 찾았다고 했다. 이분은 천황산 재약산을 끝으로 완등이란다. 그래도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표충사에서 올라왔다고 한다. 살짝 미안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온 게.
속셈한다. 이제 겨우 3봉을 마쳤는데 하필 재약산 정상에서 조우한 사람들이 다들 마무리 단계이거나 도전을 마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생긴다. 그래도 축하해 주며 안전 산행을 기원하고 헤어졌다.
사자평이 잘 보이는 전망대에서 물과 간식을 먹으며 처음으로 휴식을 취한다. 억새밭은 점점 사라지고 키 낮은 잡목들이 면적을 넓혀가고 있다. 천황재로 다시 내려간다. 숨어서 핀 족두리풀 꽃을 기어코 찾아냈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잘 보이지 않는 꽃이다.
천황재에서는 다시 천황산을 오르지 않아도 된다. 주암삼거리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억새밭 사이로 난 길을 200m 정도 내려가니 갈래길이 나온다. 샘물상회와 주암마을로 내려가는 삼거리다. 샘물상회로 가는 길을 택한다. 길은 임도다. 길의 끝에는 차가 다닐 수 없도록 큰 바위로 길을 막아두었다.
임도는 넓기는 하지만, 돌과 진흙이 많아 오히려 올 때보다 상황이 좋지는 않다. 천황재에서 오르는 수고만 아니라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임도 끝에 돌배나무 두 그루가 관문처럼 서 있다. 바닥에 꽃잎이 흩어져 있다. 이제 막 꽃이 지고 열매가 알알이 맺히고 있다. 샘물상회에서 늦은 점심으로 라면 하나를 시킨다. 부추 몇 가닥이 추가된 오리지널 라면이다. 담백하다.
서두른 덕분인지 마지막 케이블카 한참 전에 하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긴 하루였다. 영알 3봉을 하루에 마치기란.
▲얼음골케이블카 이용하기
영알8봉을 3일 만에 마치기 위해선 어쨌든 1일 3산을 올라야 한다. 천황산과 재약산은 약 2km 정도 이웃해 있어 한때 한 개의 산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천황산과 재약산 두 개의 산으로 인정하고 있다.
케이블카가 없던 시절에는 표충사에서 오르거나 배내골 주암, 배내고개, 얼음골 등 코스가 다양했다. 어느 곳에서 오르던 만만찮은 거리에다가 오름길도 평범하지 않아 일일 두 산을 오르는 것이 빠듯했다.
그러나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반나절에도 산행을 마칠 수 있게 됐다. 얼음골케이블카는 환경단체의 반대 끝에 지역 발전 명목으로 건설됐다. 처음부터는 아니지만, 산행을 하는 사람도 왕복으로는 이용할 수 있게 이용 규정이 완화됐다.
성인 왕복 요금은 1만 6000원이다. 어느 곳이나 그렇지만 경로우대를 하고 또 지역주민에게는 일정액을 할인한다. 계절마다 운행시간이 조금씩 다르다. 3월부터 9월말까지는 상행 첫차가 9시20분에 출발하며, 상행 막차는 오후 5시다. 내려오는 케이블카는 오후 5시 50분이 막차다. 실제 산행 시간은 3시간 남짓 걸리므로 케이블카 운행시간 안에 충분히 산행을 마칠 수 있다.
다만 주말에는 주차난이 심각해 얼음골 공영주차장이나 호박소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서 10~15분 정도 이동해야 한다. 걷기싫다면 인근 사설 주차장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케이블카 상하부 승강장에 먹거리를 파는 코너가 있고, 샘물상회에서도 요기를 할 수 있기에 산행 간식을 빠트렸더라도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단 카드는 샘물상회에서 사용할 수 없다.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
2023-05-15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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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알8봉 3일에 뽀개기] 무모한 도전 나섰다가 산 앞에 겸손해지다
"메달이 크고 좋더라. 순은이라 카데." "어머니가 가고 싶어 하셔서 같이 오르고 있어요." 장안의 화제 영남알프스 8봉 챌린지 이야기다. 울산 울주군이 주관하는 '영남알프스 완등 도전'이 산꾼뿐만 아니라 산행 초보자에게도 도전 정신을 불어넣고 있었다. 가까운 부산에 살아서, 고향이 밀양이라서 어릴 적부터 영남알프스 곳곳을 찾아다녀 새롭지 않은 데다가, 수년 전 낙동정맥을 하면서 또 여기 산줄기를 탔기에 이 이상한 이벤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처음엔.
이벤트 첫 해 '울주 9봉'이라 명명한 이 챌린지에 내친김에 동참한다고 서너 봉우리를 올랐다가 완등은 하지 못했다. 12월 말일 쯤인가 '아직 기회가 남았습니다. 나머지 산을 오르고 인증사진을 보내주세요'라는 SNS를 받았지만, 끝내 달성하지 못했다. 그때도 은메달을 줬는데 제법 묵직했다는 소문은 들었다.
해를 거듭하더니, 모바일 기기의 앱을 이용해 정상에서 요상한 포즈를 취하지 않아도 되고, 정상 근처만 가도 인증된다기에 다시 휴대전화에 앱을 깔았다. 울주9봉은 주변 지자체의 건의가 있었던지 어느새 영남알프스 완등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래도 여전히 주최는 울주군.
어느 해에는 기념 메달이 인기가 많아 준비했던 물량이 동이 나 완등을 한 이들이 제때 받지 못하자 원성이 있었다. 올해부터는 선착순 3만 명에게만 지급하는 기념품. 8년 동안 매해 다른 산의 메달을 만들어 지급한다니 작년에 달성한 사람을 올해 또 부르는 효과는 있다. 잘 만든 앱이 지자체엔 효자가 된 셈. 소문이 전국적으로 나자 이런 챌린지 행사를 벤치마킹 하려는 지자체도 있는 모양이다.
'해마다 다른 8개의 메달'은 산꾼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의 소유욕을 자극했다. 급기야 올 초 문제가 발생했다. 9봉 중 하나인 문복산은 봄철 산불조심기간 인증과 관련해 가급적 5월 이후 산행을 권장했으나 오히려 1월 등산객이 급증했다고 한다. 1월 1일 방문객만 2434명이라니.
급기야 울주군은 문복산을 제외하는 결단을 내렸다. 메달도 8개로 줄었다. 문복산을 제외한 것은 최단 코스의 하나인 경주 산내면 대현리 주민들의 소음·주차 민원도 한몫했다. 우여곡절 끝에 8봉으로 줄었지만, 영알8봉 완등 도전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최근 만난 한 산악회 회원들은 아예 올해 첫 산행의 목표지를 영남알프스로 정하고 4월도 되기 전에 벌써 완등을 마쳤다는 것.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우선 메달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고, 또 하나 사람들은 어떻게 영알8봉을 오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래서 펀부산 '산&길' 콘텐츠도 마련할 겸, 영알8봉을 완등하고 싶으나 아직 시작하지 않은 사람의 길잡이 역할도 할 겸, ‘8봉 뽀개기’를 시작했다. 취재를 준비하다 보니 살짝 마음이 급해져 '1일 3산 등정만 인증'이라는 울주군의 완등 원칙에 따라 1일 차 3개 산, 2일 차 3개 산, 3일 차 2개 산을 오르기로 했다.
