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모룡 칼럼] 대양적 전환과 부산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1952년 고려호 부산서 태평양 건너
우리나라 ‘대양 항해’ 시초로 봐
전쟁 물자 수송 이루어진 한국전쟁
부산항 역사 바꾸어 놓은 계기 돼
우리 사회 모순 극복하고 나아가는
미래 한국의 ‘대안 공간 부산’ 돼야
대양적 전환은 칼 슈미트의 용어이다. 유럽이 지중해를 벗어나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나온 일을 말한다.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인도양에 이르러 향신료 무역을 하던 일이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발견하면서 세계적 규모의 공간 혁명이 시작되었다. 대양(ocean)은 인도양, 대서양, 태평양, 남극해, 북극해 등 다섯 개다. 서구인은 대양과 바다를 아주 선명하게 구별해 사용한다. 바다(sea)는 뭍(land)의 단순한 대응 개념에 불과하다. 육지 속의 바다인 강을 아울러 지구의 7할 이상이 바다이다. 그러므로 대양은 먼 바다이다. 그게 얼마나 먼가를 알려면 육지 사이에 놓인 지중해를 생각하면 된다. 가령 동해에서 동중국해에 이르는 바다는 동아시아 지중해이고 남중국해 아래 동남아 해역을 포함하면 아시아 지중해이다. 이러한 지중해를 모두 연안(coast)으로 규정하는데 대양적 전환은 이러한 연안을 넘어서는 일에 다를 바 없다.
15세기 말에 서구의 대양적 전환이 시작돼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미국으로 그 주도권이 바뀌어 왔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과 더불어 서둘러 해양을 지향했다.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북방 대륙은 물론 남방 해역으로 제국의 영역을 넓혔다. 주지하듯이 대한제국은 이러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는데 해역 혹은 대양의 세계와 접촉하지 못한 원인이 크다. 일제가 지배하던 시기에 한국은 대양으로 나아갈 방도가 없었다. 제국의 바다에 갇힌 형국이었으니 그저 해협을 오가는 데 그쳤다. 소설가 이병주가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를 왕래하던 관부연락선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가 소설에서 말했듯이 영광과 굴욕이 함께 하는 자리였다.
그렇다면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찾아온 해방이 한국의 대양적 전환을 가능하게 했을까?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 다급한 처지에서 그 외부를 제대로 살필 겨를이 충분하지 않았다. 형식 논리에서 해방이 해양의 해방이라 할 수 있으나 그 실제에서 대양으로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태평양의 지배권을 가진 미국의 군정(GHQ)이 제약한 해양 한계선 안에 있던 한국이 대양을 접속할 여력은 없었으며 그나마 일제가 남긴 선박을 수습해 정부가 해운을 통합, 1949년 대한해운공사를 설립한 일이 다행스럽다. 극동해운 소속의 고려호가 고철을 싣고 1952년 10월 21일 부산항을 출항해 태평양을 건넌 일이 대양 항해의 시초이며 대한해운공사에 의한 대미 정기항로 개설은 1953년 동해호와 서해호를 미주항로에 취항한 데서 비롯한다. 이로부터 부산호, 마산호, 동해호, 서해호, 남해호, 천지호를 도입한 대한해운공사가 동남아와 미국 간 항로를 확대했으니 늦었으나 힘겨운 대양적 전환의 시동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의 대양적 전환은 한국전쟁이 만든 시공간에 하나의 역설로 가능했다. 임시수도 부산의 역사에서 대양적 전환은 결코 간과할 수 없이 중요한 사건이다. 물론 외부로부터 UN군이 들어오고 전쟁 물자가 수송되는 등의 과정으로 이뤄진 대양의 접속이라는 측면이 있다. 정부 수립 이후에 해사 행정 체계를 어느 정도 수립했으나 외항선의 현실이 거의 무질서에 가까웠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은 부산항의 역사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전쟁으로 인한 해운 부문의 파괴가 광범한 가운데 부산항을 중심으로 한일 항로를 통해 후방 운송 활동을 전개했으니 다른 한편으로 해방 이전 항로의 복원에 상응한다. 한동안 일본 선박이 부산항을 휘젓는 사태가 있었는데 1954년이 돼 모두 철수하는 형세였다. 그만큼 우리의 자주적인 대양 항해는 지체됐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이 자유 대양의 중요성을 외쳤으나 식민 지배로 좌절된 일이 1950년대에 와서 실현됐다. 임시수도, 전시수도, 피란수도 등으로 불리는 말은 한국전쟁 시기 부산의 지위를 지시하는바, 그 의미의 많은 부분을 부산항에 돌려야 한다. 단지 천일 동안 수도 역할을 했다는 한시적 영광을 기념하는 일에 그치지 않아야 하는데, 부산항을 통해 한국이 대양적 전환을 이루었고 이로부터 자본주의 세계와 동행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부산항은 부산의 핵심에 그치지 않고 한국 사회의 중추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우리 사회가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진행한 원양어선의 출항과 더불어 무수한 상선이 오가면서 근대화가 성취됐다. 그러므로 보상받아 얻을 해양의 수도라는 수사에 그칠 일이 아니라 부산은 한국 사회의 근본 모순인 서울 중심주의의 일극체제를 극복하고 아시아 지중해와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미래 한국의 대안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아시아 해역의 여러 나라 도시와 교류하고 다른 한편으로 환태평양의 국가와 연결하면서 세계와 함께하며 다문화주의를 실현하는 세계도시 싱가포르에 버금가는 네트워크 도시 부산이 되어야 한다.