물론 연달아 3일 만에 오른 것은 아니다. 메달이 꼭 필요한 사람이거나, 도전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라면 3일의 연휴나 휴가로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실제 수도권의 산악인들은 그렇게 하기도 한단다. 또 어떤 곳은 관광회사에서 영알 메달 획득 산행팀을 모집하는 '메달 산행 상품'을 운영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서설이 길었다. 이제 산으로 가자. 이번 취재는 자가용으로 가서 원점회귀 산행 코스를 잡았다. 아무래도 대중교통은 택시 말고는 어렵기에 자기 차로 가서 등정을 마치고 차량을 회수하기 편한 코스를 잡았다.
1일 차/ 고헌산, 천황산, 재약산
2일 차/ 영축산, 신불산, 간월산
3일 차/가지산, 운문산
순전히 기자가 몇 차례 영남알프스를 다녀본 경험을 바탕으로 잡은 코스다. 영남알프스 관련 저술을 한 황계복 부산시민등산아카데미 강사에게 코스 자문을 요청했더니 잘 마련했다면서도 가지산 운문산을 한 데 묶은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우려를 표했다. 참고하시기를 바란다.
취재기는 산행 별로 나눠 소개한다. 이번에 소개할 코스는 1일 차 제1봉 고헌산 코스다.
고헌산에 성큼 올랐다
고헌산은 와항재에서 많이 오른다. 영알8봉 완등 도전! 산행 이벤트 이후 가장 많은 검색어가 아마 '최단 코스'가 아닐까? 고헌산 최단코스와 연관된 검색 결과는 대체로 와항재에서 오르라고 돼 있다. 그렇지만 와항재는 경주 경계 쪽인 소호리에 있어 부산에서는 궁근정리에 있는 고헌사로 가는 것이 오히려 최단 코스다.
몇 차례 지도를 펼쳐 놓고 검색을 한 끝에 고헌사~고헌산 정상~고헌사 원점회귀 코스를 택했다. 어차피 최단 코스라면 같던 길을 되돌아오더라도 무슨 상관이랴. 시인도 '올라갈 때 못 본 꽃, 내려올 때 보았네'라고 노래하지 않았나.
궁근정리는 고즈넉했다. 언양과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작은 공장과 전원주택도 많이 들어와 있다. 고헌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등산로 입구 안내판을 따라 오른다. 오후에 비 예보가 있어 마음이 살짝 급했다.
등산로 입구에 '영남알프스 정상 인증은 어플로 간단하게 하자'라는 플래카드가 있다. 그 위에 누군가 매직 글씨로 정상 2.5km(1시간 30분)라고 써 놓았다. 가지산이나 운문산을 천황·재약산과 짝지어도 되지만, 굳이 고헌산을 묶은 것은 부산에서 접근하는 동선을 고려해서이다. 나중에 고헌산을 다른 산과 묶으면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데 누군가의 매직 글씨는 정보가 달랐다. 기자의 핸드폰에 있는 등산GPS 앱으로 하산 편도 기록만 쟀더니 이동거리는 고작 1.66km였다. 하산 시간도 43분. 거리는 왕복으로 해도 3.32km다. 올라갈 때 기록을 체크했다. 올라갈 때는 1시간 3분이 걸렸다. 완만한 오름길이 한 번 정도 있었고 내내 오르막이었는데 이런 기록이 나오다니 신기하다.
이유가 있었다. 조급했다. 올라갈 때 비슷하게 출발했던 부부 산꾼을 중간쯤에 추월했고, 정상에서 인증샷을 찍고 내려올 때 만났으니 설쳐도 너무 설친 것이다.
오후 5시부터 비가 온다고 돼 있었고, 애초 하루 3산을 오를 계획을 세웠으니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빨라진 것이다. 처음엔 백두대간 종주로 단련돼 등산 실력이 좋아진 것으로 착각했는데 아니었다. 산행 후유증으로 허벅지 통증이 3일이나 지속됐으니깐.
그래도 산은 산이다
등산로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울창한 숲이 시작된다. 활엽수인 굴참나무와 침엽수인 소나무가 잘 어울려 있는 숲이다. 하늘이 좀 어두웠는데, 어느새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내린다. 고헌사 주차장에 막 도착하자 출발하던 부부 산꾼의 인기척이 들린다. 산행하면서, 추월당한 적은 있어도 추월한 적은 극히 드문데 걸음이 좀 빨랐던 모양이다. 앞서가던 분들이 자리를 내준다. 더 빨리 오른다.
큰으아리꽃(시계꽃) 한 떨기가 피어 있다. 원래 덩굴로 자라는 식물인데 꽃 한 송이만 피었으니 예쁘기도 하지만, 애처롭다. 더구나 등산로 한 가운데 피어 있어 그 운명을 보장할 수 없다. 고헌산은 산행 코스가 짧아 단독으로는 잘 오르지 않는 산이다. 낙동정맥 종주를 하는 사람은 필수 코스이지만, 고헌사에서 오르는 산객은 많지 않았는데 이번에 보니 등산로도 많이 패여 있었다. 영알8봉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겠다.
1시간 남짓 끝없이 오르는 길이다. 기록을 보니 해발 374m에서 시작해 1026m까지 내리막 한 번 없이 오른다. 고헌산의 공식 해발 고도는 1034m이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는지 두어 군데 경사가 다소 평탄한 길도 있다.
119가 정확하게 위치를 파악해 출동할 수 있는 국가지점번호가 등산로 주요 지점마다 설치돼 혼자 산행해도 다소 안심이 된다. 1000고지 산의 위용은 역시 대단했다. 오를수록 식생의 변화가 눈에 띄게 달라진다. 출발지점은 신록이 우거진 초여름이었는데, 정상에 다가갈수록 초봄 분위기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작은 동물이 있다. 다람쥐인가 봤더니 쥐같이 생겼다. '땅굴쥐'인지 주변에 작은 굴들이 널려 있다. 연분홍 산철쭉이 활짝 피었다가 통꽃이 떨어졌다. 사뿐히 즈려밟고 오른다. 아직 잎이 작은 참나무 군락 아래 사초가 모를 심은 듯 푸르다. 눈의 시원해지는 풍경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떡갈나무 새잎이 아기손 마냥 앙증맞다. 추운지 솜털이 보슬보슬 살아있다. 문득 고개 드니 잘생긴 돌탑이다. 어느새 고헌산 정상에 다다랐다.
'올라갈 때 못 본 꽃'
평일 오전인 데도 두어 사람이 이미 정상에서 인증사진을 찍고 있다. 한 사람은 외항재에서 오른 모양이다. 고헌산을 마지막으로 8봉을 다 마친 사람이 있었다. '이제 첫 봉인데 벌써 8봉을 마쳤다니…' 살짝 걱정했다. 메달이 동나면 어떡하냐고.
한 분은 아직 3봉이 남았다고 했다. 앱을 작동시켜 셀카를 찍었다. 인증사진 안 찍느냐고 옆에 있던 사람이 물었다. 그래서 핸드폰을 건네 사진 좀 찍어주십사 부탁했다. 인증사진을 이미 혼자 찍었기에 굳이 앱은 작동할 필요가 없어 껐는데, 왜 인증을 안 받느냐며 의아해하면서 멋진 정상 기념사진을 찍어준다. 거듭 고맙다고 인사했다.
아직 2봉이 남았기에 마음이 급했다. 또 저기서 정상을 향해 오는 팀들이 있다. 고헌산 360도 파노라마를 한 바퀴 둘러본 뒤 서둘러 하산한다.
그런데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들었다. 늦게 도착한 팀이 먼저 와 있던 다른 이에게 인증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사람의 답은 "저 바로 내려가 봐야 해서 죄송하지만, 못 찍어 드려요"였다.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자리를 떠난 터라 뜨금했다. 다행히 그분은 재차 부탁하는 그들의 부탁을 들어 주고 있었다.
쫓기듯 정상에서 내려오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자괴감이 든다. 도심의 찌든 삶을 떨쳐버리고, 대자연의 품에서 느긋하게 힐링해야 하는데, 그놈의 완등 인증에 붙잡혀 안달하는 자신이 부끄럽다.
올라갈 때는 못 본 꽃 내려올 때는 보인다는데, 꽃은 안 보이고 홀딱벗고새(검은등뻐꾸기)의 조롱 같은 노랫소리만 메아리친다. '홀~딱~벗~고~~' 발가벗고 쫓기는 기분으로 1봉을 완등했다.
▲고헌산 산행 팁
와항재 코스도 원만하고 대형 버스도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있어 많이 찾는다. 왕복 5km이고 2시간~2시간 30분이면 산행할 수 있다. 비 오는 날 가도 될 정도로 길이 평탄하다니 도전해 볼 만하다. 단, 비가 오면 진흙이 생기니 미끄러운 부분은 감수해야 한다.
하루 느긋하게 산행한다면 와항재로 올랐다가 삽재로 하산하거나, 반대로 해도 반나절 산행은 되니 오를 만하다. 고헌사 코스로 오르면 와항재로 하산할 경우 원점회귀가 힘들다. 차량 지원하는 이가 없다면 고헌사 코스는 단일 최단 코스로 만족해야 한다.
고헌산은 예로부터 언양의 진산이라고 한다. 가뭄 때는 기우제를 지낼 정도로 최고의 산으로 인정받았다. 언양의 옛 지명이 헌양인데 고헌산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산이 높아 정상 조망이 무척 좋다. 가을이면 억새 군락도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
2023-05-11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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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비진도 섬산행] 미인도 바다 백리길 한바퀴 추억 곱씹기
도시에 살면서 시골이 부러운 것 중 한 가지는 지역민에게만 주는 혜택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제주도민은 비행깃삯의 10%가 할인된다고 들었다. 각 지자체의 유명 유료 관광지에 가면 특별히 지역민 우대 요금이 있다. 밀양 얼음골케이블카도 그렇고 이번에 다녀온 통영 비진도 여객선 요금도 마찬가지였다.
통영에 사는 지인이 고향마을 자랑도 할 겸 1박 2일 일정으로 갯내 물씬 나는 산행을 제안했다. 두말하지 않고 동의했다. 막상 떠날 시기가 되자 이런저런 불참 이유가 생겼지만, 비진도에 가자는데 못 가면 큰일 날 것 같았다.
비진도는 대학에 들어간 첫 해 캠핑을 다녀온 추억이 있는 섬이다. 고향 친구들과 함께한 1박 2일은 늘 기억의 좋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비진도의 하얀 모래밭과 푸른 바다, 작열하던 태양, 그리고 친구들의 깔깔 웃음소리까지. 섬에서 나오는 배 선상에서 처음으로 먹어본 충무김밥은 그 맛이 가히 충격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만큼 맛난 충무김밥을 먹어본 적은 단연코 없다.
두 번째 방문은 어두운 밤 낚싯배를 타고 볼락 낚시를 갔던 때였다. 섬 주변 외딴 갯바위에 내려 낚시했는데 볼락루어라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 또 생생하다. 이번에 세 번째 간 비진도는 자칫 못 갈 뻔도 했다.
반값 한산도로 오라고 했지만
첫날은 통영 용남면에 있는 삼봉산에 올랐다. 눈앞에 거제도와 남해가 펼쳐진 것이 인상적인 산이었다. 산책하듯 다녀왔는데 그래도 제법 고도가 높아 코스만 잘 잡는다면 얼마든지 단독 산행지로도 좋을 듯했다. 역시 압권은 산불초소가 있는 정상. 덱 위에서 지고 온 막걸리 한 잔을 마시며 통영의 자연을 즐겼다.
다음 날 아침에는 통영여객선터미널로 갔다. 그런데 때아닌 호객행위가 있었다. 한산도 여객선을 운영하는 농협에서 마침 한산도 산행대회가 있다며 뱃삯도 반값이라고 얇은 귀를 자극했다. “한산도로?”라며 지인에게 눈짓했는데, 고개를 단호하게 가로젓는 바람에 더는 말 못 하고 비진도행 배를 탔다. 우리가 탄 배는 비진도를 거쳐 매물도까지 가서 돌아오는 항로를 운행했다.
비진도는 내항과 외항마을에 항구가 있는데 등산하려면 외항에서 내리라고 안내해 주었다. 신분증을 일일이 확인하고 배에 오른다. 물론 외지인 요금이다.
출항한 뒤 선실과 갑판에 자리가 마련돼 있는데, 조용히 추억을 떠올리려고 창가 쪽 선실 자리에 앉았다. 가벼운 등산복 차림의 일행이 많다. 다들 설렌 표정이다.
내항에서 내리는 사람도 있었다. 비진도는 하늘에서 본 모양이 모래시계같이 생겨 내항이 있는 섬도 일주할 수 있고, 외항에 내려도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게 길이 나 있었다. 선원 한 분이 "내항은 산길에 멧돼지가 많아 위험하다"고 알려주었다. 바다를 헤엄치는 멧돼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곳 비진도에도 멧돼지가 많이 사는 모양이었다.
푸른 바다 흰 모래밭 미인도
비진도를 미인도라고 부른다는데 그럴듯한 해석을 찾지 못했다. 섬이 아름다운 미인을 닮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윗섬과 아랫섬을 잇는 긴 백사장이 미인의 목처럼 희고 길어서인가? 억지 상상을 하며 외항마을 선착장에 내렸다.
한려해상 바다백리길 안내판이 있다. 우리가 걸을 길은 3구간 산호길이라고 했다. 통영에서 14km 떨어진 비진도는 선유봉이 있는 외항산이 최고봉이다. 우리는 오늘 외항산을 등정할 참이다. 어제 먹은 술이 과하지 않아 무난하게 산행할 것을 몸으로 예감했다.
코스는 외항마을 선착장에서 출발해 비진암 갈림길(왼쪽 길 선택)~시누대 숲길~망부석 전망대~미인도 전망대~선유봉(312m)~비진도 전망대~노루여 전망대~갈치바위~비진암~동백나무 자생지~비진암 갈림길에서 다시외항마을 선착장까지 5.5km를 3시간 동안 느긋하게 걷는다.
갈림길 입구에 할머니들이 섬 시금치며 달래 등 나물을 내놓고 판다. "나물 사 가이소"하시더니 내려오면서 보자니 더는 잡지 않는다. 멧돼지 조심 안내판이 서 있다. 멧돼지가 제법 매섭게 생겼다.
길은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해발 300m로 치고 올라가는 산길이 만만찮다. 덕분에 야생화 볼 일이 많아진다. 홀아비꽃대다. 이 꽃은 꽃받침과 꽃잎이 없이 암술 1개와 수술대 3개로만 이루어진 양성화라고 한다. 처음 발견된 곳이 거제도 옥녀봉이어서 옥녀꽃대라는 이름도 있다고 한다. 힘 한번 크게 쓰며 계단을 올라 망부석 전망대에 도착했다.
멀리 보이는 섬은 한산도와 용초도, 추봉도다. 전망대에서 6분 정도 오르니 미인도 전망대가 나온다. 오늘 코스 최고의 뷰를 선사하는 곳이다. 뒤돌아보면 절벽에 오뚝한 코를 가진 바위가 있다. 비진도 여인바위라고 한다. 아 그래서 비진도가 미인도인가? 가져온 충무김밥을 꺼내 이른 점심을 먹는다.
미인도 전망대 최고의 뷰
다들 풍경이 좋은 곳이라 그런지 사진을 많이들 찍는다. 우리 일행도 사진을 부탁하고, 다른 사람 사진도 찍어 줬다. 여기서 보니 비진도가 모래시계 혹은 아령 아니면 장구처럼 생겼다는 것이 실감 난다. 모래로 이어진 길은 550m나 된단다. 전망대에서 본 왼쪽은 고운 모래 해변이고 오른쪽은 몽돌해변이라니 그것도 신기하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이제는 금빛 모래해변에 텐트 야영을 할 수 없다는 것.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야영은 금지했다고 한다. 하루 묵으려면 섬에 있는 민박을 이용해야 한다.
충무김밥이 덱 위에 펼쳐졌다. 충무김밥이 빨리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밥으로만 김밥을 만다. 속이 없는 대신 대꼬챙이에 낀 주꾸미나 오징어 볶음을 따로 주는데 오리지널은 주꾸미 양념구이라고 했다. 안주로도 손색이 없는 메뉴다. 뷰 좋은 전망대 찾는 사람이 많아 얼른 밥상을 치우고 선유봉을 향해 출발한다.
흔들바위 안내판이 있다. 밀면 흔들린다고 하는 데 힘이 없어서 그런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특이하게 밥공기를 닮은 흔들바위라는 해석이 붙어있다. 하늘로 올라간 선녀가 홀로 남은 어머니의 식사가 걱정돼 내려보냈다는 그럴듯한 전설이다.
선유봉은 300m가 남았고, 선착장에서는 1.7km를 걸어왔다. 이곳은 한려해상국립공원 구역이라서 국립공원공단에서 세운 이정표가 잘 서 있다. 선유봉에 도착했다. 역시 이정표에는 해발 326m라고 기록돼 있다. 가만 선착장에서 본 안내판과 다르지 않은가. 국립지리원 지도를 찾아본다. 지형도의 등고선을 보니 312m가 근접한 높이다.
선유봉에도 높은 이층 전망대가 있어 바다 위의 한려해상국립공원을 조망할 수 있다. 소매물도와 멀리 괭이갈매기 서식지 홍도, 매물도 어유도 가왕도 등을 차례로 볼 수 있는데 이날은 황사가 있어 어렴풋이 가까운 섬만 환상적으로 보였다.
나물 좀 사 가이소
배 시간을 보니 넉넉해 되돌아가는 짧은 길보다는 바다백리길 산호길 구간을 제대로 걷기로 했다. 선유봉에서 15분 정도 내려가니 비진도 전망대가 나온다. 연화도, 우도, 욕지도, 두미도까지 한눈에 보이는 곳이다. 그 아래에 또 전망대가 있는데 유명한 노루여 전망대다. 이번엔 통영 오곡도와 미륵도가 보인다. 노루여(울)는 노루가 빠져 죽은 절벽이라는 유래도 있지만 해안절벽 아래 바위가 세찬 조류로 흐른다고 해서 붙었다는 해석을 적어 놓았다.
울창한 동백나무 숲을 지나니 이번엔 갈치바위다. 참 명소도 많다. 아참 물고기 갈치가 아니란다. 풍랑이 세게 치면 솔가지가 바위에 걸쳐지기에 갈치라고 한단다. 갈치바위는 위험한지 출입이 금지돼 있다. 다시 울창한 원시림 속으로 빠져든다. 비진암 돌담이 높다. 섬에 있는 집들의 돌담이 지나치게 높은 것은 바닷바람과 태풍을 견뎌내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커다란 동백나무에 '선착장' 이정표가 있다. 마을가는 길이란 친절한 이정표를 따라 오래 묵은 밭둑을 지나가니 작은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온다. 바닥에 파란 페인트칠이 된 것은 이곳이 바다백리길이라는 표식이다.
다시 바다백리길 관문을 통과해 삼거리에 도착했다. 할머니 몇 분이 있어 쓱 지나치려고 하는데 "나물 좀 사 가지고 가이소"라는 소리가 들렸다. 참 내려올 때 보자고 했지.
섬에서 기른 시금치와 깨끗하게 씻은 달래가 있었다. 비싸지도 않았는데 현금으로만 살 수 있었다. 요즘 카드 때문에 지갑에 현금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귀하니 이것 역시 할머니 나물을 사기 싫을 때 댈 수 있는 핑계이다. 지갑에 현금이 없었다. 그래서 계좌이체 되냐고 여쭈니 된다는 할머니 한 분이 있었다.
계좌이체를 하고 달래 한 봉지와 시금치 한 단을 샀다. 나중에 먹어본 나물은 최상품이었다. 가성비도 좋았고. 나물 파는 할머니의 이름도 예뻤던 것 같다. 농협 계좌번호를 죄다 외워 또박또박 불러주었다. 이번에 같이 갔던 친구 효, 수, 진도 물론 좋았지.
까마득한 청춘 시절 식, 형, 수, 란, 화, 혜, 정, 태 등의 고향 친구와 함께 우리 젊은 날의 추억을 쌓았던 비진도여 이제 잘 있어라. 갈매기 한 마리가 외항을 떠나는 여객선을 한참이나 따라왔다.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
▲통영 비진도 가려면
통영여객선 터미널에서 통영~비진도~매물도 행 여객선이 다닌다. 평일과 주말의 배편과 시간이 다르니 미리 연락해 보는 것이 좋다. 선박 시간과 요금 관련 문의는 한솔해운 1661-8253 혹은 055-645-3717로 하면 된다.
우선 평일은 하루 세 번 배가 왕복한다. 1항차 통영항 오전 6시 50분 출발. 비진도에서는 9시 30분 첫 출발. 2항차 통영항 10시 50분 출발. 비진도에서는 13시 20분 출발. 3항차 통영항 오후 2시 30분 출발, 비진도 오후 5시 15분이 막배다.
주말엔 오전 9시 통영항 출발, 오전 11시 10분 비진도 출발 배편과 정오인 12시 통영 출발, 오후 2시 40분 비진도 출발 배 등 2항차 더 다닌다. 첫 배와 막배는 시간이 같다.
요금은 2023년 5월 현재 성인 왕복(내항) 1만 8400원이다. 비진도 외항은 왕복 1만 9200원. 평일은 내항 왕복 1만 6800원, 외항 왕복 1만 7600원이다. 경로, 어린이는 일정액을 할인한다.
2023-05-09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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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얼레지, 홀아비바람꽃… 이맘때 고루포기산 능선은 야생화 천국
다들 빨리 와서 쉽게 가버린 벚꽃 이야기였다. 올봄은 유독 꽃이 빨라 아쉽다. 4월 둘째 주 강원도 대관령과 삽당령 일대는 갑자기 영하권으로 기온이 내려갔다. 부산에서 출발하고서야 날씨 소식을 접했다. 2주 전쯤 남쪽 합천에서 산행할 때는 너무 더워 고생했다. 봄이 더 무르익었다고 보았다. 아무리 강원도 지역 대간 산행이라지만 지구 온난화를 믿었다. 집에서 몇 가지 조합의 등산복을 꺼내 놓고 나름의 패션쇼를 해서 최적의 결론을 내렸다. 무릎까지 덮는 니커와 긴 양말, 그리고 상의는 쿨 소재 셔츠다. 경량 패딩은 챙겼지만, 차에 두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계획도 세웠다. 이번 구간은 거리가 다소 길어 낙오하면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기에 나름 무게를 줄이려고 머리를 굴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하의 날씨로 떨어졌다는 대관령에서 반바지(엄밀히 반바지는 아니다)를 입고 왔다고 선배에게 핀잔을 들었고, 일행들에게 걱정을 끼쳤다. 두어 분이 춥지 않으냐고 묻기도 했다. 진정으로 걱정해서다. 나머지 분들도 궁금하셨겠지만, 그들도 자꾸 물으면 실례가 될 줄 알았는지 더는 묻지 않았다.
가벼운 차림으로 백두대간 산행을 했다. 새벽엔 손이 오그라들 정도로 추웠지만, 해가 뜨고 나니 괜찮아졌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몸을 바삐 움직인 덕인지 일행과 많이 뒤처지지도 않았다. 고루포기산을 지나면서 여유가 생겨 야생화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능경봉~대관령 구간은 백두대간 야생환 군락지였다. 봄꽃들의 잔치가 이미 벌어졌다. 5월에나 볼 꽃을 벌써 보다니. 대간에도 온난화가 온 것인가? 조금 일찍 온 대간의 봄과 아직 힘을 잃지 않은 대간의 겨울을 동시에 맛보았다. 삽당령~대관령 구간에서다.
잔뜩 겁먹은 상태로 출발
한 달 전 삽당령에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잇는다. 이번 구간은 삽당령에서 시작해 대관령까지 북진하는 구간이다. 도상거리 27.1km로 다소 길다. 예상 시간은 12시간 정도 걸린다고 산행 전 부산시민등산아카데미 총동창회 제1기 백두대간 종주대(총괄 박경효 단장, 총대장 김창진)에서 나눠준 지도에 적혀 있었다.
해발고도 680m인 삽당령에서 출발하여 석두봉(995m)~화란봉(1069m)~닭목령~고루포기산(1238m)~능경봉(1123m)~대관령까지다. 오전 3시 30분 삽당령에서 산행을 시작해 오후 2시 30분 대관령 숲길안내센터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빠른 11시간 만에 산행을 마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걷고 보니 뿌듯했지만, 출발 전에는 바짝 긴장했다. 산행 난이도는 중급, 사전에 체력 보충을 위한 준비가 필요한 구간이라는 공지가 떴다. 특히 산행 막바지에 이번 구간의 최고봉인 고루포기산과 능경봉을 올라야 하니 전체적으로 체력 안배를 잘해야 한다고 '참고 사항'에 명시돼 있었다.
장거리 산행이니 첫째 짐을 줄여야 한다. 둘째 복장도 가벼워야 한다. 셋째 낙오하면 안 된다를 되뇌었다. 그래서 출발 전 나 홀로 패션쇼를 감행했는데, 그 장소가 아파트 실내였다는 것이 문제.
정확하게 새벽 3시 30분 지난번 그 자리 삽당령에서 출발한다. 강릉시 왕산면 목계리다. 달이 휘영청 밝다. 가는 길을 내내 비춰주었다. 고개에서는 바람이 불지 않아 찬 기운만 느낄 수 있었는데, 산모롱이를 돌아서니 찬바람이 세차다. 버스에 두고 갈 요량이던 패딩을 꼭꼭 입은 채 오래 새벽길을 걸었다. 길바닥은 얼음이 얼었다. 등산화 밑에서 얼음 부스러지는 느낌이 푸근했다. 석두봉까지는 4.7km, 닭목령까지는 13.2km라는 이정표를 지난다. 어라 갑자기 휴대전화가 먹통이다.
추위에 민감한 내 아이폰이 스르르 잠이 든다. 그러고는 닭목령을 2.1km 남긴 화란봉 이정표에서 깬다. 해가 뜬 한참 뒤인 7시 52분에야 깨어나는 잠꾸러기다.
닭목령에서 다시 시작
화란봉에서 조금 더 가면 하늘전망대가 있다는 이정표가 있었는데 대간 구간이 아니라 놓쳤다. 사진 찍길 좋아하는 황계복 선배가 산행 마칠 때까지 아쉬워했다. 화란봉은 올랐다가 다시 돌아 내려와야 했다. 하늘이 청명하다. 기온이 살짝 떨어진 것이 걷기에는 훨씬 나은 것 같다. 자작나무가 더러 보인다. 흰 수피의 자작나무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북유럽에는 자작나무로 숟가락이나 국자 등을 만드는 '카빙'이라는 취미 장르가 인기다. 한때 카빙용 조각도를 모으기도 했는데, 자작나무를 보니 그 아련한 속살을 깎고 싶다.
닭목재로 내려서는 길에 잘생긴 금강송이 여럿 있다. 한옥을 짓는 대목장은 좋은 나무를 보면 탐을 낸다고 한다. 나무를 보는 저마다의 시각은 자신의 처지에서 비롯한다. 이 지점을 넘어서야 객관성이 유지된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객관성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최근 기자가 사는 아파트 주차장 요금을 정하는데, 차를 1대 가진 사람과 2대 가진 사람의 입장이 달랐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차가 없는 사람이 우리에게도 혜택을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주장했다. 자신의 처지에서 보면 다 맞는 말이다. 다만, 백두대간 금강송은 아름다웠다.
닭목령(단목재)은 이름처럼 고개의 모양이 닭의 목처럼 길게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풍수적으로도 금계포란형의 길지라 한다. 인근 안반데기가 우리나라 최대 고랭지 농산물 생산지이니 맞을 수도 있겠다. 이 길은 서쪽 산세가 험해 대관령보다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고랭지 농산물의 주 이동로라고 한다.
아스팔트 구절양장에서 절반의 성과를 누렸다. 번듯한 화장실 하나가 없는 게 아쉽긴 했다. 종주단 전체 기념사진을 찍는다. 후발대로 오고 있는 최고령 참가자인 고문단 일행은 여기서 산행을 마친다고 한다. 빨간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체력 조절이 필요한 구간이다. 닭목령 포장도로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임도를 따라 올라가는데 대형 굴삭기가 밭을 고르고 있다. 이곳 일대가 고랭지 채소 재배 단지라 넓은 밭은 익숙한 풍경이지만, 이렇게 백두대간 줄기는 조금씩 인간이 간섭하고 있다
고루포기산 대관령면 전망대
닭목재에서 출발하면 제1쉼터 2쉼터를 거쳐 고루포기산 정상이다. 이어 전망대와 쉼터를 하나 더 지나면 돌탑이 있고, 돌탑에서 올라서면 능경봉이다. 샘터가 있는 안부를 지나면 옛 대관령휴게소 자리다. 여기엔 대관령 숲길 안내센터가 있다.
눈앞에 풍력발전기가 즐비하다. 나무에 가려 전체가 드러나지는 않지만, 보이는 것만 어림잡아도 10여 개가 넘는다. 대간은 풍력발전기가 있는 능선까지는 접근하지 않고 요리조리 경계를 두고 이어지다가 고루포기산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발전기와 만난다.
임도와 산죽밭 사이를 번갈아 지나다가 산불을 이겨낸 금강송을 만났다. 밑둥치는 화마에 검게 그을렸다. 고목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나무라고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를 걷다가 벌써 꽃을 피운 얼레지를 만났다. 얼룩무늬의 넓은 잎과 보라색 꽃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왕산제2쉼터에 도착했다. 고루포기산이 1.3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다. 이번엔 노란 양지꽃을 만난다.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꽃이 보이더니 고루포기산이다. 고로쇠나무가 많이 자생한다고 하는데 산의 이름과의 연관성에 관한 기록은 없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남쪽 고랭지 농업지대가 발달해 산림이 훼손되는 대표적인 백두대간 훼손지로 적혀 있다. 백두대간 보호지역이 무색하다.
바람이 잦아드는 곳에서 지금까지 지고 온 점심을 먹는다. 쑥떡과 찹쌀떡, 밥과 빵, 다양한 메뉴를 나눠 먹었다. 첩첩산중에서 먹는 점심상이 푸짐하다.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괭이눈이 화려하게 피었다.
전망대는 넓은 덱으로 꾸며 놓았다. 평창동계올림픽 선수촌이 있는 평창군 대관령면 일대가 한눈에 보인다. 전망대 앞의 호랑버들 수꽃이 화사하다. 오늘 걷는 이 길은 백두대간이지만 강릉바우길이기도 한 모양이다. 작은 안내판이 붙어 있다. 연리지 나무를 지나니 샘터 이정표가 있다. 샘터는 능선에서 300m 정도 내려가야 있는 모양이다. 능경봉 1.9km가 남았다는 이정표에서 잠시 긴장을 늦춘다. 아끼며 지고 왔던 캔맥주 한 병을 흔쾌히 나눠주는 분이 있었다. 넙죽 한 잔을 받았다.
신기루 능경봉에 홀려
가는 길 앞쪽에 높이 솟은 봉우리가 능경봉일까 아닐까. 어떤 이는 맞다 하고, 어떤 이는 아니라고 했다. 봉우리의 왼쪽 사면 아래에는 쌍둥이 풍력발전기가 있다. 이미 대간 경험이 있는 한 참가자가 저기가 대관령인 것은 분명하다고 정리했다. 그렇다면 앞에 보이는 산이 능경봉일까 아닐까.
오름길 하나를 올랐는데 능경봉은 없었다. 또 하나 올랐는데, 이번에도 아니다. 능경봉에 올라야 오늘의 산행이 사실상 종결되는데 1.9km 남은 거리가 19km만큼 멀게 느껴졌다. 터벅터벅 걷는데 발아래 얼레지가 눈길을 유혹한다. 얼레지의 꽃말은 '질투'란다. 숲속의 요조숙녀라는 별칭으로도 부른다. 비늘줄기가 있어 가재무릇이라는 다름 이름도 있다. 얼레지는 특이하게 개미와 공생하는데, 개미가 얼레지 씨앗을 먹고 배설물로 씨앗을 퍼트려 준다고 한다.
행운의 돌탑이 눈앞에 보인다. 기초석은 제법 튼실한데 완성되지는 않았다. 대간꾼이나 고루포기산을 찾은 산꾼들이 돌 하나씩을 보태 돌탑을 만드는 중이다. 돌탑을 지나자 드디어 능경봉이다. 앞선 몇 번의 오르막에서 지나친 기대를 했던 것은 체력이 거의 고갈됐기 때문일까.
능경봉에서 본 동해가 푸르다. 봄철이라 선명하지는 않지만, 동해가 저기 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능경봉 정상석은 원래 자리가 아니라 동해 쪽으로 몇 걸음 물러나 있다. 사진을 찍어 보니 이유를 알겠다. 누군가 동해를 배경에 잘 넣기 위해 정상석을 뒤로 물린 것이다. 참 별난 수고를 한 분들이 있다. 능경봉에서 대관령까지는 1.7km. 내리 내리막이라 수월하다고 한다. 주변이 야생화 천국이라 발걸음도 가볍다. 언 땅이 녹아 질척거리지만 개의치 않는다.
진보라 현호색이 기를 불어넣어 준다. 박새도 힘차게 줄기를 밀어 올리고 있다. 이번엔 홀아비바람꽃이다. 어디다 눈을 둬야 하나. 빨간 버스가 기다리는 대관령으로 가야 하는 데 발길은 자꾸 꽃 앞에 멈춘다.
강원도 물인심 참좋다
민족의 대동맥 동해영동 고속도로준공기념비. 60년대 출생 세대에겐 익숙한 글씨체다. 지금은 휴게소가 이전해 준공기념비만 대간꾼들을 기다리고 있다. 준공기념비에서 계단을 내려가니 선자령 5km라는 이정표가 있다. 드디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오늘은 여기서 멈춘다.
하루 종일 걸어 땀도 많이 흘렸다. 다행히 화장실이 있어 뛰어갔다. 그런데 웬걸, 세면대의 수도꼭지가 잠겼다. 시원하게 찬물 세수를 하겠다는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변했다. 인근에 대관령 숲길 안내센터가 있어 물었다. "여자 화장실에는 물이 나올 겁니다." 여자 화장실에 가라는 이야기인지? 할 수 없이 버스에 올랐다. 뒤처진 일행을 기다리느라 다들 버스에 있는데 여성 참가자 한 분이 온수가 나오는 화장실을 이용하고 왔다고 했다. 다들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고 몇 명이 대관령 숲길 안내센터 옆 '온수 화장실' 건물로 달려갔다. 그런데 안내센터에서 나온 관계자가 출입을 막았다. '산꾼들은 화장실 사용 금지. 당신들은 세면대 물이 안 나오는 화장실만 사용하라'는 통보였다.
물론 등산화에 흙도 묻었겠고, 일부 급한 산꾼들이 머리를 감아 세면대가 막히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백두대간이 지나는 대관령이 아니던가. 뜨내기 산꾼이 아니라 다음에도 또 강원도를 찾을 사람들이다. 안내센터 건물은 번듯하게 지어놓고, 물 인심 한번 참 고약했다. 야외 세면장이라도 운영한다면, 실내 화장실에서 발생하는 그분들의 다양한 애로가 해결될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부산에서 간 산꾼들은 군말 없이 다시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인근 식당에서 평창 막국수와 수육을 단체로 사 먹었다. 그 식당의 한쪽에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관련 기념관이 마련돼 있었다. 밖에서 보니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그해의 축제에 관한 기록이 오롯이 놓여 있다. 대관령 물인심은 고약했지만, 이 집 막국수는 최고였다.
강원도 평창 대관령/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
2023-04-20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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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뜨거운 전설은 아직도 땅속에 묻혀 있다-운석공 환종주 2
경남 합천 운석공 환종주 첫날 대암산은 조망이 좋았다. 대암산 초팔성이 대가야 때부터 합천과 초계·적중 일대를 지키는 관측소 역할이 강했다면, 둘째 날 오를 미타산(663m)은 정상 산성에 우물도 있었다고 하니 일정 병력이 주둔할 만했겠다. 고려말 무신들의 권력 다툼 와중에 경주 출신 무신 권력자 이의민이 미타산 별장에서 하산하다가 최충헌 세력에게 살해당한 역사적 사건도 있었다. 미타산성이 요새의 역할을 했을 것이란 추론이다. 후인이야 산정에 남은 작은 성벽 하나로 세월의 무상함을 엿볼 뿐이다.
한껏 고도가 높아진 합천 운석공 환종주 2일 차 코스는 푹신한 낙엽길과 소나무 숲길이 이어지다가 미타산을 지나서는 특이한 암석군이 있는 풍경도 마주친다. 미타산 산행은 의령 방면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환종주는 온전히 운석공을 느낄 수 있는 독특함이 있다. 운석공 지하 수백m 아래 5만 년 전 별이 타다 만 채로 아직 웅크리고 있는지도 혹 모르니까.
큰고개재에서 재다짐
첫날 여유 있게 걸은 때문인지 피로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새벽 공기도 좋았다. 황계복 부산등산아카데미 강사는 아침 일찍부터 주차장에서 한달음에 일출 사진을 찍으러 대암산에 갔다. 모두 좋은 컨디션으로 하루 일정을 또 시작한다.
둘째 날은 미타산이 주봉이다. 활공장으로 가는 임도가 잘 나 있어서 초계·적중에서나 반대편 의령에서나 접근성이 좋다. 이날 산행을 마치고 의령 방면 임도로 하산했는데 대암산 임도는 아무래도 합천에서 올라오는 것이 거리도 조금 짧고 운전하기 나은 편이다.
짐을 꾸리고 정리하니 오전 8시가 되었다. 활공장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무월봉(608m)~태백산(579m)~큰고개재~천황산(688m)~천황산 삼거리(국사봉 갈림길)~삼각점봉(655m)~미타산 임도 이정표~미타산성 ~미타산(663m)~홀로재~290m봉(가매실봉)~ 24번국도(송림재)까지 가는 길이다. 점심과 휴식 시간을 포함해 7시간 40분 걸렸다.
무월봉으로 오르는 길에 산딸기 덤불이 꽤 있다. 제법 둥치가 큰 소나무 한 그루가 미끈한 뿌리를 드러내고 있다. 자세히 보니 바람에 살짝 기울었지만, 용케 지탱하고 있는데 드러난 뿌리는 줄기로 변한 상태다. 소나무의 끈기를 본다. 무월봉은 헬기장임이 짐작될 뿐 온통 풀밭이다. 주변의 나무도 많이 자라 조망이 시원치 않다.
무월봉에서 태백산으로 가기 위해 살짝 내려선다. 앞서가던 신세균 부산수목산악회 회장이 발밑을 조심하라고 일러준다. 낙엽 속에 삐죽 솟은 스테인리스 환봉이 있다. 아마 등산로 계단을 지탱하던 쐐기용이었던 것인데 나무는 썩고 없는데 말뚝만 남았다. 조심스레 바닥만 보면서 걷는다.
출발한 지 1시간여 만에 태백산에 다다랐다. 어설픈 정상 표지가 있다. 큰고개재로 내려간다. 소나무 숲길이 탐스럽다. 태백산에서 30분 남짓 걸어 큰고개다. 내리막이니 또 오르막이다. 미타산만 오른다고 다짐한다.
미타산성엔 오래된 시계가
산길 곳곳에 멧돼지의 흔적이 많다. 야생동물이 흔한 것이야 자연의 회복이라고 하지만, 특정 개체가 너무 많은 것도 문제다. 초식동물을 조절할 수 있는 대형 육식동물이 멸종한 한반도의 남쪽은 오직 인간만이 조절자일 수밖에 없다. 한계 또한 분명하다. 작은대암산 오르는 길에 둘레에 철망을 친 묘를 보았다. 또 그렇지 못한 묘는 봉분이 반 넘어 파헤쳐졌다. 어떤 파묘자리는 멧돼지의 진흙욕탕이 되었다. 큰고개재 못 미쳐 작은 묘비석 하나가 있었다. 봉분도 없이 묘비석만 있었는데 그마저도 훼손당할까 걱정했던지 후손은 묘소 주변에 경광봉을 두 개나 달아놓았다. 아마 밤이 되면 불빛을 내어 짐승을 쫓을 것이다.
한때 영화로웠던 이의민의 미타산 별장은 지금 어떤 수풀 속에 잠겨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5만 년 전 불구덩이가 지금은 옥토가 되었듯 말이다.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체력이 점점 바닥이 나고 있다는 증거다. 그래도 열심히 걸었다.
큰고개에서 미타산을 오르는 길은 아마도 송전선로를 건설하기 위해 길을 닦았던 탓인지 등산로가 웬만한 임도만큼 넓었다. 그래서 가시덤불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1시간을 쉼 없이 오르니 천황산이다. 조망이 좋아 함께 물과 간식을 먹으며 쉰다.
국사봉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는 쉼터 삼거리에 30분이 채 안 걸려 도착했다. 이 산중에 벤치를 여러 개 설치해 두었다. 아무래도 의령 쪽에서 임도를 이용해서 설치한 모양이다. 쓰러졌던 소나무가 살아났는지, 큰 둥치가 잘리고 가지가 자랐는지는 모르지만 옆으로 길게 뻗는 분재형 소나무가 산꾼을 반긴다. 벤치가 있는 쉼터에서 합천 쪽 상홍사로 내려가는 이정표가 있다. 삼거리 갈림길에서 1시간을 걸어 미타산성 입구에 선다. 성벽 입구인 듯 짧은 구간만 복원한 모양이다. 성문을 지나니 소나무에 설치한 예술작품 같은 오래된 시계가 있다. 시간은 오후 1시로 고정돼 있어 어쨌거나 하루에 꼭 두 번은 정확하게 맞는 시계다.
진달래 산천 지나 홀로재
오래된 시계 작품(?)을 지나며 고개를 드니 커다란 정자가 있다. 여름엔 낮잠 한숨 즐기기 좋은 곳이다. 바닥을 봤더니 솔가지가 잔뜩 깔려 있어 이용한 지 오래된 줄 알겠다.
미타산 정상석은 대암산의 그것만큼 거대했다. 정상석 부근에 넓은 평지가 있어 그늘을 찾아 점심을 먹는다. 정상석에서 운석공이 보이는 곳으로 다가갔더니 전망이 좋은 곳이 있다. 고도는 대암산보다 높지만, 조망은 썩 시원하지는 않다. 꼭 높거나 비교 대상보다 조건이 뛰어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뜨거운 물 한 모금 못 하고, 설익은 햇반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생쌀보다 낫다' '육이오 때보다 호강이다'라는 농담을 섞어가며 그래도 맛난 점심을 먹었다. 한참을 쉰 후에 송림재로 향한다. 10여 분을 걸으니 기묘한 바위군이 펼쳐진다.
지금껏 바위가 제대로 있는 산길은 없었다. 이곳은 운석의 영향을 덜 받았던가. 대문처럼 통과하는 석문 앞에 있는 바위는 제법 큰 구멍이 생겨 물이 고여 있다. 석정바위로 산꾼들이 부른다. 흔들바위도 있다는데 굳이 찾아보지는 않았다.
오뚝이처럼 생긴 바위를 지나 내리막길로 접어드니 진달래가 지천이다. 앞서가던 이들이 꽃잎을 따 먹기 시작한다. 쌉쌀하니 갈증을 해소하는 독특한 맛이 있다. 한때 진달래꽃을 많이 먹고 중독된 경험이 있어 많이 먹지는 않았다.
미타산에서 1시간 하고도 10분을 더 걸었다. 송림재가 3.5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에서 20분쯤 정신없이 걸으니 홀로재다. 홀로재에는 임도 변에 작은 쉼터가 있다.
산행을 마친 후 합천 운석충돌구의 진상을 밝힌 임춘지 전 군의원과 통화할 수 있었다. 선친의 규명 노력을 잊지 않았고, 본인이 군의원으로 재직 당시 과학적 규명을 이뤘으니 부녀의 팀워크가 대단하다. 임 전 의원은 '합천운석충돌구관광추진협회' 이사장을 맡아 사단법인 등록을 진행하고 있다며 "합천의 관광 백년지계를 이어갈 운석충돌구 관광 활성화에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옥두봉은 어디메
홀로재를 오른다. 15분쯤 오름길을 올랐을까. 된 숨을 연거푸 쉬면서 가매실봉이라는 이정표에 도착한다. 해발 290m란다. 많이 내려왔다. 소나무 숲길이 지루하지 않다. 가매실봉 이정표에서 40분을 더 걸으니 송림재가 훤히 보인다. 급한 마음에 내려가다가 가시밭길로 접어들었다. 역시 막판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
편도 2차로 왕복 4차로 포장국도 옆에 미타산 이정표가 거대하게 세워져 있다. 고개를 넘으면 적중면이어서 적중면 안내 비석도 번듯하다.
선형을 개량했는지 옛 도로가 왕복 4차로 옆에 그대로 남아 있어 주차 걱정은 없겠다. 주차 자리가 좋으니 합천 운석공 환종주의 시작과 도착은 여기서 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남은 구간은 송림재에서 옥두봉을 올라 적중교로 내려서면 된다. 그런데 옥두봉으로 오르는 진입로가 없다. 급경사 비탈인 데다, 진입로로 보이는 곳에 로프 하나가 있는데 그 끝이 오히려 더 불안한 낭떠러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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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깎으며 산비탈에 콘크리트 수로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근처에 표지기 두어 개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그때 웬 트럭 한 대가 가던 길을 멈추고 서더니 기사가 내려서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환종주 산행하느냐고 묻고는 자기는 이 동네 사는 노 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등산로가 미비해 죄송하다며, 다음에는 좋은 등산로로 보답하겠다고 사과까지 했다. 합천은 뼈대 있는 고장이라더니,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노 씨 말로는 대부분 송림재에서 미타산 방향, 즉 시계 방향으로 많이 가고, 발 빠른 사람은 11시간에도 마친다며 1박 2일 동안 걸은 우리의 기를 죽였다. 따져 보면 우리 팀도 쉬며, 가며 14시간 남짓 걸었다.
옥두봉까지 온전히 잇는 환종주 산행은 등산로가 정비된 이후로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노 씨 성을 가진 분이 적중교까지 차를 태워줘 편하게 차량을 회수할 수 있었다.
산세도 좋고 인심도 좋은 합천 운석공 환종주 산행. 다음에 또 오겠다는 것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의무다. 단, 등산로가 좀 정비되어야 한다.
합천 운석공=글·사진 이재희 기자 jaehee@
2023-04-11 [1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